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6)화 (6/141)

6화

황제 놈의 미친 짓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설마 했는데.’

진짜 감시단을 보냈을 줄이야.

전생에서는 본성에서 일어나는 주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후계 자격을 받지 못한 이후 난 투명 인간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밥버러지, 쓸모없는 존재.

한국에서도 여기, 테파로아 제국에서도.

이시아와 레티시아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이시아는 어린 시절 내내 고아원 원장에게 밥버러지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고, 레티시아는 평생 쓸모없다는 말을 들어 왔으니까.

그걸 극복하기 위해 이시아는 공부에 매달렸고, 레티시아는 작은집에 매달렸을 뿐이었다.

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이시아로서나 레티시아로서나 이번 생이 너무 소중했다.

‘두 번, 반복하지 않을 거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걸 위해서는 일단 이번 상황을 잘 넘겨야 했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자니.

‘흠.’

심상찮은 기운이 방 안 가득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는 지금 황제를 많이 봐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황제의 억지소리에 반발하지 않고, 그 뜻을 충실히 따라 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꼴을 보아서는.

‘할아버지 곧 터지겠는데?’

어떻게 말려야 하나 머리가 살짝 아파 왔다.

전생에서는 오늘 이 사건 이후 황제와 반목하게 된 할아버지의 가택 연금령은 괘씸죄를 적용받아 더 길어졌고, 그 길어진 가택 연금 탓에 할아버지께서 병을 얻어 돌아가시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반드시 할아버지를 말려야 했다.

하지만-

“뭐?”

“이게 무슨 미친 소리랍니까. 가주님!”

“감시라니요! 당장에 내쫓아야 합니다!”

할아버지보다 더 흥분한 가신들이 저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가주님.”

“제 생각도 리비에 백작과 같습니다.”

‘저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말리지는 못할망정, 되레 부추기고 있잖아!

원래가 옆에서 부추기면 슬픔은 더 슬퍼지고, 분노는 더 커지는 법이었다.

얼른 누구 하나가 저 분노를 가라앉혀야 한다는 생각에 베넷을 올려다보았다만-

“조용히.”

오히려 상황을 정리한 건 할아버지였다.

날이 바짝 서서 소리를 높이는 가신들의 목소리를 누르는 할아버지의 나직한 한마디에 집무실에 있던 이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어깨를 움츠렸고, 심약한 제이슨은 딸꾹질을 시작했다.

나 역시 할아버지 뒤에서 내 몸통만 한 책을 바짝 끌어안았다.

물론 이건 할아버지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 책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혹시나 내놓고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해.

해서 꼭 끌어안자, 팔걸이 앞쪽의 짐승의 발 모양 같은 부분을 문질문질 하시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들라 해라.”

“가주님!”

“황제께서 내리는 명이니 신하로서 응당 따라야지.”

“하지만 여기는 에시어 공작가입니다.”

“초대 황제조차, 에시어가 밟고 선 땅은 침범하지 않겠다. 선언하시질 않았습니까!”

“그래 봐야 황제의 신하일 뿐이다.”

“그만.”

가신들의 불만을 가볍게 쳐낸 마고가 등받이에 느른히 몸을 기대어 팔걸이 끝을 문질렀다.

오른손이 닿은 곳만 맨질맨질하여 색이 바래져 있었다.

‘아빠의 검자루 끝이랑 비슷하네.’

어쩐지 아빠와 닮아 있는 할아버지의 습관에 고개를 들자-

“아버님!”

소식을 들은 건지 노크도 없이 열린 문 사이로 둘째 숙부, 안드레아와 그 부인인 벨리아가 들어섰다.

갈색의 특징 없는 머리칼에 꼬아져 올라간 콧수염을 잘 다듬어 놓은 안드레아와 붉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리곤 수수한 남색 드레스를 입은 벨리아의 모습에 챈들러가 애깃소리를 내며 벨리아의 치마폭에 숨어 들었다.

“엄므아.”

그리고 뒤늦게 제 편 들어줄 사람의 등장에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챈들러의 등을 토닥이는 벨리아를 뒤로한 채 안드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에시어 저택을 감시하겠다니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이 모든 것이 아버지와 저, 그리고 저희 가문 전체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닙니까!”

“…….”

“제가 당장에 황궁으로 들어가 당장에 담판을…….”

“됐다.”

“아버지!”

안드레아가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물린 마고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담판을 지을 것이냐.”

“아버지!”

아직 아무것도 아닌 네놈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게냐, 라고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말에 안드레아 숙부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솔직히 할아버지의 가택 연금령에 끝까지 침묵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동조했던 사람이 안드레아였다.

‘할아버지가 영지에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시면 제게 권한이 넘어올 줄 알았겠지.’

하지만 가신들은 굳이 수도의 안드레아 숙부가 아닌 비싼 포트 사용료를 내며 영지를 오고 가며 서류를 올렸다.

한마디로 대행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실권이 전혀 없는 종이라는 소리였다.

그랬으니, 안드레아 숙부 입장에서도 애가 타겠지.

‘무능이 죄는 아니다만.’

그 어떤 상황에서건 안드레아 숙부에게 실권이 넘어가는 걸 막아야 했다.

하지만 이 상태가 지속되면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전 생에서도 할아버지가 가택 연금 상태로 제법 오래 실권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안드레아 숙부가 일을 저질렀으니까.

반복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최대한 빨리 할아버지의 연금부터 풀어야 했다.

“일단 가주님의 가택 연금을 해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안드레아 님.”

“그러니 내가 폐하와 담판을…….”

톡톡

“할아버지.”

“아, 아가씨.”

너무 오랜만에 본지라 내가 실수한 것이라 생각한 가신 베넷이 다급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하지만 그런 베넷을 막아 세운 마고가 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귀 좀 빌려주세여.”

“귀?”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듯 경악에 찬 얼굴들이었다.

마치 곧 죽을 날 받은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한 표정들에 재채기처럼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꾹 눌러 참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조금 반신반의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할아버지는 아주 쉽게 귀를 내 주었다.

그 모습에 가신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막았고, 안드레아와 벨리아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와중에 베넷의 표정은 딱히 읽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과 별개로 일단 내 볼일이 급하지 않겠는가.

밑져야 본전이야.

“할부지 너무 보고 시퍼써여.”

그러곤 잽싸게 할아버지 귀에 작은 손을 펼쳐 대곤 속삭였다.

“가택 연굼. 그거어 할부지가 은퇴하면 돼요, 곧 펠루아니아에서 전쟁을 일으킬 거예여.”

그러곤 목을 끌어안았다.

할아버지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게 보드라운 손끝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굳어진 상태 그대로 어정쩡하게 몸을 굽히고 있으셨고, 나도 어색하게 매달려 있었으니까.

누군가는 이 모습을 두고 내가 가식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보고 싶다는 건 가식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전생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야 가문 내에서 아빠 대신 나를 지켜 주고 있던 존재가 할아버지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일을 하다 문득 할아버지와 손녀, 손자들의 다정한 모습을 볼 때면 할아버지가 떠올랐고, 그리웠다.

그때 할아버지께 이런 말이라도 해 볼걸.

돌아가셨을 때 손이라도 한 번 더 잡아 볼걸.

미친 척하고 가서 안겨 볼걸, 하고 말이다.

그리고 애당초 할아버지께서 나를 예뻐하지 못했던 것도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은 탓이 컸다.

할아버지를 무서운 사람이라고 선을 그어 놓고는 넘어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랬으니 나에 대해 관심이 있을 수가 없었겠지.

‘이야기 한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이번 생에는 할아버지의 눈에 드는 것도 드는 거지만, 전생에 후회되었던 것들을 다 하고 싶었다.

지금처럼.

할아버지의 등을 작은 손으로 꼭 끌어안아 당기는 내 모습을 두고 뒤쪽으로 물러서 있던 가신, 리비에 백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세상에 기특하셔라.”

“그러게요.”

“언제 이렇게 크셨을까요.”

“다른 직계들보다 철이 일찍 드셨어요.”

꼬장꼬장하리만큼 웃음이 박한 그녀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던 다른 가신들의 표정 역시 호의적으로 변해 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레샤, 그렇게 매달려 있으면 할아버지께서 힘드시지 않겠니? 어서 이리 오렴.”

그 꼴을 두고 볼 리 없는 벨리아가 온화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 당장 이리 오거라!”

웃고는 있는 벨리아와 달리 인상을 팍 찡그린 안드레아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 순간 훈훈했던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런 주변 분위기를 기민하게 알아채고는 나를 향해 더 다정히 웃는 벨리아와 달리 안드레아는 여전히 분위기 파악이 어려운 듯 보였다.

“어딜 어른들 이야기하시는데 나서, 나서길.”

안드레아의 엄한 목소리에 슬쩍 할아버지의 목에 감아 놓은 작은 손을 풀어 내렸다.

“……녜.”

그러곤 살짝 민망하다는 듯 할아버지 앞에서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풀며 배시시 웃었다.

“할아버지 안녕.”

작게 다섯 손가락을 쫙 펴서 흔들었다.

그 동그란 움직임에 할아버지의 고개가 작게 흔들리는 것도 같았으나, 확실하진 않았다.

해서 웃으며, 몸을 돌려 바닥에 내려놓았던 에시어의 역사를 끌어안았다.

끙차, 소리를 내며 굽혔던 몸을 일으키자 할아버지가 책을 빼앗으려 드는 안드레아의 말을 제지했다.

“그건 내려놓…….”

“보고 싶으면 가져다 보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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