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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5)화 (15/141)

15화

“혹시 팔다리에 힘이 빠지거나, 그 비슷한 느낌이 있었던 적은 없으셨습니까. 아니면 시야가 조금 흐릿하게 보인다던지요.”

“없었다.”

“그-.”

할아버지가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젓자, 벽에 붙어 서 있던 집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며칠 전에 넘어지신 적이 있으셨네.”

집사장의 말에 폴이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넘어지셨다가 다시 일어나기 어렵지는 않으셨습니까.”

“……조금, 한두 번 정도 더 엉덩방아를 찧었던 것도 같은데.”

“발음이 조금 어눌해진 적은요.”

“한 번.”

설마.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그 병명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바람을 저버리듯 폴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혈관이 좁아져 심장과 머리 쪽에 문제가 생기신 듯합니다.”

“뭐?”

느닷없는 폴의 말에 마고가 소리를 높였고, 집사장은 놀라 다급히 침대 가까이에 붙어 섰다.

“익투스 전조 증상입니다.”

“…….”

“레티시아 아가씨께서 아주 적기에 발견하셨습니다. 조금만 늦으셨다면 위험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뇌졸중 혹은 중풍.

‘그래서.’

그 병이라면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상황에서 안드레아가 할아버지의 권력을 가져와 독점할 수 있었던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미리 병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탓에 할아버지께서는 끝내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할아버지를 가택 연금이라는 핑계 삼아 장원에 숨겨 놓았다면.

‘그래 그런 거라면.’

안드레아가 저 나이가 될 때까지 후계를 세우지 않으셨던 할아버지가 너무 쉽게 무너졌던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 누워만 계셨을 테고, 말도 못 하셨을지도 모르지.

‘근데 자기 아버지인데.’

왜 그렇게까지 잔인했던 거지?

어차피 후계의 자리는 할아버지가 세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안드레아의 몫이었다.

아빠는 후계가 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윈드런은 후계의 깜냥이 아니었다.

한데 왜 이렇게까지 한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전생에서의 안드레아를 떠올리며 멍하니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는 그래도 안드레아 숙부를 믿었을 텐데.

전생에서 저를 빤히 보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자, 어쩐지 가슴께가 시큰거리는 것만 같았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번엔 내가 바꾸면 돼.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익투스는 혈관이 막혀 심장에 흐르는 피가 뇌까지 갈 수 없어서 생기는 병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고, 미리 발견했으니까.

‘괜찮아.’

혈관 안쪽을 녹일 치료제만 있으면-

‘근데 이 세계에 그 치료제가 있나?’

“폴 전조면 아직 아닌 거지? 익뚜스.”

“……아뇨. 이미 진행 중입니다.”

고개를 홱 돌려 묻는 말에 폴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절망적인 말에 눈망울에 물기를 그렁그렁 매단 채 고개를 들었다.

“치료할 수 있는 거지?”

“어렵긴 하나 치료제를 만들면 됩니다만.”

역시!

“만들 수 있어?”

“연구를 했던 것이 있긴 합니다.”

나이스!

그때 그 연구가 그거였구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안도를 밀어내는 폴의 말에 눈꼬리를 한껏 늘어트린 채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매우 부담스러운 시선에 폴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혈관 속 노폐물을 녹여야 하는데 그 약재가 아직…….”

입술을 씹으며 말끝을 뭉갠 폴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는 폴의 목소리

‘잎이 아니라, 나무껍질을 사용했었어야 했어. 젠장, 병신같이.’

“버드나무!”

앞뒤 생각 않고 소리를 내질렀다.

“껍질!”

* * *

통상 나무껍질은 약재로 생각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폴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우연히 펠루아나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그 나라 전사들이 버드나무 껍질을 씹고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말이다.

처음에는 버드나무 껍질이 진통 효과만 뛰어나다고만 생각해서 병사들을 치료하는 진통제로 활용했었다.

한데 이게 진통은 확실히 줄여 주지만 지혈이 잘 되질 않는 부작용이 있어 사용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외상 환자들이 많았으니까.

한데 익투스 전조증상을 보이던 병사 중의 하나가, 다리 쪽에서 올라오는 너무 심한 통증에 버드나무 껍질로 만든 약을 한입에 털어 씹어 대고는 말끔히 나은 것이 시작이었다.

단순히 지혈이 잘 안 되었던 게 아니라 찐득한 피를 묽게 해 주는 효과로 연결된 것이었다.

펠루아나 전투 이후, 몇 년이 흐른 뒤에 말이다.

‘그랬으니까 할아버지한테 사용할 수 없었던 거였겠지.’

하지만 펠루아나 전쟁 이후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펠루아나와의 전쟁 이후에 장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니까.

‘그때야.’

표면적으로는 황제의 명이었으나, 안드레아가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거래가 있었겠지.

황제는 정말로 에시어를 망하게 만들고 싶었던 걸까?

끝도 없이 흘러가는 생각의 타래가 나를 향한 할아버지의 물음에 멈추었다.

“버드나무 껍질, 그게 뭐지?”

“음.”

리실산이라는 약이요.

라고 말을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폴을 돌아보았다.

폴이 전문가적인 지식을 뽐내어 주길 바라며, 그를 보았다만-

“저도 처음…….”

“…….”

아 맞네.

팰루아나 전쟁 전이었지.

그의 난감한 얼굴을 보며, 나 역시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문득 책이 떠올랐다.

“책에서 버드나무 껍질을 우려서 졸여서 먹으면 피가 깨끗해진댔어.”

“어느.”

“몰라, 어떤 책인지는. 근데 진짜야. 내가 봤어.”

당당하게 모르지만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내 말에 폴이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잠시 고민하며 나를 빤히 보았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면,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킬 것만 같아 다급히 타깃을 변경했다.

“할부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앞으로 할부지 고기 금지, 술 안 대여. 맨날 산책도 해야 해.”

“뭐?”

“잠두 자야 해요. 피곤하면 안 대. 일도 그만 하셔야 해요, 일 많이 하고 신경 많이 쓰면 몸 아픈 거래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6살 난 내 입에서 줄줄줄 나오는 그 말에 폴과 필립,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모두 놀랍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책!”

그리고 또 다시 아주 좋은 핑계를 대며 폴을 올려다보자, 이내 납득한 듯 그가 할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씨의 말씀대로 치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가주님께서는 아무래도 육식과 술도 즐기시는데, 그에 반해 너무 움직이질 않으셔서…….”

나이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날씬한 것과도 거리가 먼 할아버지의 봉긋한 배를 보던 폴이 주먹 사이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아챈 할아버지의 표정에 불쾌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배 나온 게 사실인 것을.

해서 괜찮다는 듯 할아버지의 손을 토닥였다.

“괜찮아여. 앞으로 많이 산책하면 대여.”

고개를 끄덕여 주는 내 시선이 황당하다는 듯 잠시 빤히 보던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허참.”

하지만 할아버지의 손등에 살포시 올려 둔 내 손을 치우지는 않으시는 걸 보니, 영 싫은 건 아니신 듯했다.

그 모습에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에 할아버지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지자, 집사장 필립이 할아버지의 구원자로 나서듯 곁으로 다가섰다.

“그나저나 레티시아 아기씨께서 참으로 똑똑하십니다.”

“똑똑하긴.”

괜한 소리 말라는 듯, 내게 잡힌 왼손이 아닌 오른손을 들어 휘저은 할아버지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젠 알지.

할아버지가 저렇게 말할 때, 입매를 보면 실룩실룩거린다는 걸.

좋으시면서 괜히.

“고마워요, 필립.”

히힛 하고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자, 집사장의 얼굴이 내 귀여움에 녹아내리는 게 보였다.

‘역시 내가 많이 귀여운 모양이야.’

처음에는 어색했었는데, 자신감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이렇게 대놓고 사랑받았던 적이 언제였는지.

‘언제가 어디 있어.’

처음이지.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따끔따끔, 코끝이 시큰해질 것 같아 입술을 살짝 말아 물었다.

‘지금 아니면 됐지.’

과거로 슬퍼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외눈안경을 조정하듯 매만진 폴이 나를 빤히 보았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그의 가는 눈이 뭘 보고 있는지,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내가 이능력을 썼다고 생각하는 거야.

코와 입에 집중된 그의 시선에 애써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 뒤통수에 달라붙은 폴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버드나무 껍질은 저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였는데. 대단하십니다.”

“그러게요.”

폴과 필립의 대화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럴싸한 해명이 없다면, 대충 머리 긁적이며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회귀자라 알아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머릿속을 뒤졌으나 핑계 댈 건 그거뿐이질 않은가.

오글거리는데.

막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니 오장육부를 부드러운 털로 쓸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뭐 이판사판.

어차피 할아버지한테는 내 능력을 보여 줘야 했고, 앞으로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할 거다.

‘이걸로 핑계가 되어 주면 좋지.’

거기다 할아버지는 내게 이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흄. 이고 비밀인데.”

마른침을 꼴깍 삼킨 채 검지 손가락을 서로 맞부딪히며, 꼬물거렸다.

“레샤가 똑……해.”

“……뭐?”

“……예?”

숙인 고개에 뭉개지는 작은 목소리에 할아버지와 폴이 되물었다.

‘아이참.’

다시 말을 하기엔 입에 모래가 들어온 것처럼 거끌거리는 느낌에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만, 세 사람의 시선이 너무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가는 거다.

“레샤, 천재라구.”

“…….”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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