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엄마얏!”
왁 하고 사람을 놀래키듯이 들린 고함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쿵 찧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인형 날개를 움켜쥐었는데 사람 소리라니.
심장이 저 아래로 쿵 하고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붙는 것만 같았다.
이 한밤중에-
‘설마 귀신인가?’
등줄기에 소름이 바짝 서는 것만 같아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
하지만 사위는 조용했고, 방 안에는 다른 사람의 기척 없이 나 혼자였다.
‘환청인가?’
그게 아니고는 또렷이 들은 ‘아파!’라는 꿀꿀 소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진짜 코앞에서 들렸는데.
‘아파!’라고.
고개를 들어 양쪽으로 열린 서랍장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인형과 장난감들이 마구잡이로 들어가 있는 서랍장은 검고, 조용했다.
마치 그 안쪽이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처럼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상하네.
어쩐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는 듯한 서랍장을 빤히 보다 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아까 했던 것처럼 서랍장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방금 전에 보았던 것처럼 서랍장 안엔 아빠가 준 나무 검과 토끼 인형, 그리고 그 안쪽 끝으로 내가 찾던 돼지 인형이 보였다.
배 아래쪽이 쭉 늘어져 있는 그 인형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자, 잘그락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인형이 쉽게 손에 잡혔다.
‘돼지 코가.’
처음 잡았을 때와는 달리 솜이 빠져 흐물흐물한 인형의 코를 잡아당기자 아까와는 달리 너무 쉽게 꺼낼 수 있었다.
‘뭐지?’
퉁퉁하던 배도 없고, 코도 흐물거리고.
어쩐지 방금 전에 꺼내려던 것과는 다른, 아 물론 내가 찾던 인형은 확실했지만 어쨌든, 느낌이 조금 달랐다.
‘맞아, 날개.’
잘그락 소리를 들으며 인형을 뒤집었다.
하지만 제가 꽉 잡아당겼던 날개는 없었다.
분명 고함 소리를 듣기 전에 날개를 잡아당겼는데.
‘꿈꿨나?’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그 느낌에 오른손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내 인형과는 달리 보들거리는 감촉이 여전히 손에 남은 듯했다.
꿈이라기에는 너무 짧고 생생했던 순간에 고개를 들자, 열린 서랍장이 보였다.
기괴할 정도로 캄캄한 어둠에 저 너머 뭔가 있는 게 아닌가 호기심이 동할 정도였으나.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말자.’
모르는 상황에 오지랖 넘게 개입했다가 극 진행을 방해하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 저 안에 뭔가 있어.’
뭐가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건 지금 제 품에 안긴 것과 안에 있는 뭔가가 다르다는 것뿐이었다.
* * *
드디어!
토요일의 아침이 밝았다.
밤사이 있었던 일은 그야말로 까맣게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설렁줄을 당겼다.
그 뎅뎅 울리는 소리에 제일 먼저 아리나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기씨.”
“응!”
요즘 들어 부쩍 친밀하고 살갑게 구는 아리나의 인사를 웃으며 받아넘겼다.
아리나가 어쨌든 간에, 오늘은 처음 성 밖을 나가는 날이었으니까.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통통 엉덩이로 뛰며 침대에서 내려오자-
“여기요. 주스.”
아리나가 또 주스를 내밀었다.
“포도주스?”
“어제 너무 잘 드셔서요.”
맛있긴 했으니까.
근데 오늘은 안 마시고 싶은데.
“먹기 싫어.”
“건강을 위해서라도 한 잔만요.”
아리나가 강권하듯 유리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 코앞으로 밀듯이 건네는 유리잔을 빤히 보다, 이내 어깨를 늘어트렸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좋았던 기분을 아리나 때문에 망가트리고 싶진 않았다.
거기다, 그래.
내 건강을 생각해서 가져왔다지 않은가.
“알게써.”
해서 잔을 받아 들고 꿀꺽꿀꺽 삼켜 넘겼다.
한데, 어제와는 달리 단 청포도의 향내 뒤로 어쩐지 씁쓸한 맛이 느꼈다.
올해 포도 농사가 이상했나?
고개를 젖혀 마지막 방울까지 마시고는 잔을 건네자,
“저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오세요.”
아리나가 손가락으로 문 옆쪽에 놓인 콘솔을 가리켰다.
순간-
“……모?”
이 미친 소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것만 같았다. 크게 뜬 눈으로 아리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머릿속으로는 수십 가지 말들이 떠도는데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너무 기막히고 황당한 소리를 들으면 화도 안 나오고 말도 못하겠는 거.
지금 내 상태가 딱 그거였다.
‘얘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니, 별관에서 지 멋대로 굴며 나를 괴롭힐 때에도 내 앞에서 당당하게 제가 할 일을 떠밀었던 적은 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 당당한 거지?
별관도 아니고, 본관에서. 그것도 할아버지가 수도 저택에 계시는 상황인데?
“아리나 미쳐써?”
“아뇨.”
“군데 왜 그래?”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아리나는 미친 사람처럼 생긋 웃으며 다시 콘솔을 가리켰다. 마치 어린아이 훈육하듯이 말이다.
“자, 얼른 가져다 놓고 오세요. 우리 아기씨 착하죠?”
얘 진짜, 미쳤네.
이 상황이나 우리 둘 사이를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지금 아리나의 눈을 보고 있자면. 나와 똑같은 말을 했을 거였다.
저 탁한 눈동자.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나빠지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고개를 돌리자, 문득 고아원 원장이 떠올랐다.
이시아 시절 고아원 원장이 구속되기 직전의 눈.
그래, 이시아 시절 횡령죄로 고소당했을 때, 고아원 원장의 눈이 저랬었다.
절박하고 다급함에 뭔가를 움켜쥐고는 싶은데, 움켜쥘 게 아무것도 없어 허공만 긁는 듯한 눈동자.
그 눈동자로 어린애들을 쥐 잡듯이 잡았었다.
한 아이가 쓰러져서 끝내 병원에 실려 가게 될 때까지 말이다.
‘끝내 그것 때문에 구속됐고.’
한데 아리나가 딱, 그 원장의 눈을 하고 있었다.
나를 향해서.
잡아채 움켜쥐어 흔들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허공을 긁는 듯한 눈동자였다.
그리고 저런 눈동자는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위험해 보여.
내가 아무리 회귀자라고 해도, 6살의 몸으로 다 큰 성인을 대항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최대한 단둘만 있는 상황을 피해야겠어.
일단 지금 상황부터 벗어나 보자 싶어 머리를 굴린 그때-
“아기씨.”
노크 소리와 함께 헤일이 안으로 들어섰다.
“헤일!”
세상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일어나셨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응응! 헤일도 잘 잤어?”
반가움에 통통 뛰며 헤일을 향해 몸을 돌리자, 그런 나를 빤히 보던 아리나가 내 손에 들려 있던 유리잔을 낚아채듯 빼앗아 갔다.
“아!”
아리나의 손톱에 손등이 살짝 긁힐 정도로, 거칠게 가져가는 그녀의 행동에 놀라 고개를 들자, 어색하게 웃은 그녀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괜찮으세요? 제가 방금 전에 한 말은 농담이었어요. 아시죠?”
“…….”
자기만 재미있으면 농담인가.
그리고 저 스산한 눈은 절대 농담하는 눈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떼어 버려야겠어.’
본관으로 온 이상, 헤일만 내 측근 시녀로 올리면 아리나와 린지는 굳이 곁에 둘 필요가 없었다. 앞동은 벨리아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고, 무엇보다 반년만 버티면 오네로 갈 테니까.
‘얼른 베넷한테 말해야지.’
베넷은 그 날 동쪽 별관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이었으니, 말하기 더 수월할 거다.
“불쾌해,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농담은 삼가 줘.”
해서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몸을 돌려 헤일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젖혔다.
“헤일 나 오눌 리리네 가.”
“들었습니다.”
웃는 헤일의 말에 나갔다가 경매장에 들러서 물건을 사야 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같이 가.”
“……예? 아기씨 제가 아니고요?”
헤일을 향한 말에 발끈한 아리나가 몸을 돌렸다.
당연히 자기랑 같이 갈 줄 알았다는 말투였다.
“저랑 가세요. 아기씨.”
아니, 쟤가 진짜 왜 저래?
마치 자기가 말만 하면 다 들어야 한다는 듯 매우 고압적이었다.
“싫어.”
“아기씨.”
하지만 그런 내 말이 단순히 투정을 부리는 것으로 느껴졌던지, 아리나가 당황한 눈동자를 감추질 못하고 나를 빤히 보았다.
뭔가 일이나 계획이 틀어져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지금 뭐라고.”
“아리나랑 안 가고, 헤일이랑 갈 거야.”
“헤일은 하우스키퍼라 아기씨를 모실 자격이…….”
“있어, 내 맘이야.”
다시금 너랑 안 간다는 걸 확인시켜 주곤 헤일을 향해 몸을 돌렸다.
“씻을래! 오늘 엄청엄청, 어엄청 재미있을 거 같아!”
흥분에 온몸이 쿵쾅쿵쾅 뛰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