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 또란, 아니아니 또한 지나가리라.”
또박또박 발음에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눈앞의 글자들을 읽고 해석한 내 말에 그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 나이 또래에 고대어를 문장으로 읽을 수 있는 이는 매우 드문 탓이었다.
‘아빠 샤리에를 제외하고.’
“설마 샤리에 님처럼 6살에 이능 발현이 되신 걸까요?”
“그럼 대를 이어 이능력자이신 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에시어의 큰 경사 아닌가요?”
“근데 만약에 그런 거라면…….”
가신들의 설왕설래에 선생들의 시선이 실비아를 향했다.
만약 가신들의 말대로 내가 이능력자라면 저들은 선생의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능 발현도 알아채지 못한 건 둘째 치고, 이능력자인 나를 두고 후계의 자격이 없다 떠들어 댄 것이 아닌가!
다들 낭패다 싶은 듯,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런 선생들의 시선에도 실비아는 지금 이 상황이 납득이 되질 않는 듯 보였다.
“어떻게.”
당연하지.
내게 고대어는커녕 제국어도 가르친 적이 없는데, 고대어를 읽고 있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혼란스러울 법도 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실비아가 고개를 들자-
“시험은 그 뜻까지 해석해야 끝이 나는 걸 텐데.”
그 혼란 속에도 시험을 마무리하라는 듯 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얼굴이 이 상황이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이었으나, 내내 가라앉아 있던 푸른색 눈동자가 약간의 이채를 띠고 있는 걸 보니 일단 흥미를 끄는 데는 성공한 듯했다.
‘그럼 이제 쐐기를 박아 볼까.’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다 지나가는 것이니 연연해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일에는 겸손하고, 나쁜 일은 크게 생각하지 말쟈! 객기 부리다 큰 코 다친다!”
“커헙.”
객기라는 말을 굳이 붙여 하곤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실비아가 고개를 떨었다.
“설마 시험 문제를 미리 보신 겁니까?”
실비아의 물음에 흘끗 챈들러를 올려다보니 그가 표정을 어색하게 굳혔다.
역시나.
챈들러가 너무 수려하게 대답하는 꼴이 이상하다 했더니.
여기까지 불려오는 동안에 문제를 이미 알려 줬던 모양이었다.
이러니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한심한 실비아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하지만 아니라는 내 말에도 실비아는 믿지 않았다.
“거짓말은 나쁜 겁니다, 아가씨. 가주님 앞이니 창피 당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까지는 이해 하겠으나, 부정 행위는…….”
“그럼 다른 문제도 풀어 보께요!”
“……네?”
“선생님은 모르겠지만, 레샤 혼자서 공부 지인짜 열심히 했어요!”
당당한 내 말에 마고의 시선이 실비아를 향했다.
하지만 자신이 짜 놓은 판이 어그러졌다는 사실과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 듯 실비아가 마도구 위에 다급히 글자를 띄웠다.
“이건.”
“살미(삶이) 있는 한 희망이 이따.”
“그럼 이건.”
“운명을 만드는 살암(사람)흔 바로 나다.”
그것 말고도 몇 개의 고대어로 된 문장을 더 읽고서야-
“그만.”
마고의 손이 올라갔다.
“그만하면 충분히 증명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보는데, 선생.”
“하, 하지만.”
“아무래도 선생이 오랜 시간 레티시아의 학습을 살피지 않은 듯하군. 그게 아니고는 어찌 이 정도 수준의 아이에게 무능에 멍청에 모든 것에 떨어져 자격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지?”
“……그, 그것이.”
이마의 땀을 손수건으로 찍어 낸 실비아가 고개를 들었다가 도로 숙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실비아가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뭐라 변명을 하고는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녀의 부정을 밝혀내야만 하는데.
“가주님!”
하지만 이미 마고의 시선 밖에 난 뒤였다.
“베넷.”
“예, 가주님.”
“선생들 내보내고, 둘째를 불러들여라.”
수도 저택의 살림을 담당하고 있는 둘째 숙모 벨리아 에시어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가, 가주님!”
벨리아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실비아의 절박한 부름이 이어졌다.
하지만 마고의 시선은 더 이상 실비아를 향하지 않았다.
마치 이 방에 없는 사람을 대하는 마고의 뜻을 알아차린 다른 선생들이 슬금슬금 실비아와 거리를 벌리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괘씸한 작태에 실비아의 날 선 시선이 선생들을 향했다.
하지만 저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할아버지가 벨리아 숙모를 불러들이는 건, 단순히 실비아 하나를 내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선생들 다 갈려 나갈걸?’
할아버지가 무심한 듯 보여도 뒤쪽 선생들이 이죽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으셨을 거다.
에시어의 가주란 그런 자리였다.
보지 않고도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한데 왜 안드레아 숙부를 후계로 삼으셨던 걸까.’
숙부의 능력은 할아버지가 더 잘 알고 계셨을 텐데.
‘왜?’
“……능 발현이 된 것이냐.”
순간, 상념을 깨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녜?”
“이능 발현이 된 것이 아닌가, 물으셨습니다.”
“움. 그건 모르겠어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나 소수의 귀족들이 품고 태어나는 이능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이미 어른의 지식 수준과 한국인으로 쌓아 올린 능력이 있었다.
그걸 이능으로 친다면, 이능일 수도 있겠지.
“근데 글자를 읽을 수 있어요.”
“…….”
“이게 이능이에요?”
그들이 바라는 이능은 아니겠으나, 어찌 되었든 지금 내 나이대에서는 특출 난 거였으니까.
“어디까지 읽을 수 있지?”
“음.”
검지를 턱 끝에 대고 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뭘 읽을 수 있다고 해야, 적당할까? 를 떠올리다 문득 번쩍 하고 떠오른 글자와 동시에 할아버지 뒤쪽으로 천장까지 솟아오른 책장이 보였다.
그 빼곡한 책들을 쭉 둘러보다 도도도 뛰어 들어갔다.
“아가씨!”
나를 말리려는 베넷의 손을 삭 피해 간 내 뒷모습에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다.
“놔두어라.”
할아버지의 말에 시익 웃으며 꽂힌 책등에 손을 뻗었다.
그리곤 먼지가 잔뜩 쌓인 두꺼운 책을 꺼내 들었다.
나를 증명함과 동시에 내가 애타게 찾고 있던 책이었다.
“에시어의 역사?”
“녜. 1권!”
그리고 그 책을 작은 손으로 간신히 움켜쥔 나를 책과 번갈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시어의 태초의 일을 기록한 두껍고 재미없는 책이 에시어의 역사였다.
고대어와 제국어가 뒤섞여 가주들도 전권을 다 읽기 어려웠고, 특히나 1권은 더욱이 고대어 비율이 높아 해석되지 않은 글자들도 많았다.
“읽을 수 있겠느냐.”
“응.”
내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빠르게 책장을 넘겨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를 모른 척 펼쳐 들었다.
“레투무 노니 옴냐 핀티트.”
“무슨 뜻이지?”
“죽음이 끝이 아니다.”
“…….”
“초대 가주님은 죽는 게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했어요. 이타 위르타.”
“그것이 인생.”
“녜.”
내 말을 받아 대꾸해 주는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처음으로 온화하게 웃어 준 할아버지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투박하지만 다정한 손길에 순간 당황한 내 몸이 나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할아버지의 손길을 내 몸이 거부하는 듯했다.
처음 겪는 일이니.
‘적응해야 해, 레샤.’
마음을 크게 먹듯 숨을 크게 내쉬자 금세 손을 거둔 할아버지가 몸을 돌려 베넷을 바라보았다.
“베넷.”
하지만 그 순간-
“가주님, 필립입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기척을 알린 필립이 안으로 들어섰다.
한결같이 흰색과 검은색이 적절하게 섞인 머리칼을 정갈하게 빗어 넘긴 집사장이 할아버지의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과 이마에 배어 나온 땀이 그가 지금 매우 당황했음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전생의 기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만약 그 일이라면.
“무슨 일이냐.”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에 양손을 모아 가슴을 꾹 눌렀다.
‘만약에 그 일이 맞다면.’
할아버지를 말려야 했다.
숨을 몰아쉬는 척 할아버지의 지척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었다.
베넷의 시선이 아주 잠시, 내 얼굴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으나,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저 놀라 다가온 것이라 그 정도로 여기는 듯한 시선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무슨 일이냐.”
“황궁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역시.
“무슨 일로?”
“그것이.”
주저하듯, 숨을 몰아쉬던 집사장이 양손을 모아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가주님께서 가택 연금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지에 대해서 감시를 하겠다고 합니다.”
“…….”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등 뒤에서 쿠구궁- 벼락이 내리쳤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