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25)화 (25/141)

25화

“올가는.”

“잡아서 지금, 호송 중에 있습니다.”

오고 있다도 아니고, 잡아서 호송 종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성가시게 굴었던 모양이었다.

“워낙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놈, 아니 사람이라서요.”

다시 생각해도 짜증이 나는지 설명을 덧붙이던 베넷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마고의 앞이라 대놓고 짜증을 낼 수 없었는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하루 늦었어.”

“알고 있습니다. 나가라면 나가겠습니다.”

“고얀 놈.”

쫓아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말에 얼굴을 찌푸린 마고가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하던 말 계속해.”

“리비에 백작님께 받은 전언을 확인해 보니, 국경선을 경계로 전운이 감돌고 있다고는 합니다.”

“내전일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베넷의 단언에 마고가 안경 너머로 그를 빤히 보았다.

여간해선 단언을 하지 않는 녀석의 입에서 나온 것이니, 이미 리비에 백작이 전해 온 소식뿐만 아니라 전방의 소식과 상단까지 모두 털어 온 듯했다.

“황실 쪽 움직임은.”

“펠루아나와 국경선을 마주한 영지 쪽에서 끊임없이 소를 올리고는 있는데, 궁내부 쪽에서 막히는 모양입니다.”

“이유는.”

“그럴 리 없다.”

“…….”

베넷의 말에 마고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북부에서 드라곤과의 전쟁이 한창이었으니 외면하려는 심리는 이해할 수 있었다.

거기다 제국 차원의 정복 전쟁이라면 각 귀족 가문의 병력을 내놓아야 했으니까.

그러니 귀족들은 국경쪽 영주들이 알아서 해 주기를 바랄 수 있었다.

한데 궁내부 신하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럴 리 없다.”

안경다리를 엄지와 검지로 돌리듯 매만진 마고가 고개를 들었다.

“네투아 공작가의 영향이더냐.”

“아마도 그런 듯싶습니다. 아무래도 궁내부의 재정을 네투아 공작가에서 대고 있는 모양인데.”

“전쟁이 나면 큰일이 나겠군.”

“거기다 펠루아나를 무시하는 시선도 있어 보입니다.”

“펠루아나 따위가, 인가.”

“예.”

베넷이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계자를 세우지 않은 상태로 은퇴 결정이 길어지시면, 제국 전체가 위험해질 겁니다, 가주님.”

“안드레아가 가주가 되면 제국이 안전해진다더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마고의 목소리에 베넷이 고개를 숙였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안드레아만 아들이 아니질 않습니까.’라는 말을 억지로 눌러 삼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고 역시 그런 베넷의 의중을 알고 있다는 듯 얼굴을 굳히며, 안경을 도로 올려 썼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후계를 정하는 것인지, 은퇴인지 아니면 두 가지 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알겠습니다.”

베넷은 그대로 순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샤리에 님께서 사람을 하나 보냈습니다.”

“사람?”

“예, 14살짜리 남자아이인데, 에시어 기사단에 입단시켜 달라는 전언이었습니다.”

샤리에가 사람을 보낸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기사단에.

“어떻게 할까요?”

“한번 보지.”

뭘 묻느냐는 듯한 마고의 시선에 베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하겠습니다. 다음은 골디만 상단의 이익금 분배에 관한 건입니다.”

* * *

햇살이 따듯했다.

여름의 문턱도 아니고 한중간에 와 있는데, 한국의 초여름만큼도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국민들의 여유로움이 기후에서 나오는 건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얼굴에 볕이 닿았잖아! 얼굴 타서 빨개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물론 내 옆에 선 리리아나에게는 온화한 기후도 통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죄, 죄송해요.”

모자와 양산을 쓴 채 나무 그늘로만 걸어가고 있는데도 리리아나는 마치 얼굴에 햇빛이 닿으면 죽는 사람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혹시 햇볕 알레르기가 있는 건가?’ 하고 볕이 닿은 피부를 유심히 보았지만 살갗이 붉어지거나 부풀어 오르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냥 얼굴이 익어 볼썽사납게 붉어지는 게 싫은 듯했다.

흠.

“리리아나는 언제나 예쁜데.”

순간, 나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이 컸는지 주변 분위기가 싸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 어색한 공기에 슬쩍 주변 눈치를 살피며 작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괜한 소리를…….

“뭐 사실이니까. 괜찮아, 용서해 줄게.”

하지만 그런 내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다 못해 순간 ‘내가 사과를 했던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당한 리리아나의 말에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거기다 모자 때문에 드리워진 그늘 아래로 언뜻 보이는 리리아나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 있어서 정정할 마음이 사라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한 말 자체는 사실이었으니까.

리리아나는 지금도 예쁘지만, 나중에 크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예쁘고 사랑스러워졌다.

그러고는 10살 무렵에 정혼했던 남자와 성년이 되자마자 바로 결혼을 하고는 많이 사랑받으며 살았던 걸로 기억한다.

‘근데.’

에시어가 무너지던 때에 포틀런 백작가는 화를 피했었던가?

순간 드는 의문에 잠시 턱 끝을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돌리자-

“야.”

리리아나가 나를 부르며 손짓했다.

그 부름에 턱을 두드리던 손가락 그대로 펼친 채 주변을 둘러보다, 리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나?”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네게 야! 라고 불릴 사람은 나 말고도 아주 많지.’라는 말을 하려다 꾸욱 눌러 참았다.

괜한 말을 해서 리리아나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전생에선 말 한마디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사이였는데.

해서 최대한 리리아나가 기분이 좋기를 바라며 생긋 웃었다.

그러자 그 미소에 리리아나가 눈썹을 찌푸렸다.

“안 와?”

“가, 금방 가.”

어색하게 웃으며 일단은 리리아나가 부르는 자리로 가 앉았다.

볕이 피부에 닿을까 봐 그 난리를 치고 피하더니, 강변에 있는 후원 잔디 위에 깔린 매트에 다소곳이 앉은 리리아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오기 싫다더니.”

“나오기는 싫었지만, 이미 나왔잖아.”

음, 맞는 말이긴 하지.

아예 끝까지 안 할 거라면 몰라도 어차피 나온 거 혼자 싫다고 짜증 내고 있으면 나만 손해였다.

“맞는 말이네.”

“내 간식인데 너한테도 나눠 줄 테니까. 이리 와서 여기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리리아나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응.”

“이브, 차와 간식을 내와.”

“예, 아가씨.”

리슈아 부인은 어디 가고 나가기 싫다던 리리아나만 즐거운 이 상황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나도 즐기면 되는 거지, 뭐.

긍정적으로 사고하기로 했다.

“진짜 맛있다.”

스콘도 맛있고, 주스도 맛있고, 샌드위치도 맛있고!

세상에 백작가가 맛집이었다니.

전생에서도 그렇고, 다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공작가에서도 제대로 된 걸 먹어 본 적 없어서인지 앞에 놓인 디저트들의 맛은 모두 환상적이었다.

입 안에서 오물오물, 끝도 없이 입에 넣고 또 넣었다.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 볼따구니 같은 내 뺨에 리리아나가 약간 질린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넌 이런 것도 못 먹어 봤니?”

“음, 그건 아니야. 나, 나두 에시어인걸?”

입에 남은 음식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먹고 싶을 때마다 못 먹었어?”

“……으응.”

귀신이네.

이시아일 때는 돈이 없어서, 전생에서는 다 자라서까지 디저트는커녕 메인 음식도 제대로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 할아버지의 만찬에서 추태를 보이곤 했었지.

예의나 예법도 모르는 평민처럼 군다고, 그 피가 어딜 가겠느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등과 뒤통수로 들으면서 말이다.

흑역사야.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고 싶은 순간을 떨치듯 고개를 젓자-

“쯧쯧.”

어른인 척하는 아이처럼 혀를 찬 리리아나가 새끼손가락을 한껏 펼친 채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내일 우리 집에 와. 내가 더 맛있는 거 먹여 줄 테니까.”

“……응?”

이렇게 갑자기?

“점심때가 좋겠어. 점심 먹고, 디저트까지 먹여 줄게. 그렇다고 딱 점심때 맞춰서 오진 말구. 우리 집이랑 내 방 구경도 해야 하니까.”

턱을 살짝 올려 드는 리리아나를 보며 ‘누가 가겠다고…….’라는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내일은 토요일이고, 내가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리리아나가 자기네 집에 오라고 한 게 아닌가.

그러면 아주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갈 핑계가 생긴 건데?

세상에.

역시 긍정적으로 살면 복이 온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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