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3)화 (3/141)

3화

후계자 적격 심사.

겉으로는 가문의 선생들을 모셔 에시어 3세들의 후계 가능성을 논하는 날이었다만, 전생에서의 이날은 [레티시아 성토대회]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건 지난 생과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레티시아 아기씨께서는 후계의 자격이 없으십니다.”

‘달라지지 않은 게 아니라, 똑같네.’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신성력도 마력도 전혀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진정 에시어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주 많이 떨어지십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이렇게까지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귀족 영애는 제 생에 처음입니다. 가주님.”

아야.

‘상처 주네.’

고개를 들어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을 동그랗게 말아 단단하게 올려 묶은 채 꼿꼿하게 자세를 바로 한 실비아의 시선은 단 한 번도 나를 향하지 않았다.

“수학, 역사, 제국어, 고대어, 미술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손가락을 꼽아 가며 부족함을 지적하던 실비아 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법 또한 한참 떨어지십니다.”

“…….”

“한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노력을 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숙제를 내 드리면 단 하나도 제대로 다 해 오신 경우가 없습니다.”

‘하. 이건 좀 억울한데?’

숙제를 제대로 해 올 수 없었던 건 실비아가 나이에 전혀 맞지 않는 숙제를 내준 탓이었으니까.

6살 난 레티시아가 고차원 수학을 어떻게 풀고, 고대어를 어떻게 쓰겠는가.

하지만 실비아는 그러한 사실은 쏙 빼놓은 채로 레티시아의 게으름에 대해서만 험담을 늘어놓았다.

이전 생과 또-옥같이.

‘그런 이유로 레티시아 아가씨에게는 후계의 자격이 없습니다. 가주님.’

‘아니야! 내가 하기 어려운 거라고 했잖아! 실비아도 그렇게 말했었잖아!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분명, 선행일 뿐이라고 했잖아!’

‘세상에, 이제는 거짓말까지.’

다정한 말로 괜찮다고 다독여 놓고는 할아버지 앞에서는 제게 후계 자격이 없다고, 심지어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실비아를 향해 나는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부짖었었다.

하지만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되레 거짓말을 하는 나쁜 아이를 보듯, 일제히 비난의 눈초리를 빛냈다. 아무도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앞뒤 가리지 않고 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뿐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말을 믿어 주길 바라면서.

‘난 게으르지 않았어! 수업도 최선을 다해 들었단 말이야!’

‘그럼 이 자리에서 자격 심사를 치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낸 실비아가 말을 낚아챘다.

그래, 이건 낚아챘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그 낚아챈 말로 나를 궁지로 몰아갔으니까.

공정함을 뒤집어쓴 표정으로 레티시아 아가씨가 억울해하시니, 지금 이 자리에서 자격 심사를 받게 하는 편이 좋겠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고는 그녀가 대답할 수 없는 것들만 물어봤지.’

물론 질문 자체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마고의 앞이었으니 실비아는 당연히 레티시아 나이대 아이들이 풀 법한 내용들로 심사를 시작했으니까.

다만, 내가 배운 적이 없는 내용이라는 게 문제였다.

심지어는 시험의 내용이 공정하다는 걸 보이기 위해 그녀 또래의 방계 쪽 사촌 몇몇도 함께 심사를 받게 했다.

그리고 결론은 뻔했다.

방계 쪽 사촌들까지도 모두 대답할 수 있었던 것들을 레티시아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단 하나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울음이 턱 끝까지 차오른 레티시아가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 할아버지, 마고 에시어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레티시아는 오네에 갈 필요 없다.’

레티시아는 내쳐졌다.

저를 향한 실망과 못마땅한 시선을 회복할 기회조차 없이 공식적으로 후계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후하.”

생각하니까 열 받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저를 내쫓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를 곰곰이 생각해 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걸 생각해 무엇하겠는가.

그때와는 달리, 이번 생은 다르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마음을 다시금 단단히 다잡은 그녀가 숨을 길게 몰아쉬자, 실비아가 흘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 시선이 마치 평소 같았으면 자격지심에 푹 절여진 것처럼, 억울하다고 방방 뛰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너 왜 이렇게 잠잠하니?’ 하고 묻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생을 이미 다 겪고 온 데다가 한국인이었던 기억마저 온전했다.

‘쉽게 넘어가 줄 수 없지.’

그저 자신을 향한 실비아의 말들에 상처 입었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 그대로 그렁그렁 물기를 살짝 머금은 채 고개를 숙였다.

푹 숙이는 움직임에 양 갈래로 묶은 밀밭색 머리칼이 어깨 끝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양손으로 옷자락을 꽉 쥔 손가락 마디가 희게 불거진 아이의 손과 잔뜩 움츠린 아이의 모습은 한눈에 보아도 가련해 보였다.

“안쓰럽긴 하네요.”

그래, 고작 6살 난 아이가 아닌가!

제 편들어 줄 사람 하나 없는 이 곳에서 홀로 날 선 말들을 견디고 있는 작은 아이의 모습에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그마한 연민이 피어올랐다.

방금 전까지 염치를 모르는 아이라고 비난하던 눈초리는 모두 사라진 듯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 미미하게 퍼져 나가는 감정의 변화를 읽지 못한 듯, 실비아가 헛기침을 얼른 상황을 마무리하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레티시아 아가씨에 한해서는 후계 자격 심사를 논할 게 아닙니다.”

“허면?”

마고가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 당황한 실비아가 그를 올려다보자,

“레티시아에 한해서는 무엇을 논해야 하지?”

낮고 묵직한 목소리의 마고 에시어가 실비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이…….”

마치 심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저를 응시하는 마고의 푸른 눈동자에 잠시, 얼굴을 굳힌 실비아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오른쪽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괴고 있던 마고가 왼쪽으로 바꿔 기대며 고개를 들었다.

“내 물음이 어려운 것이 아닐 텐데. 선생.”

“예, 예. 가주님. 예 아닙니다.”

마고의 재촉에 흠흠,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실비아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고개를 들었다.

“당장에 레티시아 아가씨께서 직계들의 수업에 참여할 능력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가씨의 실력은 다른 3세분들을 방해하는 지경인지…….”

“어떻게?”

말을 끊는 마고의 물음에 어깨를 편 실비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턱을 올려 들었다.

“이 자리에서 시험을 보는 것이 어떨지요.”

실비아의 말에 자리에 있던 다른 선생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긍정에 마고의 시선이 내내 한구석에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작은 머리통을 향했다.

그리고-

‘하나, 둘, 세-.’

“시험을 준비하도록 해라. 레티시아.”

속으로 셋을 세기도 전에 마고의 명령이 이어졌다.

“네, 할부지.”

그리고 바로-

“대신 조건이 있어요!”

당돌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내 조건은 사촌들과 시험을 함께 보겠다는 거였다.

그 말에 실비아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직계분들은 아가씨와 진도가 다르신데요. 차라리 방계분들을 부르심이 어떨지요?”

네 멍청함이 더 부각될 텐데, 괜찮겠느냐? 고 묻는 듯한 얼굴에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레티시아 아가씨께서 괜찮다면야……, 그렇게 하시죠, 가주님.”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는 실비아의 의기양양한 옆얼굴에 나 역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똑똑한 오빠들이랑 같이 보면 저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즘 같이 공부할 수 있을 기회가 없어서 슬펐거든요.”

“…….”

해맑은 말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사람을 꿰뚫어 볼 것만 같은 그 푸른색 눈동자. 단 한 번도 다정한 적 없던 그 시선에 마른침을 삼켰다.

‘쫄지 마.’

긴장할 거 없었다.

할아버지는 능력 우선 주의자였고, 과거의 난 그 능력이 없었기에 할아버지에게 외면당했던 것뿐이다.

아빠, 샤리에처럼 할아버지의 시선을 확 잡아끌 수 있는 그 능력.

그거 하나만 보여 주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오네로 가면 되는 거야.’

전생에서 있었던 악연을 정리하고,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해서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방싯 웃었다.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라는 듯 순진무구하게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자-

“베넷.”

“예, 가주님.”

제게 향했던 시선 그대로 부관 베넷을 바라본 할아버지가 내 사촌들을 불러들였다.

“레티시아와 함께 공부했던 3세들들 모두 불러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