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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2)화 (12/141)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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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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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런이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만약 레티시아 아가씨의 언질 없이 은행법 개정에 더해 안드레아의 부당 이득에 대한 조사가 들어왔다면, 솔직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에시어에 대한 소문이 곱지 않은데.

베넷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득 2층을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가주님이 병석에 누운 것도 레티시아의 수일지 몰랐다.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걸로 무슨 수를 얻을 수 있는 걸까.

가늠할 수 없는 생각에 베넷이 미간을 좁히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것까지는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일단은 은행법 개정 문제와 더 가깝게는.

‘소문.’

마고 에시어가 병을 얻어 몸져누웠다는 소문이 더 시급했다.

그리고-

“저 부관님. 그 하녀들은 어찌할까요?”

코멧의 물음에 베넷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작은 몸에 나 있던 노르스름한 자국들은 모두 그 하녀들에 의해 생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착해.’

상황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 레티시아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베넷이 미간을 긁으며 몸을 돌렸다.

“아기씨께서 바라지 않으시니 두 사람 다 돌려보내고, 혹시 모르니 사람을 붙여 감시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 * *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나자, 사락사락 책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폴인가 부다.’

어쩐지 익숙한 기척에 슬쩍 눈을 뜨자-

“일어나셨습니까.”

내가 일어난 걸 귀신같이 알아차린 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응.”

눈을 뜰까 말까 아주 잠시 고민하긴 했으나, 일어났는데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일은 아니질 않은가.

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외눈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은 폴이 보던 책을 놓아두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색의 긴 머리를 뒤로 낮게 묶어 늘어트린 그의 희멀건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오랜만이네.’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간신히 참을 수 있었는데. 어쩐지 꼭 닮은 눈빛으로 제 상태를 살피는 폴을 보자, 반가움에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내가 마차 사고를 당했을 때에 나를 치료해 줬던 의사가 바로 폴이었다.

이미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그 날, 저택의 당직 의사였다는 이유로 가문에서 내쳐졌었던 폴이 어떤 이유에서 죽어 가던 나를 살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을 떠 보니 폴의 집이었고, 그는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죽을 뻔하셨습니다. 아십니까?’

‘대체 그 시각에 왜 저택 밖에 계셨던 겁니까.’

‘샤리에 님이 계시지 않다 하여 따라 죽을 작정이셨습니까?’

무심해 보였지만, 진심으로 나를 염려하던 몇 안 되는 어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온몸을 휘감는 고통에 몸부림을 칠 때면 땀에 온몸이 흠뻑 젖어 들 때까지 내 몸에 마력 같은 걸 흘려 넣어 줬던 것도 같다.

그러고 나면 고통에 들썩이던 몸이 진정이 되곤 했었다.

마력이 있느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기씨.”

“웅?”

과거를 떠올리다, 문득 들리는 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 앉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응.”

다정한 폴의 물음에 시큰거리는 코끝을 찡긋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고 아니니까.”

“예, 다치신 건 아니고 약해지셨지요.”

의사 특유의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듯 폴이 오른쪽 눈썹을 살짝 위로 올렸다.

그 모습에 잔소리를 차단하듯 폴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어린애들은 원래 약한 고야.”

그 미소에 한쪽 눈썹을 내린 폴이 기가 막힌 듯 얼굴을 굳혔다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걸 보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폴, 젊다.’

내 상상 속의 폴은 항상 중후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조금 더 파릇한 청년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피곤에 찌든 기색도 없고 어쩐지 피부에 광이 나는 것도 같고 말이지.

근데 왜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폴 아저씨였을 때가 더 좋았던 거 같지?

그때는 피곤에 찌들어서 피부도 거칠고 수염도 아무렇게나 길러 지저분했어도 더 행복해 보였는데.

지금은 행복해 보이지는 않네.

‘왜일까.’

지금이 더 편안할 텐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씨.”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내 시선을 잡아끄는 폴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웅?”

“어지럽지는 않으십니까?”

“아니.”

고개를 저었다.

“숨 쉬는 건요.”

“후하후하 괜찮아.”

입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폴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몸을 보호하는 약을 만들어 보내 드리겠습니다. 먹기 싫다고 투정하지 마시고, 올리는 음식들은 골고루 다 드셔야 합니다.”

하녀들이 내가 음식 투정을 해서 말랐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게 가장 쉬운 해명이긴 하지.’

6살이 아닌가.

그 나이대의 투정을 이유로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했을 거다.

“응, 잘 먹을게.”

웃는 내 모습에 엷게 마주 웃은 폴이 설렁줄을 당기자-

“아기씨이!”

부드러운 종소리에 즉각 반응하듯 문이 열렸다.

‘음? 이렇게 빠를 리가 없는데?’

아리나와 린지답지 않은 반응 속도에 고개를 돌리자, 아리나가 울음보를 터트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에, 우리 아기씨.”

차마 만지지도 못하겠다는 듯 손을 부들부들 떨며, 내 몸 위를 보듬듯이 훑어 내리는 아리나와 그 곁의 린지까지.

다들 내내 나를 엄청 걱정했다는 듯한 각각의 얼굴들을 빤히 보다, 이내 엷게 웃었다.

“아리나, 린지.”

그리고 뒤로 한참 떨어져서 들어오는-

“헤일.”

헤일까지.

“세상에!”

눈앞에 드러난 상처도 없는데 마치 상처를 찾아야만 하는 사람처럼 시선 둘 곳을 몰라 하던 아리나가 내 손목에 난 붉은 자국을 보며 부러 시선을 돌렸다.

“괜찮으신 거예요? 그러게 오실 때 저희를 부르시죠. 왜 고집을 부리셨어요.”

이렇게 된 것도 내 탓으로 돌리네?

이번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한 번쯤은 상기시켜야겠다 싶었다.

“웅? 레샤는 항상 혼자 왔잖아.”

“그, 그건…….”

어색하게 웃은 아리나가 내 손을 꼭 잡으며 흘끗 뒤를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그런 아리나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아리나가 항상 그랬잖아, 레샤는 뭐든 혼자 잘 해야 한다고. 그래야 잘 살 수 있다구.”

폴의 시선이 나와 아리나를 향했다.

그 시선에 순간, 당황한 아리나가 말끝을 뭉갰다.

“아이참, 우리 아기씨 다 크셨네.”

여기서 어설프게 거짓말을 했다가 내가 음? 언제? 해 버리면 조금 난감해지는 것을 아는 듯 아리나가 급히 말을 돌렸다.

‘눈치는 있네.’

오랜 시간 공작가에서 일하며 2급 하녀까지 올라간 게 허투루 먹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레샤 아기 아니지.”

“그, 그렇죠.”

생긋 웃으며 아리나를 올려다보자, 그런 아리나를 엉덩이로 밀어낸 린지가 내 손을 잡았다.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리나가 잡아 붉어진 손목이 남들에게 보이게끔 아주 교묘하게 손을 잡은 린지의 눈꼬리가 살짝 아래로 늘어졌다.

아리나는 반대로 올라갔고.

‘흠.’

둘 사이가 이렇다면 손 안 대고도 코를 풀 수도 있겠다 싶은데.

“밤새 어찌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요.”

“잠만 잘 자던데. 무슨.”

“내가 언제!”

오호라.

발끈하는 린지를 흘겨보던 아리나가 그녀를 싹 무시한 채 나를 향해 입꼬리를 당겼다.

“전 정말 한숨도 못 자겠더라구요.”

“하.”

아리나가 잠을 자지 못한 건지, 린지가 잠들어서 아리나가 자는 모습을 보지 못한 건지, 그건 확실치 않았으나.

어쨌든 린지가 잠이 들었던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뭐 별 상관 없는데.’

마치 그걸로 충성을 경쟁하듯 구는 두 사람의 한심함에 고개를 저었다.

“잠은 잘 자야지.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디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겠어요!”

“맞아요, 아기씨. 저희가 아기씨의 유일한 하녀인데요!”

허참.

누가 보면 나를 아주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측근인 줄 착각하겠네.

정작 내가 쓰러질 때에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은 저 뒤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

“헤일.”

검은 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선 헤일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예, 아기씨.”

“고마워.”

“아.”

당황에 어쩔 줄을 몰라 시선이 흔들리는 걸 보니,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

그리고 베넷의 말로는 헤일이 제일 먼저 내가 쓰러졌다며 의사를 불러 달라 했다고 했다.

‘오네로 갈 때에 데려갈 하녀 하나는 있어야 했는데.’

어쩌면 그 하나가 헤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확실한 건 숙모의 사람인 아리나와 린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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