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뭐?”
“공.명.정.대.(above board), 이 말 몰라?”
그가 매번 나를 괴롭히던 방식이었다.
어려운 단어를 일부러 해 놓고는 모르는 걸 조롱하던.
‘물론 지금은 진짜 모를 줄 모르고 한 말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가 한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게 된 모양새였다.
썩 기분이 유쾌하진 않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말을 알려 줄 이유는 없기에 그를 빤히 보자, 챈들러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져 올라가는 게 보였다.
아마도 제가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동안 내가 느끼기를 바라며 말했던 그 감정들을 경험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빤히 보자 입꼬리를 바르르 떤 챈들러의 코평수가 넓어졌다.
금방이라도 손을 들어 내려칠 것만 같은 그의 행동에 똥을 피하고 보자 싶어 몸을 돌렸다.
“헤일 가자.”
“아.”
하지만 그 순간, 뭔가가 떠오른 건지 눈을 반짝인 그가 나와 헤일을 번갈아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이 방법이 있었지.”
그 선명하게 떠오르는 잔악한 표정에 얼굴을 굳히자, 그가 내 쪽을 향해 손짓했다.
“야, 너 이리 와.”
“뭐?”
“너 말고.”
챈들러가 사악하게 웃으며 내 뒤쪽을 검지로 쿡 하고 가리켰다.
“너, 동쪽 별채의 하우스키퍼지?”
“예.”
“잘됐네, 그러잖아도 일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너 앞으로 내 처소에서 일해.”
이게 진짜 뭘 잘못 먹고, 미쳤나.
“뭐?”
챈들러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런 나는 쳐다보지도 않은 챈들러가 헤일을 향해 놓은 손가락을 뒤집어 안쪽으로 까딱거렸다.
“우리 엄마가 누군지 알지?”
“작은 주인님의 부인이신 벨리아 님이십니다.”
“그런 거 말고, 우리 엄마가 저택 내부 일 다 본다는 거 말이야. 괜히 힘 빼지 말자? 괜히 울 엄마까지 나서서 너 내 밑으로 오면 더 힘들어질 거야.”
챈들러가 이죽거리며 나를 보았다.
“그리고 하나 아주 중요한 걸 말해 주자면, 네가 내 처소로 와서 내 괴롭힘을 당하는 건 모두 얘 때문이야.”
“…….”
“얘가 나를 거슬리게 할 때마다 너를 팰 거거든.”
틀어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미친 새끼를 어떻게 하지?
지금 확 줘 패 버릴까?
“네 처소에는 내가 다른 사람을 보내 줄게.”
“…….”
“레티시아,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양손을 모른 챈들러가 내 앞에서 흔들었다.
이 꼬맹이가 지금 시비를 제대로 걸어오네.
내가 무시를 하고 드니, 주변인을 괴롭힌다라.
이런 앙큼한 짓을 대체 누구한테 배웠을까.
‘생각하나 마나지.’
그런 걸 가르칠 사람이 숙부와 숙모 말고 또 있겠는가.
자식 교육 참 대단하게 시키셨네.
하지만 머리가 아픈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서 내가 헤일을 데리고 가면, 챈들러는 내가 헤일을 아낀다고 생각해 더욱 그녀를 빼앗아 가려고 안간힘을 쓸 거다.
그러면 헤일의 고생길은 훤히 열리게 되는 거야.
‘그건 안 돼.’
왜 하필 오늘, 헤일을 데리고 왔는지.
후회막심이었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싫어, 가자 헤일.”
그가 헤일을 뺏어 가려고 하면, 나 역시 헤일을 지키면 되는 거지.
하지만-
“싫은 게 어디 있어! 나는 직계인데!”
역시나 챈들러는 당장에 억지를 부리려 헤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제 내 거야. 아일리 내 처소에 데려다 놓아.”
“예, 도련…….”
“움직이면 가만 안 둬.”
“가만 안 두면 네가 어쩔 건데.”
“후회하게 해 줄게.”
“하, 후회? 후회는 네가 하지. 아일리!”
“경고했어.”
“경고해써어, 웃기시네.”
챈들러가 내 말을 무시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에 길게 숨을 몰아쉬자 피식 비웃으며, 잡은 손을 아일리에게 건네려 챈들러가 몸을 돌린 사이-
“안 된다구 했지!”
챈들러의 손을 밀치며 헤일을 뒤로 숨겼다.
그 탓에 챈들러가 또다시 흙바닥에 나뒹굴었고, 이 상황에 흥분한 챈들러가 얼굴을 시커멓게 물들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내질렀다.
“너! 지금! 감히 내게! 당장 쫓겨나고 싶어?”
“벨리아 숙모 엄청 무서운데. 레티샤 너 진짜 죽었다.”
제이슨이 맞장구를 치자 이내 기세가 살아난 듯 어깨를 잔뜩 올린 챈들러가 거들먹거렸다.
“그래, 엄마한테 일르면 너 오네는커녕 당장 쫓겨나서 디아브리아로 가게 될걸?”
“디아브리아 좋네.”
서로를 바라보며 킥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눈빛을 굳힌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디아브리아.
오네와 아주 가까운 그곳은 천민 주거 지역이었다.
그야말로 인생의 막장들과 거지들, 범죄자까지 죄다 모여 있는 곳이 디아브리아였다.
근데 그런 곳으로 제 사촌동생을 보내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7살과 8살이라니.
그것도 지네 엄마한테 일러서.
‘헤효.’
왜 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그들의 속마음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
‘어렸던 거지.’
고작 6살. 세상의 모든 것이 공작가의 작은 방이 전부였으니까.
그저 공작가에서 살고 싶었고, 다른 직계들처럼 사랑받고 싶었던 작은 아이.
그런 나를 왜 그렇게 쫓아내야 했던 걸까? 심지어는 아빠도 없던 아이일 뿐이었는데…….
‘심지어는 결혼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었던 유일한 여자아이였는데.’
후에 들어 알게 된 이야기였지만, 나중에는 가신의 먼 방계의 여자아이들을 입양해서 이리저리 사돈을 맺었었다고 했었다.
나를 쫓아낼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던 걸까?
“사생아의 딸이 지낼 곳으로 딱이지 뭐.”
“아, 맞다. 내가 엄마한테 들었는데, 쟤네 엄마 디아브리아 출신이래.”
순간,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 내는 사촌들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럼 창녀였던 건가?”
“으으. 더러워.”
“그럼 그렇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엄마를 걸고넘어지다니.
내가 헤일까지는 참았는데.
도 넘은 그들의 말에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이 순간적으로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 난 잠시 사라져 줄게. 하고.
그렇게 그야말로 뚜껑이 열려 버린 순간.
“이 바보 똥개 말미쟐 같은 겁쟁이 새끼햐! 너네 진짜 주글래?”
눈이 뒤집힌 채 소리를 내지르며 챈들러의 정강이를 빡 소리가 날 정도로 올려 쳤다.
물론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짧은 혀가 조금 슬프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악! 이 미친 게!”
그리고 이런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듯 정강이를 움켜쥔 챈들러가 다시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제이슨! 엄마 불러와! 너 우리 엄마한테 죽었어!”
“레샤 미쳤어? 채디 형을 때리면 어떻게 해!”
하지만 그런 챈들러의 윽박에도 지지 않고,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작은 손으로 문질러 뒤로 넘기며 챈들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 안 미쳤어!”
“이게!”
“모!”
전혀 지지 않고 턱을 올리며 바락 대드는 내 말에 벌떡 일어난 챈들러가 때릴 듯 손을 올려 든 그때.
바닥을 탕! 하고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의 노성 가득한 호통이 날아들었다.
“이게 뭐 하는 개짓거리들이야!”
* * *
레티시아의 예상대로 황제의 주치의들에게 차례로 몸을 내어 준 마고가 서늘한 눈초리로 시종을 바라보았다.
기분 나쁘게 생긴 광대처럼, 내내 웃는 얼굴인 부시종장, 테무스는 뒷짐을 진 채, 일련의 과정을 쭉 살펴보고 있었다.
마고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이다.
“흠, 미미하지만 익투스의 증세가 있긴 하십니다.”
“미미하다니요. 무리하시면 바로 발병할 겁니다. 지금 저희 가주님께서 쓰러지시길 바라는 겁니까.”
“말씀을 가려 하세요. 제가 언제 그렇게 말을 했습니까. 그냥…….”
“그만.”
폴과 황제의 주치의 이드갈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듯 테무스가 손을 들었다.
“그만하시지요. 에시어 공작 각하의 앞에서 이 무슨 추태랍니까.”
“…….”
“송구합니다.”
그러곤 마고를 보며 가슴에 오른손을 올린 테무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드갈의 말을 더는 문제 삼을 수 없게끔 만드는 테무스의 사과에 마고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황제의 주치의치고는 말의 경중이 없군.”
“…….”
둘둘 말려 올라간 소매를 내리고, 벌어진 셔츠를 매만져 단추를 잠그는 마고의 서늘한 시선이 이드갈을 비롯한 주치의들을 쭉 훑었다.
대부분이 황후의 친정인 네투아 가문의 종속들이었다.
이드갈은 수대째 네투아 공작가의 가신이었고, 그 곁의 주치의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들도 네투아 공작가의 가신 가문을 모시고 있겠지.
뻔한 수작질이었다.
행정부는 차마 건드릴 수 없는 황후가 궁내부를 제 사람으로 채워 넣는 꼴을 두고 보았더니.
마고가 가택 연금을 당해 두문불출하는 동안, 아주 물갈이를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우습지도 않지.’
아마도 제가 은퇴해서 가장 기뻐 날뛸 것도 네투아겠지.
‘그러니 이리 떼들을 잔뜩 내 집에 몰고 온 것일 테고.’
마고가 서늘한 시선 그대로 부시종장 테무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