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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67화 (6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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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저 계집을 당장 붙잡아라! 당장!”

헤라르일라 공작이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짓도 정도가 있지! 당장 저년을 수도병에게 넘겨라!”

“아버지!”

“닥치거라! 닥쳐, 패트리샤!!”

공작이 제 분을 못 이기고 다시 한번 물건을 집어 던졌다.

그 화병이 아슬아슬하게 엠마를 비껴갔다.

두려운 듯 온몸을 벌벌 떨면서도 저 멍청한 게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엠마! 왜 그러고 서 있어! 당장 똑바로 말해!”

엠마에게 악을 쓰며 외치던 그때 내게 다가온 공작이 사정없이 뺨을 내리쳤다.

철썩.

순간 눈앞이 아찔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분명 입을 다물라고 했어. 패트리샤, 이번이 마지막 경고다.”

공작에게 맞은 뺨은 감각이 없는 듯 얼얼하다 이내 화끈거리며 아파 왔다.

주르륵.

입 안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고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저 봄이 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그때가 되면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는데.

대체 일이 어쩌다 이렇게 꼬여 버린 걸까?

갑자기 벌어진 사고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삐이-.

몸 안을 가득 채우는 그 이명에 현실이 더욱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머리는 멍했고.

그리고 또, 엠마가 뭐라 말하는 듯했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건장한 두 사내가 우악스레 엠마를 포박해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지 엠마는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거짓말! 거짓말이잖아!!”

서둘러 일어나 엠마를 따라가려는 날 공작이 힘줘 잡았다.

“거짓말이잖아! 네가 왜 그 영애한테!”

“그만하거라!”

“네가 무슨 독을 타!!”

내가 이렇게 악을 쓰며 외치는데.

그만하면, 내가 이만하면 사실을 말해 줘도 되잖아.

“야!!”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멍청한 계집이 독하기까지 했다.

“흐으, 흐아앙!”

공작이 잡고 있던 내 팔을 세차게 내던졌고 나는 다시 한번 쓰러지고 말았다.

“멍청한 것! 꼴도 보기 싫다!!”

폭언과 폭력. 무시와 비난에서 드디어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힘겹게 이뤘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내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미처 오늘 아침까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 * *

“카를로스. 가자.”

“네.”

카를로스가 커다란 짐가방을 어깨에 맨 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카를로스가 헤라르일라 공작저의 일을 그만두는 날이었다.

게르하르트 공작저로 합숙 훈련을 떠나는 날이기도 했고.

“무겁지 않아? 들어 줄까?”

제 몸만 한 가방을 짊어진 카를로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공녀님이 제 짐을 왜 옮겨 주세요? 제가 사용인이라고요.”

“이제 아니잖아.”

“…신분 차이를 말한 거예요.”

“우린 친구인걸?”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카를로스의 가방 밑을 힘줘 들어 올리자 깜짝 놀란 그가 서둘러 앞질러 갔다.

“신분 차이가 아니더라고 절 도와주실 필요는 없으세요. 저 이젠 공녀님과 키도 비슷한걸요?”

물론 아직 내가 더 컸지만, 나도 카를로스도 구태여 그 사실은 집어내지 않았다.

내 도움을 완강히 거부하는 카를로스에 나는 걸음을 재촉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자, 타.”

“…감사해요.”

카를로스는 내가 마차의 문을 열어 주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어? 공녀님은 왜…. 어디 가세요?”

“너랑 같이 게르하르트 공작저에. 배웅차.”

“혼자 가도 되는데.”

카를로스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가 머뭇거리며 말을 고를 때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공녀님과 엠마님은. 그러니까….”

카를로스는 합숙 훈련이 기대되는 듯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 먼저 게르하르트의 영지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카를로스 본인이 정한 결정이었다.

어쨌거나 나이도 어린 자신이 중간에 합류해 합숙 훈련에 따라가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걸 그도 잘 알았으니.

“카를로스. 나랑 엠마도 금방 따라 내려갈 거야.”

“네. 삼 개월만 기다리면 되는 거잖아요. 아무 문제 없어요.”

카를로스는 제 기분을 들킨 게 무안한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그땐 진짜 나보다 더 키가 커 있을 수도 있겠다.”

“….”

“이제 글도 쓸 수 있으니까 종종 편지 보내 줘.”

그제야 카를로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지만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카를로스의 기분이 여실히 느껴져 나는 부러 더 밝게 웃어 보였다.

“나도 자주 편지할게.”

“네. 공녀님, 근데 오늘 로드리게즈 영애와 만나시는 거 아니에요?”

“응. 맞아.”

서커스 날 이후 이 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종종 티파티에서 아르세르를 보기도 했지만, 단둘이 약속을 잡은 건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럼 시간은 괜찮으세요?”

“응. 영애가 세 시에 오기로 해서 괜찮아.”

나는 사실 아직도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편하지는 않았다.

아르세르가 미워서라기보다 그녀를 통해 내 유치하고 치사한 면을 보게 되어서일 테지.

결국 수도의 사교계에 적응하고 싶다던 아르세르의 바람에 나는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았고.

내 맘대로 로렌스와 아르세르를 엮어 주려 하다 내 맘대로 그녀를 미워했으니.

그 일들에 아르세르를 떠올리면 껄끄럽고 창피하고 미안했다.

여러 이유들로 아르세르가 불편했는데.

그냥 불편해하기로 했다.

물론 이게 정답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르세르를 꼭 좋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세르가 여자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친근히 다가온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좋아해야 할 의무 같은 건 내게 없는 것이었다.

물론 모두를 좋아할 수 있다면 완벽하겠지만.

의도적인, 계획적인 피해만 안 주면 될 것 아닌가.

좋아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려도 괜찮지 않은가.

설령 시간을 들여도 좋아지지 않을 수도 있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로드리게즈 영애만 초대하신 거예요?”

“응. 영애가 자기만 초대해 달라고 해서.”

마차는 어느새 게르하르트 공작저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공작가의 집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녀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이쪽이 카를로스예요.”

카를로스는 집사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다 제 가방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이었다.

“전 괜찮아요.”

집사와 내가 동시에 손을 뻗었고 카를로스는 무안한 듯 얼굴을 붉혔다.

이 어리숙한 것을 혼자 보내도 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딱히 나이 제한을 두는 것은 아니었지만, 게르하르트 공작가의 기사는 전부 성인이었다.

어린 카를로스가 저 혼자 합숙 훈련을 잘 받아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서둘러 출발하겠습니다.”

“네. 정말 감사해요.”

“아닙니다. 소공작님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

집사는 게르하르트의 마차로 카를로스를 안내했다.

직접 마차를 준비해 준 로렌스 덕분에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개인 마차들은 멀리까지 잘 이동하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 계절에 게르하르트 영지까지는 더더욱 말이다.

어린 카를로스가 혼자 마차를 갈아타야 한다는 게 걱정됐는데, 신경 써 준 로렌스가 고마울 뿐이었다.

“카를로스, 혹 필요한 게 있으면 이거 써.”

나는 마차에 올라탄 카를로스의 손에 서둘러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공녀님, 저도 돈은 있어요.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 일하며 많이 모아 놨는걸요?”

부담되는지 카를로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상이 됐다.

“알지. 아는데 그냥 받아 둬. 혹시나 해서 주는 거야.”

“…공녀님.”

“정 그러면 잘 갖고 있다가 내가 게르하르트 영지에 내려갈 때 다시 주든가.”

나는 카를로스의 손을 살짝 잡고는 서둘러 말했다.

“아프면 참지 말고 아프다 하고. 누가 괴롭히면 소공작한테 말해. 알았지?”

“네.”

“도착하면 편지 줘.”

카를로스가 다시 한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더 많았지만 우리의 대화가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집사에 나는 천천히 마차에서 물러섰다.

“카를로스, 조심히 가.”

내가 손을 흔들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를로스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끝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꾸벅이었다.

* * *

똑똑.

“공녀님, 로드리게즈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영애는? 응접실에 계시니?”

“네.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응접실로 들어서니 아르세르의 짙은 갈색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문이 열린 소리를 들은 듯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듯 활짝 웃은 아르세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트리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아르세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엠마가 눈에 들어왔다.

“엠마, 다과 좀 준비해 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엠마의 눈이 끝까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다과를 부탁한다 말하며 문을 굳게 닫았다.

아르세르의 행동을 문제 삼지 말라는 내 뜻을 이해했길 바라며.

“영애. 편히 앉아요.”

“네. 아, 패트리샤는 그래서 정확히 언제 떠나는 거예요?”

“으음, 3월쯤 내려갈 것 같아요.”

아르세르는 남은 날을 세 보듯 눈을 도르륵 굴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가 이렇게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은 아니겠죠?”

“시간이 되고 영애만 괜찮다면.”

너무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는 아르세르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오늘 왜 단둘이 보고 싶다고 하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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