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화 (1/141)

1화

내 이름은 레티시아 에시어.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느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꿈을 꿈 것은 아니냐고.

처음 전생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을 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모든 것은 꿈이라고.

할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전장에서 아버지의 부고장이 날아온 그 끔찍한 악몽의 연장선상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공작가에서 쫓겨난 그 밤, 마차 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던 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건 꿈이 아니었다.

작게는 내가 전생에 한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이시아였다는 것과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그 이시아가 전생에서 읽었던 소설 속이라는 것부터.

크게는 그 소설 속 조연이 바로 레티시아 에시어, 나라는 사실까지.

아! 그리고 머지않아 망해 버릴 가문의 앞날까지도 현실처럼 너무 선명하고 생생했다.

‘에시어가 망한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소설 속 조연이라는 것보다, 에시어 공작가가 망한다는 걸 더욱더 믿을 수가 없었다.

테파로아 제국과 소모멧 황가를 지탱하고 있는 5개의 공작가 중 하나가 에시어였으니까.

심지어는 정복 전쟁 과정에서 흡수한 왕국에 작위를 내려 이어져 온 다른 3개의 공작가와 달리, 에시어는 황제와 함께 제국을 세운 공신이었다.

한데, 그런 공작가가 망하다니.

그걸 누가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이 악몽을 혼자 끌어안고 끙끙대는 사이 에시어의 잔혹사는 이미 막이 올라 있었다.

‘에시어 일족들은 전부 씨를 말려라.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마.’

나를 쫓아낸, 내 망할 놈의 작은아버지, 안드레아 에시어는 11대 가주가 되자마자 탈세로 탄핵 당했다.

어디 잘못이 탈세뿐일까. 횡령부터 폭행과 뇌물까지. 그야말로 갖가지 지저분한 죄를 지었다는 명분으로 에시어를 몰락의 길로 몰아넣더니-

끝내는 역모죄까지 저질렀다.

남자 주인공이자, 황태자 칼리안을 죽이고 자신이 지지하는 2황자를 옹립하려 했다는 죄명이었다.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인내가 끊어진 듯, 황가에서는 에시어 일족에 대한 현상금까지 내걸어 가며 모두를 죽이라 명령했다.

가신들까지 모두 다 말이다.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일어나는 일들이 소설 속 이야기와 전부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생각은-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에시어에서 쫓겨났다고 해도 내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수도는 안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이름을 지우고, 수도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걸까.

도망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온 제국을 덮친 커다란 지진에 자고 있던 내 몸 위로 벽과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암전.

기억은 거기서 끊어졌다.

당시 내 나이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아파.’

온몸이 욱신거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직 죽지 않은 건지, 온몸으로 느껴지는 통증에 고통스러웠다.

솔직히 살고 싶어 도망을 치긴 했지만, 전생을 깨달은 순간부터 언젠가는 이렇게 죽게 될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물론 돌에 깔려 죽을 줄은 몰랐지만.

소설 진행에 전혀 영향 없는, 심지어 중심부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나온 찌끄래기 조연을 꼭 죽였어야 했을까.

‘어지간하면 난 좀 살려 주지.’

이전 생에서도 스무 살이 갓 넘은 나이에 차에 치여 죽었었다.

고아였던 삶은 사는 내내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 기억 덕분에 가문에서 쫓겨난 이후 그나마 살 수 있었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던 이시아의 기억.

눈칫밥과 욕을 동시에 먹으면서도 뻔뻔하게 웃을 수 있는 멘탈과 하나를 주려고 하면 열 개를 얻어 낼 수 있는 말솜씨와 열 개의 일을 하나로 줄이는 잔머리.

‘레샤는 정말 똑똑하구나!’

‘어쩜 이렇게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게냐!’

‘역시 레샤가 최고라니까!’

가문에서 쫓겨난 시점에서 이시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 정말 천운이었다.

만약 귀족 영애였던 레티시아의 기억만 가진 채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솔직히 상상조차 어려웠다.

‘수도에서 벗어난 그 날 바로 굶어 죽었을 수도.’

물론 과거의 기억이 있었다 해도 쉬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살고 싶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도 많았고, 조금은 행복하기까지 했었다.

만약 내가 수도에 살았으면? 아니, 여전히 공작가의 레이디였다면.

‘살았을 수도 있겠지?’

소설 속에서 황도는 남자 주인공이 발현한 마법진으로 보호되었으니까.

‘그랬다면.’

하지만 살고 싶다는 의지와 동시에 밀려드는 선연한 통증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무슨 의미가 있나.’

이미 죽었는데.

힘없는 웃음에 까만 눈앞은 아득하게 멀어졌다.

다음 생은 좀 나아지려나.

환생을 겪고 나니, 다음 생이 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실없이 들었다.

다음이 있다면-

‘조금만 더 행복하게 해 주세요.’

기도처럼 눈을 감은 채 마지막 숨을 툭 하고 뱉은 순간-

“아기씨!”

누군가 내 몸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주무시기만 할 거예요! 일어날 때가 지났잖아요!”

익숙한 하녀의 짜증 섞인 목소리.

‘응?’

아기씨라니.

그건 내가 어린 시절 공작가의 사용인들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호칭이었다.

‘설마 주마등인가?’

근데 주마등도 하필이면 날 싫어하고 괴롭히던 하녀라니.

‘인생 참.’

이왕이면 아버지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마지막 기억이지 않은가.

물론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1년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내야 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낯설어하는 어린 딸.

그 물리적 거리는 여간해선 좁혀지지 않았다.

기사였던 아버지는 무정했고, 차가웠으니 정과 사랑에 굶주렸던 난 아버지가 나를 싫어한다고까지 생각했다.

사촌들도 그렇게 부추겼고.

‘너 같은 무능한 병신을 누가 딸로 인정하겠냐?’

‘하겠냐?’

그래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린 시절부터 내내 원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그 좁혀지지 않는 물리적 거리를 나름 최선을 다해 메꾸려고 노력했었던 것 같다.

전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황궁보다 더 먼저 레티시아를 찾았고, 그렇게 마주할 때면 굳은살이 잔뜩 박인 딱딱한 손으로 레티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으니까.

‘잘 지냈느냐. 레티시아.’

라는 짧은 물음과 함께.

어릴 때는 매번 반복되는 그 말이 어찌나 서운했던지, 내내 아버지만 기다리며 잔뜩 부풀어 있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쉬쉭 하고 식어 버리는 것만 같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잘 지냈느냐 레티시아.’

보고 싶었단다.

그 숨겨진 말의 의미를.

‘아버지.’

입 안에서 맴도는 이름을 삼킨 채, 뻐근한 가슴 사이로 맺힌 숨을 후- 하고 뱉어 냈다.

마지막 주마등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은 보아야지 않겠는가.

해서 천천히 눈을 떴다.

“으음.”

가물가물한 눈을 올려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건 익숙한 천장이었다.

가문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매일 보며 아침을 맞이하던 그 황금색 천장. 언뜻 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싸구려 티가 확 나는 천장의 무늬와 모서리 쪽에 보이는 가는 거미줄.

“똑같네.”

하지만 순간의 그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우악스럽게 팔을 비틀어 쥐는 통증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꾀병 부리시면서 누워 있을 작정이신데요! 얼른 일어나세요!”

그러곤 억지로 몸을 당겨 일으키는 하녀의 악력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고, 그와 동시에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파하.”

“아프긴 뭐가! 진짜 적당히 좀 하세요! 유모도 없는데 자꾸 그렇게 꾀병 부리시면, 저희 일이 늘어나잖아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소리를 높이는 목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아리나?”

‘아리나는 몇 년 전에 죽었는데?’

‘주마등이 아니라, 아예 저승인 건가.’

‘설마 여기서도 아리나한테 괴롭힘을 당해야 해?’

아리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밀려드는 당혹감에 고개를 숙이자 아리나에게 잡힌 팔이 유독 짧아 보였다.

그리고 아팠다.

‘주마등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그리고 주마등은 지나간 기억들 아닌가?’

‘기억 속에 아리나와 이런 순간은 없었는데?’

그럼.

‘이게 뭐지?’

멍한 시선을 두어 번 더 끔벅이다,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곤 아리나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곤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기씨 이게 무슨 버릇없는 짓이에요!”

뒤에서 들리는 아리나의 성난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거울 앞으로 다가가 선 내 눈에 비친 건 작고, 어린 레티시아였다.

“이게 무슨.”

눈앞에 펼쳐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눈을 깜박이며 한참 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다 문득 치마를 말아 올렸다.

“없어.”

6살 겨울 무렵 크게 넘어져서 생겼던 양쪽 무릎의 상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멍하니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손으로 더듬거리다 홀린 것처럼 손을 올려 들었다.

짝-.

그러곤 강하게 뺨을 내리쳤다.

하지만-

“아파.”

아팠다.

“아기씨!”

“아프네.”

꿈도, 주마등도 아니라 여겨질 정도로 아주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설마.

“돌아온 거야?”

정말.

6살의 레티시아로 회귀했다고?

말도 안 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