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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22)화 (22/141)

22화

“이게 무슨 일이냐! 애가 이렇게 될 동안 뭘 하고 있었던 게야!”

“송구합니다.”

“이런 쓸모없…….”

송구하다는 말에 고개를 돌려 노성을 내지르던 할아버지가 이내 소리를 짓씹듯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피가 잔뜩 묻은 옷을 입은 채,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한 탓이었다.

그 하려는 말을 목구멍으로 밀어내고, 얼굴에 꽉 들어차 보이게 선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쾅 하고 내려찍으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희게 질린 얼굴 위로 엉망이 된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당연하지.

6살밖에 안 된 손녀딸이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쓰러졌는데. 그 모습에 어떻게 태연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놀라실 수밖에.

하지만 이건 병이 아니질 않은가.

할아버지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걱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젠 알고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나를 걱정하고 있음을.

거기다 그 당시에는 황실 감시단도 저택에 들어와 있던 상황이었으니 더더욱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쓰러졌다고 하면, 할아버지가 걱정하실 테고, 그러다 혹시라도 별관에 오시겠다고 하면 그땐 정말 일이 어려워졌다.

할아버지가 아파 누운 것은 황제를 속이기 위함이었으니까.

해서-

“할부지한테는 내가 말하지 말랬어요.”

베넷과 폴에게 부탁한 거였는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들키게 될 줄이야.

“죄송해여.”

물론 이능력 부작용이라는 건 여전히 비밀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병약하다는 이미지를 남기게 되질 않았나.

‘문밖에선 이 침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났겠네.’

내가 병에 걸린 건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속이 탈 사람들을 떠올리며, 등을 돌리고 선 할아버지를 향해 말을 이었다.

“할부지 아픈데 괜히 걱정 끼치면 안 되니까.”

“너!”

다른 아이의 입에서 나왔으면, 어머나 기특하구나. 했겠지만-

“고작 6살 난 것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그리 많더냐!”

난 평생을 남의 눈치를 보며 살지 않았던가.

할아버지도 그걸 아는 듯했다.

그게 아니면 괜히 저토록 역정을 내실 리 없었으니까.

“할부지.”

“고얀 것.”

내 부름에 입술을 깨문 할아버지가 지팡이에 몸을 지탱한 채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도 한참을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보던 할아버지가 숨을 몰아쉬며 폴을 향해 사납게 물었다.

“그래서, 왜 저 모양인게야.”

“그것이, 이능 부작용인 듯합니다.”

“부작용?”

할아버지 역시 처음 듣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나이가 어릴수록 내면의 이능을 제대로 다스리는 법을 모르시는데, 그걸 억지로 끄집어내 쓰려다 보니, 엉뚱하게 몸을 공격해서 생기는 증상인 것 같습니다.”

“…….”

“이능력이 태어나면서 발현되는 분들은 대부분 그걸 체화하여 함께 성장하는 법을 배우는데, 아기씨께선 그것을 배우질 못하셔서요.”

나를 흘끗 보며 입술을 말아 문 폴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이대로 계속 무분별하게 이능을 쓰시면 목숨이 위태…….”

“뭐?”

지팡이로 쾅 하고 바닥을 내려친 할아버지의 성난 표정에 뒤로 물러서 있던 필립이 고개를 들었다. 마른 입술을 가만 두질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걱정이 묻어 나왔다.

내 걱정도 되지만 동시에 할아버지의 익투스가 터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였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걱정이었다.

나도 그게 제일 걱정이니까.

“할부지.”

해서 할아버지의 화를 누그러트리듯 부르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되레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할아버지는 홱 소리가 날 정도로 얼굴을 돌려 버렸다.

턱 근육도 단단하게 불거져 있었다.

화를 잔뜩 참고 있는 것이리라.

“올가는 언제 오느냐.”

“그것이 개인적인 일이 생겨 늦어지는 듯…….”

쾅!

“당장 끌고 와!”

“가주님!”

“할부지!”

지팡이를 거칠게 내려놓는 할아버지의 노성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붉어져 터질 것 같은 얼굴은 진정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어쩐지 그 과하게 느껴지는 감정에 숨을 몰아쉬었다.

왜, 이렇게까지 격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시는 거지?

그 이질감에 숨을 몰아쉬자-

“당장 끌고 오던가 아니면 다른 놈이라도 데려와.”

“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에 폴이 외눈안경을 올려 썼다.

“이런 증상은 지금껏 딱 두 명뿐이었습니다.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제가 알고 있는 건 레티시아 아기씨까지 총 두 분뿐입니다.”

“그게 누…….”

몸을 돌리려는 할아버지의 상체에 폴이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샤리에 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에 할아버지의 표정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는 게 보였다.

* * *

‘샤리에 도련님을 살려 주세요. 도련님도 가주님의 핏줄이지 않습니까. 제발.’

어느 날 밤, 본성의 집무실로 어린 샤리에를 들처 업고 달려온 유모의 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비단 유모뿐만이 아니라, 샤리에의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밀밭색 머리칼은 붉은 핏물에 절여져 있었고, 옷도 피로 엉망이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크게 다쳤다고 생각했을 법한 모습이었다만.

유모의 등에 업힌 제 자식은 상처 하나 없이 말라 비틀어진 몸으로 연신 입과 코로 피를 흘려 댈 뿐이었다.

‘그게 레티시아에게까지 이어진 건가.’

“기억난다. 샤리에가 6살 때의 일이었지. 에멧에게 들은 기억이 나. 이능력 부작용이라고.”

“예, 아마도 같은 증상인 걸로 보입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유모는 피를 흘리는 작은 아이를 제게 데려와 살려 달라고 빌고 또 빌었었지.

이대로 가면 샤리에가 죽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당장 돌아가.’

그 상황에서조차 마고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그저 별채로 가 있으면 곧 의사를 보내 주겠다는 말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질 못했다 .

선대 가주의 서릿발 같은 시선이 사방에 들러붙어 있었으니까.

‘왜 그때는 어리석게도 드러내 놓고 챙기지 않는 것이 샤리에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까.’

다정한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보다는 우선 제가 가주가 되어야만 샤리에에게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어리석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이 깨어진 건, 선대 가주의 사망 이후 모든 상황을 돌이키려 했을 때였다.

이미 다 자라 버린 어린 아들은 더 이상 아비를 찾지 않았다.

‘제가 언제고 에시어였던 적이, 아니 아버님의 자식이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보내 주십시오.’

후계의 자리를 거부한 샤리에가 가문을 떠날 때도, 그랬기에 강하게 잡을 수 없었다.

자격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는 아니질 않은가.

눈앞에 선 아이는 샤리에가 맡긴 내 손녀딸이었다.

“그래서.”

“샤리에 님을 모셔 오는 것이…….”

“됐다.”

“…….”

“그 녀석이 온다고 뾰족한 수 있겠느냐.”

그때 샤리에는 제 이능인 검기로 그 부작용을 극복했고, 그걸 다스리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쳤다. 그러니 레티시아에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녀석이 오면 괜히 귀찮은 일만 잔뜩 생기겠지.

‘차라리 안 오는 것이 낫지. 암.’

“네 말대로라면 이능을 다스리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냐.”

“그렇습니다.”

폴의 말에 마고가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샤리에와 꼭 닮은 얼굴과 머리칼.

그래, 이건 후회로 점철된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었다.

그때의 내 아들에게 해 줄 수 없었던 것에 대한 후회.

“당장 가문 내 이능력자들을 모두 불러들여.”

“알겠습…….”

“그리고 하루 주마.”

레티시아를 바라보던 시선 그대로 베넷을 향했다.

“그때까지 올가 찾아서 내 눈앞에 갖다 놔.”

“하지만…….”

“그런 능력도 없으면 내 집에서 나가.”

“…….”

“능력 없는 놈은 필요 없으니.”

할아버지의 매정함에 얼굴을 쓸어내리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겠습니다.”

“노력 필요 없어, 성과로 가져 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레티시아.”

“……녜.”

“너 오늘부터 본관에서 지내도록 해라.”

“……네?”

순간 지금 이게 무슨 말인가, 레티시아가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마고의 말은 레티시아를 직계로 인정하겠다는 의미였으니까.

“후계의 자격을 주마.”

거기다 후계의 자격까지.

하지만 그 말의 엄청난 의미를 알아챌 새도 없이-

“단, 오네로 가기 전까지 이능력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게야.”

“…….”

“그게 부족하면 그 어떤 상황에서건 오네는 없다.”

조건이 따라붙었다.

“너 스스로 후계의 자격을 증명해 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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