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올가의 말에 마고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아기씨께서 이 이능을 발현시키지 않는다 해도 얼마나 사실지,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발현을 시켜도, 시키지 않아도 오래 살지 못하실 겁니다.”
올가의 말에 마고가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단순히 예지를 이능으로 타고 태어난 것보다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제가 오롯이 에시어의 가주로서만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이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레티시아만 있다면 에시어가 더욱 위대한 가문으로 꽃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하지만.’
레티시아의 희생이 필수라면.
“에르피우스 황제와 다를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올가가 마고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불확실성보다는 확실한 불행에 배팅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가주님.”
잔인한 말이었으나, 그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가주라면 가문을 책임져야 하는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어린 손녀딸이라 할지라도.’
마고가 눈을 감은 채, 팔걸이를 문질렀다.
다 헤져 반질반질한 그 팔걸이 끝을 매만지던 마고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허면 레티……, 아니. 아이의 부작용은.”
“이능을 다스리게 되면 사라질 겁니다.”
“…….”
올가의 말에 다시금 침묵하던 마고가 천천히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에 서린 안광이 퍼렇게 빛이 나고 있었다.
누구나 오금이 저릴 법한 그 시선에 올가가 어깨를 늘어트린 채 명령을 기다리듯 고개를 들었다.
“샤리에를 비롯해 그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게 해라.”
“…….”
“그 누구든 알게 된다면 네 목부터 벨 것이다.”
* * *
그 시각.
백작가로 돌아가는 리리아나를 배웅하고는 재빠르게 본관으로 뛰어 올라갔다.
올가를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는데-
“어디 가십니까.”
마주친 건 베넷과 베넷의 뒤를 따르고 있는 낯선 아이였다.
정돈되지 않은 검은 머리칼은 잔뜩 헝클어지고 한데 눌어붙어 있었고, 옷은 허름해 한눈에 보아도 부랑아 같은 내음을 풍기는 아이였다.
아무리 봐도 본관에 있을 아이로는 보이지 않는 그 행색에 베넷을 올려다보았다.
깜박깜박-.
그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베넷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마검사입니다. 기사단에 입단 시키려고요.”
“아아.”
그제야 지금 상황을 이해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근데 너무 말랐다. 잘 먹어야겠어.”
“기사단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응!”
내 말에 다정히 대꾸해 준 베넷을 향해 손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다 문득 멈추어 몸을 돌렸다.
“베넷.”
“예, 아기씨.”
“나 내일 리리아나네 놀러가도 돼?”
“포틀런 백작가 말입니까?”
“응, 리리가 놀러 오래 점심, 아니 점심 전에 와서 백작가 구경하고, 점심 머꼬 간식도 준대.”
검지를 꼬물거렸다.
벨리아 숙모한테 말해야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며칠 전 일로 가뜩이나 나를 좋지 않게 보는데 괜히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벨리아 숙모한테 말했다가 안 되어서 할아버지를 찾으면 그건 그거대로 고자질이 되어 버려 상황이 복잡했다.
차라리 이게 낫지.
“웅?”
“가주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오늘! 오늘 말해 줘야 해! 나 내일 가야 한단 말이야.”
“알겠습니다. 이 아이만 기사단에 데려다 놓고는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마어!”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손으로 입을 막고 쿡쿡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곤 총총히 계단을 올라가는 내 뒤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쟤가 대장 딸입니까?”
‘응, 대장?’
그 아이가 말하는 대장이 어쩐지 우리 아빠인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계단 중간쯤 서 있던 두 사람은 이미 계단을 다 내려가 문 쪽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불러 세우는 것도 조금 이상하다 싶어 일단은 몸을 돌렸다.
‘목소리가.’
분명 어디서 들어 본 듯 익숙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 * *
“쟤가 대장 딸이에요?”
“…….”
“쟤가 샤리에 대장 딸이냐구요.”
“그래.”
몇 번 반복해서 묻는 물음에 질린 듯 밖으로 다 나와서야 대답한 베넷이 가던 걸음을 멈추어 피어스를 돌아보았다.
“샤리에 님의 외동딸이시지.”
베넷의 말에 피어스가 고개만 돌려 제가 들어왔던 문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건지, 손끝을 허벅지에 툭툭 두드리다 긁듯이 움켜쥔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독한 게, 딱 대장 딸답네.”
“……뭐?”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베넷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것도.”
하지만 되묻는 말은 대꾸하지 않은 피어스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하.”
그 모습에 눈을 살짝 위로 올려 뜬 올가가 고개를 내저었다.
“말을 말자.”
그러곤 퀭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얼른 따라와.”
“예에.”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 뿐, 피어스의 시선은 지금 막 열린 3층의 창문을 향해 있었다.
* * *
“오셨어요?”
아리나의 인사에 고개를 대충 끄덕이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헤일은?”
“별관에 놓고 온 게 있어서 심부름 보냈어요.”
“린지는?”
“식사 준비요.”
“아.”
둘만 남았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여긴 별관도 아닌 본관이었다.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오늘따라 둘만 있는 게 으스스했다.
할아버지 집무실 앞에서 서성거릴 걸 그랬나.
내일 나가려면 숨겨 놓은 보석이랑 아빠가 예전에 줬던 금화들 얼른 꺼내서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흘긋 아리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리나가 있으면 어쨌든 뭘 하기가 어려운데.
‘밤에 해야겠네.’
나갈 기미가 전혀 없어 보이는 아리나와 거리를 벌린 채, 슬쩍 그녀를 살폈다.
하지만 잔뜩 경계하는 나와는 달리 입구 쪽 콘솔 위에 놓인 포도주스를 유리잔에 따르고는 스푼으로 휘휘 저은 아리나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목 마르시죠? 아기씨 좋아하시는 포도주스요.”
내가 포도주스를 좋아했던가?
그런 기억은 없는데, 싶어 고개를 갸웃하자 살갑게 웃은 아리나가 잔을 건넸다.
“장원 농장에서 올해 처음 수확한 거래요. 한번 드셔 보세요.”
답지 않은 살가움에 잠시 그녀를 올려다보았으나, 굳이 이런 걸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 받아 들었다.
“웅!”
그러곤 꿀꺽꿀꺽 삼켜 넘겼다.
아리나가 어떤 눈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는지 모른 채 말이다.
그날 저녁.
모든 사람들이 잠든 시각, 조용히 이불을 걷어 바닥에 발을 붙였다.
포근하게 발끝에서 감싸는 카페트의 보드라운 감촉이 발꼬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발끝을 꿈지럭꿈지럭 움직이며 작은 고개를 휘휘 돌렸다.
‘인형이.’
평소에는 일부러라도 절대 시선을 두지 않는 돼지 인형을 찾으려 뒤꿈치를 든 채 도도도 소리 없이 뛰었다.
거기에 아빠가 매년 생일마다 와서 2개씩 줬던 금화 10개랑 할아버지가 생일날 주셨던 보석을 모아 놨었다.
기특하게도 다 써 버리지 않았단 말이지.
이거랑 내 몫으로 매달 나오는 용돈까지 닥닥 긁어모으면 물건을 사는 건 어렵지 않겠지?
‘헤헤.’
리안이 줘야지.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듯 클클 웃으며 살곰히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많은 가구들 사이 한쪽 모퉁이 쪽에 내 어깨 높이만 한 서랍장이 보였다.
‘저……다.’
내 보물 창고.
별관에서 유일하게 가져온 것이었다.
뭐 별거 있는 건 아니고, 어릴 때부터 가지고 놀아 손때가 잔뜩 묻은 꼬질한 토끼 인형에서부터, 강아지와 곰 인형, 사자, 호랑이, 용.
강한 동물 좋아했구나, 나.
의외의 취향에 피식 웃으며 캐비넷 안쪽에 고개를 파묻자, 아빠가 나 애기 때 만들어 주셨던 목검이 보였다.
이제 막 돌 지난 아이에게 줬다기엔 너무한 장난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몰랐으니까 그랬겠지, 몰랐으니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자, 서랍장 저 안쪽에 배가 빵빵하게 부른 돼지가 보였다.
‘찾았다.’
핑크색에 고개는 45도 각도로 기울어진 날개 달린 돼지의 모습에 손을 뻗어 코를 움켜쥐었다.
‘음?’
배 안에 든 게 많아서 그런가?
인형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무겁네.’
이거 원래 이렇게 무거웠나?
고작해 봐야 금화 10개랑 반지 두어 개, 정도일 텐데.
그게 무거워 봐야 뭐 얼마나 무겁다고.
‘손힘이 약해졌나?’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에는 미끄러지기 쉬운 코가 아니라, 등 쪽에 나 있는 돼지 날개를 움켜쥐었다.
‘됐다.’
자, 하나 둘 셋-
놓치지 않게 단단히 잡아서 확 밖으로 당긴 그때!
“아파!”
서랍장 안쪽에서 난데없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꿀꿀거리는 소리와 닮은 괴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