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20)화 (20/141)

20화

“폐하께 보고할 거리가 있겠는가.”

“아, 빠짐없이 보고 드릴 것입니다.”

보고할 거리에 대해 물었는데, 엉뚱한 소리를 하는 테무스를 향해 마고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굳어져 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래, 그래야지.”

“다른 분도 아닌 에시어의 가주님이신데 하나도 허투루 할 수가 없지요.”

“제법 바쁘겠군.”

“…….”

“은행법 개정 시도까지 함께 처리하려면 말이야.”

마고의 찌르는 말에 테무스가 입꼬리를 더욱 당겨 웃었다.

하지만 마고의 말에 무어라 답을 하진 못했다.

거짓을 말할 수 없으니, 침묵을 택한 것이리라.

‘아마, 머릿속이 복잡해졌겠지.’

에시어를 탈탈 털어먹을 작정을 한 이 은행법 개정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 테무스였으니까.

우리 쪽에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을 테고, 어디까지 준비가 되었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울 거다.

그렇다고 내일 당장 들어오기에는 자기들의 준비도 미흡할 뿐만 아니라.

‘여론도 무시 못 하지.’

황실에서 직까지 물리고 은퇴를 선언한 에시어 공작가의 가주를 공격한 모양새가 될 테니까.

벽 쪽에 붙어 서 있던 베넷이 안경을 올려 쓰자, 마고가 껄껄 웃으며 테무스를 올려다보았다.

“이에로는 좋겠어. 이런 충신이 곁에 있으니.”

“…….”

순간, 황제의 아명을 스스럼없이 입에 올리는 마고의 말에 테무스의 표정이 그제야 굳어졌다. 이질적으로 짓고 있던 입가가 바르르 떨릴 정도로.

“아아, 이 늙은이가 무거운 짐을 벗어던졌더만, 오랜 친구의 아명을 부르는 실수를 해 버렸군.”

테파로아에서는 부모나 애정을 나눈 상대에게만 알려 주는 것이 아명이었다.

한데 황제의 아명을 막 부르는 공작이라.

테무스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마고를 노려보았다.

“조심, 하셔야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하지만 그 노려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한 듯 웃은 마고가 필립이 건네는 지팡이에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볼일 다 끝났다면, 이만 나가 봐도 되겠는가. 산책 시간이 다되어서 말이야.”

“…….”

“손녀딸 녀석이 어찌나 성화던지. 책을 뒤져 와서는 익투스에는 매일 산책을 해 주는 것이 좋다지 뭔가. 일도 하지 말고, 쉬라고 울며불며 난리를 치는데, 못 당해 낼 노릇이더군.”

레티시아가 들었다면 ‘울며불며’에서 약간 억울했을 법도 했으나,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사실인지라 필립이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폴도 같은 상태였다.

오직 마고만 싱글벙글 즐거운 낯빛이었다.

“그래서.”

“산책을 해야겠네.”

“…….”

“그러니 이만 내 집에서 나가.”

* * *

“갔느냐.”

“예.”

“꼴 볼 만했겠군.”

“…….”

마고의 코웃음에 베넷이 안경을 올려 썼다.

“괜히 건드린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쩔 게야.”

마고가 고개를 들었다.

“테무스가 왔다는 건, 꼬투리를 잡아서 은퇴를 번복시키려 한 것일 텐데 꼬투리 잡을 것이 없지 않았느냐.”

“…….”

“아마도 이에로 그 늙은이의 머릿속이 아주 복잡할 게다.”

이대로 에시어를 놓아 버리면, 네투아 공작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터였다.

황후의 친정, 황제가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네투아가 황실의 안팎을 전부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목전에 와 있었으니.

‘똥줄이 바짝바짝 탈 테지.’

제가 이런 수를 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안드레아와 윈드런의 문제는.”

“거의 해결하였습니다. 계좌는 동결했고, 문제 될 만한 것들은 미리 신고를 하든가 아니면 처분하기로 하였습니다.”

“순순히 하더냐.”

“…….”

“그럴 리가 없겠지.”

제 아들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고가 베넷의 침묵에 못마땅한 침음을 뱉으며 한 발 내디뎠다.

“샤리에가…….”

긴 한숨처럼 입을 연 마고가 자리에 멈춰선 그 순간-

“사생아의 딸이 지낼 곳으로 딱이지 뭐.”

“아, 맞다. 내가 엄마한테 들었는데, 쟤네 엄마 디아브리아 출신이래.”

“그럼 창녀였던 건가?”

“으으. 더러워.”

“그럼 그렇지.”

제 귀를 의심하게 하는 어린 말소리가 저 멀찍이서 들려왔다.

작은 머리통 두 개가 하나를 앞에 놓고 하는 그 말이 말이다.

‘고얀 놈들.’

그들의 입에서 저 소리가 나오게끔 만든 것이 누구일지, 잡히면 가만 두지 않으리라 마고의 눈동자가 짙어진 그 때-

“이 바보 똥개 말미쟐 같은 겁쟁이 새끼햐! 너네 진짜 주글래?”

소리를 빽 하고 내지르다 못해 챈들러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레티시아의 화가 잔뜩 난 목소리에 마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가주님.”

“잠깐. 애들 싸움이다. 나서지 말거라.”

베넷의 말에 손을 들어 막았다.

물론 그가 보기에도 작은 레티시아가 열세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 싸움에 끼지 않는다는 것이 마고의 원칙이었다.

그 과정에서 싸우고 화해하며 타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는 뜻이었으나, 이번은 조금 다른 이유였다.

내내 제 오빠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던 아이가 이 이후 어찌할 것인가, 궁금했다.

전장에 나가 있는 제 아비 욕을 해도 헤헤 웃으며 제 오빠들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그도 부족해 제가 나서서 제 아비를 욕하던 아이였는데.

‘왜 갑자기 변한 게냐.’

도대체 무엇이 저 아이를 달라지게 한 것인지, 매우 흥미로웠다. 거기다 저 지지 않겠다고 꽉 움켜쥔 작은 주먹과 앙다문 입술. 거기다 제 아비, 샤리에와 꼭 닮은 고집스러움까지.

‘샤리에도 저 나이 때도 저런 귀여움은 없었는데.’

샤리에의 고집스러운 눈동자는 그 기를 꺾어 놔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건만.

눈앞의 레티시아의 동글동글한 얼굴에 담긴 고집스러운 눈동자는 귀여웠다.

‘손녀딸은 이런 건가.’

레티시아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닌데 한순간에 가깝게 느껴지는 존재에 흐뭇하게 미소를 머금은 마고가 뒷짐을 졌다.

“이게!”

하지만 그런 흐뭇한 시선을 깨트리듯 아이를 향해 챈들러의 손이 올라갔고 순간,

“이게 뭐 하는 개짓거리들이야!”

마고는 저도 모르게 원칙을 깨트리고 노성을 내질렀다.

* * *

제 앞에 쪼로록 무릎을 꿇고 앉은 세 아이의 모습을 빤히 보던 마고가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옆쪽으로 비껴 선 채, 발을 동동 구르는 제 며느리들이 보였다.

챈들러의 어미, 벨리아.

제이슨의 어미, 헬렌.

그 두 사람의 등장에 훌쩍훌쩍거리기 시작한 손주 놈들의 모습과 일으켜 주고 싶어 어쩔 줄을 몰라하는 제 며느리들 사이, 울지도 않고 꿇어 앉은 레티시아의 모습이 더욱 또렷이 들어왔다.

어린 레티시아 혼자만 떼어 놓은 채 제 자식만 귀해 안달을 내는 꼴이라니.

그런 그들의 모습을 빤히 보는 마고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시선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건지, 내내 애꿎은 손수건만 쥐어짜며 발을 동동 구르던 벨리아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돌렸다.

“아버님, 우리 착한 채디가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았…….”

“그렇겠지. 그래, 챈들러 이유가 무엇이냐.”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마고의 서릿발 같은 시선이 챈들러를 향했다.

화를 내지 않을 때도 오금을 저릿저릿하게 만들던 눈빛이었다.

한데 지금은 그야말로 꿰뚫을 것처럼 빤히 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에 온몸을 와들와들 떨던 챈들러가 잔뜩 경직 된 얼굴을 겨우 들었다.

“저, 저저는 그냥 제이슨과 지나가다가 레샤를 보아 반가워한 것 뿌, 뿐인데….”

“…….”

“레샤가 갑, 갑자기.”

입 안에서 우물우물거리는 챈들러의 목소리에 팔걸이를 쾅 하고 내리쳤다.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하느냐!”

“으허어, 엄마아.”

버럭 내지르는 노성에 딸꾹질을 하듯 어깨를 떤 챈들러가 울먹이며 벨리아를 찾자,

“아버님!”

내내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녀가 아예 챈들러를 가리듯 나와 마고의 앞에 버티고 섰다. 그 모습에 마고의 눈썹이 살짝 휘어져 올라갔다.

하지만 그건 그 방 안에 있는 몇몇의 눈에만 보일 뿐, 벨리아에겐 보이지 않는 듯했다.

“챈들러의 말처럼 이건 조용히 지나가던 챈들러를 공격한 레티시아의 잘못인데, 다른 아이들까지 벌을 받는 건 과한 것 같습니다, 아버님. 우리 채디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요.”

“…….”

“성장기 아이에게 무릎 꿇리는 게 얼마나 좋지 않은데…….”

챈들러를 두둔하며 말끝을 뭉개던 벨리아가 싸늘한 마고의 시선에 뒤늦게 얼굴색을 고쳐 웃었다.

“그리고 아이들끼리 조금 투닥거린 것뿐인데.”

말끝을 늘인 벨리아가 어깨 너머로 레티시아를 보며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레티시아가 부모 없이 자라 천방지축에 제멋대로인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

“레샤, 아빠 있어요.”

하지만 그 순간 벨리아의 날 선 목소리에 레티시아의 작은 목소리가 겹쳐졌다.

작지만 아주 또렷한 말투였다.

그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레티시아를 향할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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