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하, 나 천재, 라는 말을 내 입으로 내뱉을 날이 올 줄이야.
아니라서 창피하고, 진짜로 여겨 주니 민망했으나, 뻔뻔하게 굴기로 다짐하지 않았나.
어차피 인생 3회 차 정도면 준천재 정도로는 보여야지.
‘그래.’
“그래서 레샤는 다 알아.”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어쩐지 뿌듯해하는 듯한 얼굴이었고,
필립은 여전히 내가 귀엽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폴은 지금 이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폴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내가 말한 대로 실험할 거고. 그러고 나면 아마도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겠지.
원래가 저런 학자들은 한 단계만 신뢰를 심어 주면 금방들 넘어오거든.
사기꾼들이 속이기 쉬운 집단이 되려 전문가들이라는 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할부지 나 믿어요.”
“…….”
“일은 그만해야 해요.”
눈을 빤히 보았다.
‘할아버지 잘 들어요. 내가 지금 할아버지 은퇴할 길을 열어 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라는 시선이었다.
아파서 은퇴한다는 데에 황제가 문제 삼을 여지는 없었으니까.
황제로선 할아버지가 홧김에 결정해 버렸다는 오명을 떠넘길 수가 없게 되어 아쉬울 거다.
그리고 아파서 은퇴한 사람을 가택 연금 시킬 수 있겠나.
그렇게 되면 여론이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 텐데?
이 테파로아 제국 내 에시어에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하다 못해, 평민들이 쓰는 소금 하나도 에시어에서 수입해 오는 물건이었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은퇴를 하고 난 이후에도 가택 연금을 풀지 않는다면, 황실에서도 부담일 거다.
그러니 아마 은퇴하고 나면 감금령은 풀릴 거고, 이후에 장원으로 내려가 몸을 다 회복한 뒤에,
펠루아나 전쟁 딱!
할아버지 등판 딱!
울 아빠 등장해서 정리 딱딱!
하, 완벽하다.
너무 완벽해서 아름다운 상상이었다.
* * *
마고 에시어가 귀족 회의 하루 전 사직을 청했다.
병세 악화 때문이었다.
“난 그렇게 쉽게 놓아 버리실 줄은 몰랐어요.”
유명 티 카페에서 찻잔을 든 귀부인들이 마고 에시어를 화두에 올리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러니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고 에시어잖아요.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오늘이 만우절이었나? 했다니까요?”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요? 폐하를 압박할 작정이라던지.”
“압박하려고 권력을 내려놓는 사람이 어딨담니까? 그 자리 노리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말이 안 되죠.”
고개를 저은 부인 하나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말을 꺼냈던 부인이 멋쩍은 듯 주근깨 진 콧잔등을 찡그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귀족 회의 의장직이니까요.”
“황실에서 황위를 내려놓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죠.”
“다른 4공작가가 바쁘겠네요.”
재빠르게 화제를 돌리는 귀부인을 향해 고맙다는 듯 웃은 여인이 콧잔등을 찡긋했다.
“누가 차지하게 될까요?”
“아무래도 네투아 공작가 아니겠어요?”
“2황자 전하의 외가잖아요.”
“그렇네요, 황후께서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실 리가 없죠.”
“하지만 루아니아 공작가도 만만찮아요.”
“바쁘게 돌아가긴 하겠네요.”
대체 누가 마고 에시어의 공백을 치고 들어갈까, 호기심이 동한 사람들 사이로 한 귀부인이 말을 붙였다.
“그럼 에시어는 누가 물려받는데요?”
“세상에, 그게 또 남았네요!”
“그래도 안드레아 에시어 아닐까요?”
“능력으로 치면 당연히 샤리에 님이지만…….”
귀족들이 저마다 모여 에시어 공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 한참 뒤쪽에서 크림파이를 포크로 한 입 베어 먹은 여인이 입가를 닦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음, 재미있네.”
마치 들을 이야기를 다 들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 * *
“오늘부터 직계 3세분들의 제국어 수업을 맡게 된 코르모입니다.”
“저는 지리의 해리슨입니다.”
마고의 은퇴 선언으로 한껏 소란해진 바깥 사정과 달리 에시어 공작가는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그래,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 평화가 진짜가 아니라는 점 정도는 이 자리에 모인 직계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것이었다.
챈들러와 제이슨 사이에 미미한 견제가 느껴졌고, 이미 포틀런 백작가의 영애인 리리아나 역시 불편한 공기를 감지한 듯 냉랭하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자리에서 굳어지지 않고, 해맑은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안녕하세요 해리슨 선생님!”
손까지 들어 가며 선생님들을 열렬히 환영하듯 웃는 내 모습에 선생들의 호감도가 변화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내가 정말 귀엽게 생기긴 한 모양이었다.
하긴, 전생에서도 내가 사교계에 한번 나타나면 다들 나만 보긴 했다.
이시아 때도 그랬다.
학기 초에는 예쁘다는 걸로 인기가 조금 있었다.
물론 내가 고아원 출신인 걸 알게 된 순간 그 관심은 죄다 안티가 되었지만.
‘쟤 고아원 출신이래.’
‘어쩐지 반반하더라니.’
‘고아원이면 걸레 아니야?’
‘근데 공부는 왜 저렇게 잘해? 미친년 짜증나게.’
‘독한 년.’
고아원 출신에 얼굴만 반반했으면 그냥 걸레로 불렸겠지만, 거기에 공부를 잘한다는 게 붙자 미친년과 독한 년이 추가로 따라붙었다.
고아가 된 건 내 잘못이 아닌데.
사회의 비주류여야 할 내가 자기 자리를 빼앗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 시간에 지들도 공부를 하지.’
그들의 일그러진 열등감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
“전 철학의 키에트입니다.”
‘난 네가 싫어.’
키에트 선생님의 인사와 동시에 스미듯 떠오른 목소리는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걔는 나한테 대체 왜 그랬을까.
원래가 그 나이대 아이들은 귀여운 애들한테 약하다던데.
‘흠.’
극렬하게 나를 싫어하다 끝내 여성 혐오까지 와 버렸던 전생의 이웃사촌을 떠올리며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요리조리 보았다.
‘가까이 오지 마!’
나를 경멸하듯 소리를 내지르던 작고 마른 남자아이.
리안, 아니 황태자 칼리안.
전생에 지독한 악연으로 엮였던 나의 이웃사촌이자 이번 생의 동앗줄인 제국 내 최연소 소드마스터로 장차 황제가 될 예정이신 황자님.
이자!
평민 시절 극악스럽게 그를 괴롭힌 여자아이, 그러니까 옆집에 살던 나로 인해 여자를 혐오하게 된다는 설정을 갖게 되는 리안.
‘난 네가 싫어.’
나를 경멸하던 나의 이웃사촌.
더 정확히는.
칼리안 율리아스 피노 콘스타누 베아테 폰 소모멧.
물론 저 긴 이름은 훗날 그가 소드마스터가 되고, 그의 친부인 현 황제의 인정을 받으면서 생기는 이름이고 지금은 없는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뭐냐고?
지금은 그냥 리안이라 불리는 평민 고아 아이였다.
제국 내에서 성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귀족과 황족뿐이었고, 대부분의 평민들은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는 걸로 충분했으니까.
근데 얘랑 어떻게 친해져야 하지?
잘해 주긴 할 건데, 그냥 소설 캐릭터가 나를 싫어하게 설정되어 있다면?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도 나를 싫어할 게 아닌가.
설정을 깨트릴 수는 없을 테니까.
문득 소설의 개연성을 떠올리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호감을 얻을 수만 있다면.’
턱받침 한 손끝으로 통통한 볼을 톡톡 두드리다 문득 시선을 들었다.
깨끗하게 닦인 창밖으로 푸르른 신록이 우거져 있었다.
정원사 아저씨가 공을 잔뜩 들인 그 푸릇푸릇함에 잠시, 볼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었다.
‘잠깐.’
내가 잠깐 뭔가를 놓친 거 같은데.
푸르름과 나의 태평함이 뭔가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태평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신록에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설마, 여름인가?’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빠르게 뒤엉키는 소설과 전생의 기억들에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름!
6살의 여름!
황태자 칼리안이 소설 속에서 애타게 찾아 헤매다 겨우 구했던 검.
그 칼이 내 나이 6살의 여름, 어느 날 오네의 경매장에 나와 황도를 떠돌았다고 했었다.
그거면!
이번 생의 동앗줄인 황태자 칼리안의 호감을 얻는 건 따 놓은 것이었다.
미래의 권력자의 호감이라.
어쩐지 악당처럼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 웃었다.
이제 문제는 그걸 어떻게 나가서 사 올 것이냐, 였다.
유찰에 유찰에 유찰이 되어 여름 내내 경매장을 떠돈다고 했으니.
‘헐값에 사 올 수 있겠지?’
“레티시아 아기씨?”
턱끝을 톡톡 두드리던 상태 그대로 고개를 들자 눈앞에 서 있던 선생들 모두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아,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