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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8)화 (8/141)

8화

그 시각 실비아를 불러 올려 앞뒤 상황을 전해 들은 벨리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가르친 적이 없는 것을 읽었다는 겁니까?”

“예, 부인. 그 누구도요.”

실비아가 힘주어 답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더 큰 문제였다.

이능력자.

귀족들 중에서도 소수에게만 나타날 뿐만 아니라, 마법사들이 가진 마력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 이능력자들이었다.

평민이라고 해도 이능이 발현된 것만으로도 단번에 그 지위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샤리에처럼.’

사생아였던 샤리에가 가문의 장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저 이능 때문이었으니까.

심지어 6살의 나이에 두 개의 검기가 발현되어 열다섯에 소드마스터의 지위에 오르지 않았던가.

‘그나마 가문에 욕심을 내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만약 가문에 욕심을 냈다면 제 남편 안드레아는 후계의 자격은커녕 이미 한직으로 내쳐졌을지도 몰랐다.

한데 레티시아가 이능력자라면.

제 아들들과는 그 지위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문을 내어 줘야 할지도 모를 일이지.’

고작 사생아의 딸에게.

샤리에에 이어, 그 딸까지 이능을 타고 태어났다면 저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거기다.

‘할부지 너무 보고 시퍼써여.’

고작 6살의 나이에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 버둥거리는 제 조카딸의 모습은 절대 밀려날 생각이 없어 보이질 않은가.

‘여우 같은 것.’

어떻게든 밟아 놓아야 했다.

애당초 싹을 잘라 가문을 넘볼 꿈조차 꿀 수 없게끔.

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벨리아가 저를 향한 실비아의 시선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알겠네.”

“허면 저는.”

“일단 아버님의 뜻이 그러니 가서 쉬고 있게.”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네가 시킨 것이 아니냐! 하고 빽 내지르려던 말을 먹어 삼킨 실비아가 혀를 깨물었다.

지금 여기서 벨리아와 척을 지는 것이 전혀 유리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저는 고작 벨리아의 친정 가문 아래에 기생하고 있는 남작 가문이 아닌가.

남은 제 아들들을 위해서라도 참아 내야 했다.

해서 억지로 입술을 당겨 웃었다.

“허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부인.”

그리고 그런 실비아의 눈치 빠름이 매우 만족스러운 듯 벨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실비아.”

“…….”

“이건 내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 줘요.”

“아유, 부인. 저희 사이에 뭐 이런 걸.”

하지만 말과는 달리 손을 잽싸게 뻗어 품에 넣은 실비아가 애살스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 벨리아가 엷게 웃으며,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우리 사이니까요.”

실비아가 나가고.

“엘린.”

“예, 부인.”

벨리아가 제 측근 하녀를 향해 손짓했다.

그 손짓에 가깝게 다가선 엘린이 고개를 숙였다.

“별채에 누가 있지?”

“린지와 아리나. 그리고 헤일이라는 아이가 최근 새로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귀에 익은 이름에 벨리아가 고개를 들자, 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본채에서 넘어간 아이들입니다.”

한마디로 둘 다 벨리아의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부리기 좋게 배치해 놓은 엘린의 안배에 웃으며, 팔짱을 꼈다.

“잘 지켜보라 하고, 극진히 모시라고 전해 주렴.”

“…….”

“아버님께서 계시는 동안에는 결코 다른 생각 할 수 없게끔. 그리고 한시도 눈을 떼지 말라 해. 특히 샤리에에게 연락이 오지는 않는지도.”

“예,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습니다.”

벨리아의 말에 엘린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제 아무리 이능이 있다 해도 기댈 곳 없는 6살 난 아이가 아닌가.

‘잘해 주면서 길들이면 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제 손을 놓을 수 없게끔 말이다.

가주의 침실에서 빠져나온 베넷이 이마를 문질렀다.

“아프다 해라, 중병이 들었다고 해.”

“그리고 본성 곳곳에 감시단이든 기사단이든 알아서 하라고 해.”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일단은 그 뜻을 따르는 것이 부관의 일이었다.

“후, 페일런.”

하지만 제 아래 비서관을 부르려 몸을 돌린 순간, 앞을 향한 시선 끝에 페일런이 아닌 작은 머리통이 보였다.

밀밭색 머리칼을 어깨 아래에서 살랑살랑 흔드는 작은 아이의 모습.

“레티시아 아가씨.”

“베넷.”

해맑게 그를 부르는 레티시아의 얼굴에 베넷이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 안 가셨습니까?”

“웅! 베넷 기다렸어.”

배시시 웃는 레티시아의 얼굴에서 언뜻 샤리에의 모습이 보였다.

미미하게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눈을 반달로 접어 흘리던 그의 미소가 환한 레티시아의 표정이 겹쳐져 보인 베넷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궁금한 것이 있으십니까?”

“응!”

“하문하시죠.”

“할아버지는?”

“……괜찮으십니다.”

“음.”

한 박자 늦게 나온 괜찮다는 말에 레티시아의 깨끗하고 고운 이마에 세 줄의 주름이 그어졌다.

6살 난 아이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찌푸림이 어쩐지 사랑스러워 보였다.

손을 뻗어 윤이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 간질거리는 충동을 애써 눌러 참은 베넷이 레티시아와 눈을 맞췄다.

“가주님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움.”

하지만 그런 베넷의 말에도 턱 끝에 검지를 댄 채 뭔가를 갸웃갸웃하던 레티시아가 저를 올려다보았다.

할 말이 잔뜩 있는 얼굴을 숨기질 못하는 표정에 레티시아와 시야를 맞추듯 몸을 낮춘 베넷이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응, 경. 귀를 좀 빌려주겠어?”

레티시아의 귀엽고 정중한 말투에 엷게 웃은 베넷이 얼굴을 돌려 그녀의 입가에 댔다.

그 모습에 레티시아가 방싯 웃으며 양손으로 제 입과 베넷의 귀 사이를 막고는 작게 속삭였다.

“곧 은행법을 바꿀 거래써.”

“…네?”

“은, 행, 법.”

놀라 되묻는 베넷의 말에 다시금 또박또박 발음한 레티시아가 푸른색 눈동자를 반짝 물들였다.

색소가 옅어 하늘색 빛이었다 이내 짙어지는 이채에 베넷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 꼴깍 목울대를 넘어가는 모습에 레티시아가 그를 빤히 보았다.

“알아들었지?”

재촉하는 눈동자에 베넷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걸 어찌.”

“아이들은 키가 작아서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걸 많이 보고 들을 수 있어.”

하지만 이건 작아서 얻어 들을 이야기가 아니질 않은가, 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으나.

‘조사단이 실수를 한 걸까.’

황실 조사단이 저택 내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저들끼리 떠들다 아이가 있는 걸 생각 못 하고 말을 흘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아봐야겠어.’

평소였다면 코웃음을 치거나 대충 흘려들었을 말이었으나, 이능을 확인하기 직전이었다.

‘올가를 선생으로 뽑아 올려라.’

올가는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이능력자였으니까.

조금 괴짜이긴 하나, 마력을 확인하고, 이능의 방향을 확인하는 직관이 매우 발달한 이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레티시아의 눈빛에 담긴 확신을 보고 있자니 마치 홀린 사람처럼 쉬이 넘길 수가 없었다.

마치 가주님을 마주하고 있는 착각을 느끼게 만드는 레티시아의 눈동자에 베넷이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알겠습니다.”

베넷의 답에 안도한 레티시아가 주변을 흘끗 살피곤 작은 손으로 그의 귀를 가리곤 속삭였다.

“그리구 켄달가에 사려고 봐 둔 땅은 금화 20개 정도 더 얹으면 살 수 있을 거야. 그거 꼭 사.”

‘그거 돈 많이 벌 수 있어.’

라는 말을 남긴 채 총총히 멀어지는 레티시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베넷이 곁에 다가선 페일런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부관님.”

“어, 어.”

“여기서 뭐 하십니까?”

“그러게.”

제가 여기서 무얼했더라.

뭔가에 홀렸다가 정신을 차린 듯 베넷에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새끼 너구리한테 홀린 느낌이었다.

수백 년 먹은 너구리가 사람으로 현신했다가 사라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대체 무엇을 보고 계시는 거지?’

아니 그보다는 만약 레티시아 아가씨께서 이능력자라면, 이건 가문의 경사였다.

샤리에 님에 이어 레티시아 아가씨까지.

‘하.’

수천 년은 더 영속될 가문의 영광을 떠올리며 고개를 부르르 떤 베넷이 페일런을 돌아보았다.

“감시단은?”

“정문을 개방해 이미 자리를 잡았습니다.”

페일런의 말에 창가 가깝게 다가선 베넷이 커튼을 살짝 젖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처럼 이미 제집 안방처럼 들어앉은 이들은 마치 점령군처럼 저택 곳곳을 휘젓고 있었다.

“어찌할까요?”

“내버려 두라는 명이시네.”

“역시 그런 겁니까.”

페일런이 앞으로 닥칠 미래에 뻣뻣해진 목 뒤를 주물렀다.

가문을 감시하러 온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며칠 밤을 새야 할 일이 눈에 훤했다.

“가문의 기사들에게 감시단을 감시하라 명하고, 행정관들을 들라 하게.”

“어디로.”

“아.”

본채는 이미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마고가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데 제가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한다.’

미간을 문지른 베넷이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문득 레티시아의 해맑은 뒷모습이 보였다.

종종걸음으로 하녀도 없이 제 몸통만 한 책을 끌어안은 채, 감시단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가는 그 모습에 엷게 웃은 베넷이 페일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쪽 별채로.”

“예?”

“후문을 이용해 조용히, 별채로 들라 하게.”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페일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베넷이 그를 지나치려다 말고 도로 돌아와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자네는 지금 이 길로 조용히 나가 메먼 경을 뵙고 오게.”

“메먼 경이라면.”

“황실에서 에시어를 배제하고, 은행법을 손보려는 시도가 있는지. 그걸 확인하고 오게.”

레티시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빠르게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 시도하기 전에 저지할 수 있을 테니까.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나, 분위기라도 알아 와야 할 게야.”

“알겠습니다.”

“서두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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