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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26)화 (26/141)

26화

“싫어?”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게 기분 나빴던지 눈꼬리를 위로 쭉 올린 리리아나의 재촉에 고개를 저었다.

손도 앞으로 내밀어 흔들었다.

“아니! 좋아! 너어무 좋아! 기대돼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내 진심을 담은 호들갑에 기분이 좋은지 리리아나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마치 할아버지가 좋은 걸 숨기려고 참는 것처럼 움직이는 리리아나의 표정에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귀여워.

지금의 내 모습은 생각 못 하고, 리리아나의 작고 예쁜 모습에 반할 것만 같았다.

쿠키를 잘개 쪼개서 오물거리는 것도 어쩜 이렇게 우아하고 예쁜지.

“어쩜 이렇게 예쁠까. 미쉘 고모님은 좋으시겠어.”

6살 난 아이의 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애늙은이 같은 말투에 백작가의 하녀들이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말아 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조금 민망해져 시선을 살짝 돌린 그때-

촤아아아-.

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호수에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물기를 흠뻑 머금은 붉은 머리칼을 옆으로 모아 잡아 쭉 물기를 짜낸 사내의 이질적인 모습에 나와 리리아나, 그리고 하녀들 모두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런 시선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붉은 머리 사내가 고개를 돌리자-

“올가 님!”

저 멀리서 리슈아 부인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주목되는 시선이 불편한 듯 빠르게 몸을 돌려 사라지는 벨리아 숙모의 시녀, 엘린이 보였다.

‘흐음.’

어쩐지 리슈아 부인 역시 곱게 보이질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고개를 돌리자, 리슈아 부인이 반가운 듯 올가를 향해 환히 웃었다.

“오늘도 평범치 않게 나타나시네요.”

“그러게요.”

하하 웃으며 뒤쪽을 흘끗 본 올가가 젖은 몸을 툭툭 털자, 손끝이 닿을 때마다 몸이 말라 가는 게 보였다.

마력인가? 아니면 이능?

손이 닿을 때마다 몸이 드라이기에 넣었다 뺀 것처럼 말라 있는데, 저게 이능이나 마력이 아니면 뭔가 싶긴 했다.

“그게 이능이에요?”

“아뇨, 마법입니다.”

올가가 이능에 마력까지 있었구나.

새삼 신기하고 놀라워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이미 다 말라 근사하게 흘러 내린 머리칼을 뒤로 늘어트려 묶은 올가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갈색 눈동자 속에 담긴 내 모습이 마치 속까지 투명하게 비취는 것만 같았다.

마치 내 속을 읽어 내는 것처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독심이 가능한 이능은 없었으니까.

해서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올려다보자, 그런 나를 향해 싱긋 웃어 준 그가 나와 시선을 맞추듯 몸을 숙였다.

그 모습에 리슈아 부인이 숨을 삼켜, 입을 가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의아하게 볼 새도 없이 내 눈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부딪혀 소리를 내는 올가의 행동에 다시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이내-

“이타성이라.”

혼잣말처럼 작게 뭉개듯 말을 굴린 그가 흥미로운 걸 발견한 얼굴로 나를 보며 웃었다.

“이능의 기질이 독특하시네요. 매우, 흔치 않아요.”

‘기질?’

이능에 특성 말고, 기질이라는 게 있었던가?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기질이 뭐…….”

“올가 님!”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을 틈도 없이 가문 기사들이 그를 부르며 뛰어 오고 있었다.

아마도 올가를 호수에 빠지게 한 장본인들이겠구나, 예상하게 만드는 그들의 등장과 올가의 미미하게 찌푸린 인상에 고개를 들자-

“다음에 봐야겠네요.”

그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 봐요, 레티시아 아기씨.”

그러곤 더 잡을 틈도 없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가 님!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당장 오지 않으시면 지원금 다 끊어 버리신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기사의 마지막 말에 걸음을 우뚝 멈춘 그가 긴 한숨처럼 어깨를 늘어트렸고, 이내 나를 돌아보며 매우 애달프게 웃었다.

“어쩔 수 없네요. 아기씨를 만나 버렸으니.”

그러곤 도망치려던 걸 멈추곤 몸을 돌렸다.

“가지.”

어쩐지 슬퍼 보이는 뒷모습에 입 안에 남은 말을 삼켜 넘겼다.

‘어쨌든 올가가 왔으니까.’

이 부작용도 고치고, 궁금했던 것도 물어봐야지.

할아버지의 조건은 오네로 가기 전까지 이능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라는 거였으니까.

‘별로 어렵지 않을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곁에 앉은 리리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눈앞에 놓인 것부터 차근히 해결하자.

“리리아나, 우리 내일 뭐 하고 놀까?”

* * *

“올가 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문 안쪽에서 들리는 성난 목소리에 올가가 웃으며 미간을 문질렀다.

“예, 들어갑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기가 무섭게, 무언가 딱딱한 것이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벽에 부딪혔다. 까딱 잘못했으면 안면에 고대로 맞았을 그 단단한 물건의 정체에 올가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가주님. 저도 다시 뵙게 되어 몸둘 바를 모르게 기쁘고, 영광스……오, 마검사인가요?”

너스레를 떨며 웃던 올가가 표정을 바꾸어 눈을 빛냈다.

허름한 옷차림과 헝클어진 흑발, 거기다 언제 씻었는지 모를 정도로 더러운 얼굴을 보자니, 귀족은 확실히 아니었다.

나이는 고작해야, 열 두셋 정도?

한데 의문은 그런 아이가 왜 가주의 집무실에 와 있느냐는 것이었다.

“특성은.”

“불이죠.”

“가능성.”

“흠. 잘만 다듬으면요.”

올가의 대꾸에 마고가 앞에 선 아이를 빤히 보았다.

검술을 전혀 모르는 제가 보아도 눈빛만큼은 날이 시퍼렇게 날이 바짝 선 것이, 검사의 기질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거기다 샤리에가 보냈다니, 더 말할 것도 없지.

이미 그를 받아 주겠다 마음을 먹었음에도 한 번 더 단속하듯, 마고가 그를 빤히 보았다.

“이름.”

“피어스, 입니다.”

“그것도 샤리에가 지어 준 것이냐.”

끄덕.

피어스의 고개가 매우 불만족스럽게 아래로 꺾였다 올라갔다.

“마검사에게 잘 맞는 이름이네요.”

피어스라는 이름을 곱씹던 올가가 웃으며 마고를 바라보자,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린 마고가 고개를 들었다.

“기사단에 입단 시켜 주마.”

“…….”

감사합니다, 라는 입바른 말조차 않고 입을 꾹 다문 아이의 모습에 뒤쪽으로 물러서 있던 베넷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되레 마고는 그런 녀석의 행동이 거슬리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다만 기사단에 들어가 샤리에의 이름을 입에 올릴 생각 하지 마라. 내 집은 그 녀석과 상관없으니 네가 덕 볼일은 없을 거…….”

“저도 그럴 생각 없었습니다!”

마고가 채 이야기를 끝내기도 전에 피어스가 고개를 팍 하고 처들었다.

“대장이 동생 목숨을 구해 주지만 않았다면 이딴 데 오지도 않았을…….”

“…….”

발끈해서 소리를 높이던 그가 이내 저를 향한 마고의 시선에 어금니를 짓씹듯 말을 깨물었다.

입 안의 여린 살을 씹고, 피가 나올 때까지 혀를 씹으며 고개를 숙인 채 몸이 힘을 주었다.

언제든 때리면 맞겠다는 의지였다.

‘샤리에 님께 어느 정도 훈련을 받긴 한 모양인데.’

특히나 불의 속성을 가진 이들은 자신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광인이 되거나, 스스로 태워 죽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인가.’

끼고 가르치지 않고, 그를 에시어로 보낸 이유를 알 것만 같은 올가가 피어스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스윽 말아 올렸다.

‘이타성 기질에 이어 불의 마검사까지.’

어쩐지 가슴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잡혀 오기 싫어서 내내 도망쳤던 게 언제였냐는 듯 얼굴에 생기가 돌다 못해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베넷.”

“예, 가주님.”

“기사단 입단 시키고, 에헬에게만 일러두어라.”

“예.”

베넷이 고개를 숙였다 들며, 피어스와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탁 소리와 함께 마고의 앞에 마주 선 올가가 고개를 들었다.

“만났느냐.”

“예, 오는 길에 뵈었습니다.”

“이능력은.”

“있으십니다.”

“…….”

올가의 단언에 고개를 든 마고가 이내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고대어를 읽고, 어려운 책들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특성은 하나로 집을 수가 없습니다.”

“미미하여서?”

“아니요. 그 반대라서요.”

올가의 말에 마고가 고개를 들었다.

“이타성을 기질로 타고 태어나셨습니다.”

“이타성이라면.”

“테파로아의 수호성이 가진 기질과 같지요.”

“…….”

올가의 말에 마고가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풀어, 팔걸이를 문질렀다.

그 모습에 잠시 시선을 둔 올가가 웃으며 쐐기를 박아 넣었다.

“아기씨께선 원하는 것은 모두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

물론 가문에 이것이 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레티시아 아기씨께서는 초대 테파로아 황제 폐하와 같은 수호성을 타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렇다는 건…….”

“아기씨의 이능으로 에시어는 더욱 위대한 가문으로 꽃피게 되겠지요.”

하지만-

“다만 아기씨의 이능이 제대로 발현된다면 오래 살기는 어려우실 겁니다.

“…….”

“20살의 나이에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죽은 초대 에르피우스 황제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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