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4)화 (14/141)

14화

그 으름장에도 배시시 웃은 레티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녜, 열심히 배우께여.”

“그래, 이만 나가 보거라.”

“근데 할부지 이거요.”

마고의 축객령에 레티시아가 함께 들어왔던 시종을 향해 손짓하자, 그가 급히 다가와 협탁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다 봤어여. 잘 봤심미다.”

[에시어의 역사]

초대에서부터 10대까지의 에시어 가문의 온갖 이야기가 담긴 두껍고 지루한 책이었다.

“저걸 벌써 다 읽었단 말이냐!”

끄덕.

근데 그걸 6살밖에 안 된 내가 읽었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마고가 미간을 좁혔다.

미심쩍고, 의심스러워 죽겠다, 는 시선이었다.

“빌려 갔잖아여.”

빌려 갔지만, 진짜 읽을 줄은 몰랐다는 듯한 눈초리에 그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왜여? 레샤가 읽으면 안 되는 거예요?”

“아니다. 다만 네가 읽기엔 너무 어렵지 않더냐.”

“어려웠어요. 절반도 이해 못한걸요?”

물론, 이건 거짓말이다.

레티시아는 1권부터 10권에 이르는 책을 모두 다 읽었을 뿐만 아니라 책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왜?

전생에 나를 괴롭히는 데에 도가 튼 나의 사촌 오빠 챈들러가 저 길고 두꺼운 걸 100번씩 베껴 쓰게 했었으니까.

그렇게 해야 진짜 에시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나도 했어!’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 집과 가문에서 살아남고 싶었던 어린 나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

‘저, 정말이지?’

‘당연하지. 직계인 내가 네게 거짓말을 하겠어? 이걸 다 읽고 써야만 에시어가 될 수 있는 거야.’

‘직계라면 다 하는 거야. 마치 오네에 가는 것처럼.’

‘그럼 레샤도 할 거야.’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 책을 읽다 못해, 달달 외우고, 기억해서, 그야말로 툭 치면 내용을 줄줄 읊을 정도가 되었음에도 나는 그들에게 에시어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외우고 있다는 것을 기특하게 여긴 할아버지의 칭찬을 받는 바람에 되레 그들의 미움을 샀지.

근데 이번에도 이 책으로 할아버지의 호감을 사게 될 줄이야.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니까.’

배시시 웃으며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이왕 산 호감, 할아버지의 마음을 확실히 얻어 내야지 않겠나.

해서 활짝 웃자, 안경 너머 나를 빤히 보던 할아버지가 미간을 미미하게 좁혔다.

“근데 너 왜 그렇게 웃는 게냐.”

“……네?”

대답과 동시에 입이 살짝 벌어졌다.

“웃을 게 뭐가 있어서 웃는 거냐, 물었다.”

바보처럼 보였던 모양인지,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 할아버지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정상적인 할아버지와 손녀딸의 관계라면 이럴 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거지?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소설 내용도 알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아는데.

할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흠.’

턱 끝에 손을 댄 채,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적당할까, 를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들었다.

대답을 하려고 보니, 물음이 조금 이상하질 않은가.

“그냥 할부지가 좋아서요.”

웃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

“할부지 좋아해서요.”

할아버지랑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웃는 건데.

물론 마음을 얻으려는 앙큼한 속셈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으니까.

할아버지께서 전생의 나를 지켜 주셨듯이 나도 그 애정을 돌려 드리고 싶기도 하고,

‘그 덕에 나도 좀 잘 살고.’

약은 속내를 최대한 숨기며 고개를 들자 내내 호랑이 같은 눈동자로 저를 빤히 보던 할아버지의 입가가 미미하게 실룩거리는 게 보였다.

“좋긴.”

좋아하시는구나.

나오는 말과 달리 좋은 감정을 숨기질 못하는 할아버지의 안면 근육에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심장의 막이 한꺼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도 나를 좋아하고 있구나.

“좋아여. 처음이잖아여, 할부지랑 단둘이.”

투박하게 건네는 말에 배시시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

그리고 그런 제 웃음에 잠시 얼굴을 굳힌 채 나를 빤히 응시하던 할아버지가 작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웃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 웃는 걸 본 적이 없네.

혹시 아무 때나 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할부지는 레샤랑 둘이 있는 거 안 좋아요?”

“……음?”

“죠으면 웃음이 나는 거래요. 그래서 레샤도 할아버지 보면 웃음이 나오나 봐요.”

눈을 깜박이다 이내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해맑게 웃자, 입술을 말아 문 집사장이 뒤로 돌아섰다.

웃음을 참으려는 거 같은데 그게 할아버지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주먹으로 손바닥을 연신 때려 대는 걸 보면.

‘내가 귀여운 거 같은데.’

아, 맞다!

순간, 며칠 전에 베넷과 그 부관들 앞에서 했던 게 떠올랐다.

내가 많이 귀여워 어쩔 줄을 몰라했던 그들의 시선을 떠올리며, 할아버지를 향해 눈을 찡긋하자, 할아버지의 푸른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크흠.”

눈동자뿐만 아니라, 왼쪽 눈가와 눈두덩이까지.

‘눈두덩이?’

눈동자가 흔들리는 건 그렇다 치는데, 눈가는 왜 떨리지? 그것도 왼쪽만?

이무래도 심상찮아 뵈는 이상 증세에 내내 웃던 낯을 굳힌 채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곤 오도도 할아버지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자, 할아버지가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뭐, 뭐……!”

낯선 행동에 놀란 할아버지가 끅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뺐으나, 내 손이 더 빨랐다.

작은 단풍잎 같은 손바닥을 척 하니 눈 밑에 붙여 대곤 고개를 들었다.

“할부지 눈 밑이 떨려. 왜 떨려?”

손바닥에 여실히 느껴지는 경련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할부지 왼쪽 눈 밑에가 막 흔들려.”

“워, 원래 그런 거다.”

“손바닥 아래에서 바르르하는데요?”

“괜찮…….”

“아닌데요!”

괜스레 딱딱하게 말한 할아버지가 내 손을 밀어 내려 손을 댔다.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의 손을 힘주어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그런 게 어딨어.

아니, 원래 그런 거라고 해도.

“할부지 아푼 거 아니에여?”

노인들은 이런 작은 증상들이 모여 나중에 뻥 하고 터지기 마련이었다.

거기다 난 할아버지가 아플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더더욱 작은 것 하나도 놓을 수가 없었다.

“괜찮…….”

“안 괜찮아.”

고개를 저었다.

미간을 좁힌 채 그를 올려다보는 내 푸른 눈동자에 마고가 저와 똑 닮은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뭐.”

하지만 그 호랑이 같은 얼굴에도 전혀 달라질 기색 없이 단호한 내 표정에 길게 한숨을 내쉰 마고가 고개를 돌렸다.

“필립.”

“예.”

“콜린을…….”

“폴!”

“응?”

“폴이 더 치, 친절하대요!”

내 말에 마고의 눈동자에 잠시 의구심이 어렸으나, 이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폴을 데려오너라.”

“부르셨흠……니까?”

집사장 필립의 부름에 자택으로 퇴근했다 도로 들어온 폴이 고개를 들었다가, 눈앞에 보이는 내 얼굴에 시선을 굳혔다.

생글생글 웃고만 있어야 하는 아이가 한껏 심각한 얼굴로 가주님의 곁에 앉아 있었으니.

또 병이 도진 건 아닌가 걱정이 된 거겠지.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누구에게 하는지 애매한 물음에 흘끗 나를 내려다본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

“할아버지 얼굴이 떨려.”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의 말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단호한 모습에 폴이 눈을 깜박이며 할아버지를 빤히 보았다.

다행히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아버지의 왼쪽 눈 아래와 눈두덩이가 작게 경련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셨습니까.”

“별거 아…….”

“폴 오기 전까지 5번이나 떨렸어. 내가 숫자 세어. 한 번 떨릴 때마다 200초, 아니 백 번 두 번 세니까 멈췄어.”

“너, 백까지 셀 줄 알더냐.”

“…….”

아 맞네.

잠시 능력치 조정을 깜박한 내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들킨 거, 속인다고 해 봐야 속여지겠는가.

“네.”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가는 내 머리통이 황당한 듯 웃던 할아버지가 이내 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별거 아니다. 피곤하면 종종 그러곤 했다.”

“이 전에도 그러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폴의 물음에 마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지.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하여.”

“잠시 진찰을 해야겠습니다.”

마고의 말에 폴이 가방에서 청진기와 비슷하게 생긴 마도구를 꺼내 귀에 꽂았다.

심장 소리를 듣는 건가?

어쩐지 할아버지보다 제 심장이 더 쿵쿵 울려 뛰는 것만 같았다.

폴이 알겠지?

한국인 지식 수준으로는 마그네슘 부족하면 눈 떨린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스트레스 많이 받고 피곤해도 떨린다고 그랬고. 근데 마그네슘이 뭔지도 모르고 스트레스의 개념도 없는 이곳에서 저 이야기를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해서 폴을 애절하게 바라보자, 한참 만에 마도구를 걷은 폴이 얼굴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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