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29)화 (29/141)

29화

그 시각.

“레티시아가 포틀런 백작가에?”

아침에서야 엘린에게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벨리아가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챈들러와 제이슨은?”

“듣기론 리리아나 아가씨께서 레티시아 님만 초대를 하셨다고 합니다. 해서, 아기씨만 가신다고…….”

“하!”

벨리아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짓자, 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헬렌이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백작 부인께서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시네요. 역시 수를 잘 읽으시는 건가.”

그녀의 말에 벨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동서가 생각해도 그렇지?”

“그렇죠. 리리아나가 어떤 앤데요.”

“그치?”

벨리아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여우 같은 것.’

평소에 챈들러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만, 마고가 본관 앞동으로 불러들였다는 말만으로도 태도를 달리한 게 괘씸했다.

‘뭐, 그렇게 하면 아버님께서 뭘 더 챙겨 주실 줄 알고 그러는 모양인데, 하, 내가 있는 한 어림도 없는 소리지.’

안드레아가 가주가 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벨리아가 이를 바득 갈았다. 그 모습에 헬렌이 웃으며 찻잔에 따뜻한 차를 채워 따랐다.

“그 아이는 우리 아이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걸 받아 낸 것뿐인데, 위상이 많이 달라지네요.”

별관에 있을 때만 해도 포틀런 백작가는커녕, 집 밖을 나가는 것도 어려운 아이였다.

직계도 방계도 아닌 위치.

애매한 그 어딘가에 놓여 있던 샤리에의 딸이 마고의 말 한마디로 신분 상승을 해 버렸다.

“샤리에 님처럼 말이죠.”

대수롭지 않은 듯 찻잔을 드는 헬렌의 말에 벨리아가 눈을 사납게 떴다.

고작 사생아에 불과했던 샤리에가 순식간에 자기 남편의 자리를 위협하던 그 날을 벨리아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사생아가 제게 주어졌던 후계의 자격을 완전히 포기하고 가문을 나가던 순간까지.

벨리아와 안드레아는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았으니까.

그때 하루하루 미쳐 가는 것처럼 망가지던 안드레아의 모습을 떠올리자, 목구멍을 타고 왈칵 신물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동서, 말조심해야겠어.”

톡 쏘아붙이곤 고개를 돌려 버리는 벨리아의 옆얼굴에 헬렌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

“아무래도 레티시아가 샤리에 님과 달리 욕심이 많아 보여서, 저도 모르게……, 실언했네요. 조심할게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헬렌이 흘끗 벨리아를 보며 푸념처럼 말을 이었다.

“솔직히 괘씸해서 말이에요.”

“…….”

“지금도 당연히 형님께 와서 나가도 되느냐 외출 허락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굳이 아버님께 말씀드리는 거 보세요.”

심기를 슬쩍 건드리는 듯한 헬렌의 말에 벨리아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미쉘만 생각하느라, 그 부분을 떠올리지 못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당연히 제게 와야 할 일을 건너뛰는 행태가 괘씸하긴 했다.

‘감히.’

그리고 그런 벨리아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흘끗 보며 헬렌이 속상하다는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무래도 여간내기가 아닌 것처럼 보여서 걱정이에요.”

“…….”

“형님의 첫째인 레오야 워낙 탄탄하니 걱정 없지만, 우리 제이슨은……. 레티시아가 만에 하나 오네로 가서 이대로 2년을 채우고 돌아오면 설 곳이 사라지잖아요.”

제이슨뿐만이 아니지.

챈들러도 오네에서 2년을 채우질 못했다.

그건 직계로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걸 의미함과 동시에 레티시아에게 뒤처진다는 의미가 아닌가.

헬렌의 말에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린 벨리아가 가볍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탕!

“레티시아 따위가 누구 앞길을 막는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

“형님.”

하지만 그런 벨리아를 보며 헬렌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미쉘이 레티시아를 챙기기 시작했어요.”

“…….”

“그게 무슨 의미겠어요.”

“…….”

“아버님께서 레티시아를 이용해서 가문의 일부를 샤리에에게 주려는 포석 아니겠어요? 거기다 레티시아에게 이능이 있다잖아요.”

헬렌의 말이 이어질수록 벨리아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이능력.

‘내 남편이 그것 때문에 평생을 어떻게 살았는데!’

사생아 주제에 고작 이능력자라는 이유로 가문을 들썩이게 만들고, 제 남편의 앞날을 번번이 방해한 것이 샤리에였다.

그 사생아 때문에 그야말로 평생 그 아래에 짓눌려 기 한번 피고 산 적이 없었는데.

그걸 제 자식들이 겪게끔 할 수는 없었다.

‘절대.’

어금니를 꽉 깨무는 벨리아의 모습에 헬렌이 고개를 들었다.

“싹은 애당초 밟아 놓아야 했다던, 돌아가신 어머님 말씀 기억하시죠?”

샤리에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한이었다던 에시어 공작 부인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동요하는 얼굴에 헬렌이 엷은 웃음을 참듯 입 안의 여린 살을 씹었다.

“걱정이 되어서요.”

“지금.”

눈꼬리를 내리는 헬렌과 달리, 미간을 좁힌 벨리아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남편은 물론이고, 내 아들들도 밀려나게 될 수도 있다는 거야?”

벨리아의 날 선 물음에 헬렌이 난감한 듯 딴청을 피우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의 이능력이 사실이라면요.”

“…….”

헬렌이 벨리아의 마음에 미움의 씨앗을 심었다.

“2대에 걸쳐 나온 이능력자.”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물과 비료까지 뿌려 주면서 말이다.

“그게 아버님께 어떤 의미일까요.”

“…….”

“잘, 생각해 보세요. 형님.”

* * *

하지만 그런 숙모들의 어두운 속내들은 알 길 없이, 난 매우 해맑게 백작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시원하고, 온몸에 닿는 햇살과 덜컹거리는 마차의 움직임까지 전부 좋았다.

“행복해 보이세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내 모습에 마주 앉아 있던 헤일이 작게 웃었다.

흥이 오른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게 느껴졌다.

“응, 좋아.”

그게 오늘 경매장에 가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리리아나네 집에 난생처음 가는 것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가는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전부 다지!’

솔직하게 감정을 인정하고 나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리리아나네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신나게 놀다 경매장에서 물건까지 사서 돌아오면.

‘완벽해.’

행복, 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봐도 좋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돌아가는 길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최대한 자연스럽게 ‘오네의 뒷골목에 있는 경매장이 있는데, 나 거기 잠깐 들러서 물건 좀 사 올게.’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스럽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가슴이 간질간질할 정도로 행복했다.

하.지.만!

“오랜만이구나, 레티시아.”

내 행복에 미쉘 고모를 만나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요.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리자마자, 리리아나의 손을 잡고 선 미쉘 고모의 모습이라니.

역시 완벽한 행복은 없는 건가.

“고모님.”

금발에 푸른 눈. 서늘하리만큼 흰 피부에 냉랭한 표정.

한눈에 보아도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미쉘 포틀런 백작 부인은 딱 할아버지가 여자였다면 이랬을 것처럼 꼭 닮아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입매가 살짝 아래로 내려가 불만이 가득한 것처럼 무서워 보이는 것까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할아버지의 성격을 빼다 박았다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듣던 사람이 미쉘 고모였었다.

수완도 좋아 명망은 있으나, 재정적으로 풍요롭지 않았던 포틀런 백작가를 테파로아 귀족 내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유한 가문으로 만들었으니.

‘말 다한 거지.’

윌리엄 포틀런 백작보다도 가문 내 가장 중요한 사람이 미쉘 고모라고 했었다.

그건 아마 이번 생에서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어쩜 다른 숙부들이랑 이렇게 다를까.’

할아버지의 유전자가 모두 고모에게 간 듯한 그 아우라에 생긋 웃었다.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뵈어요.”

그러곤 최대한 예의바르게 치맛자락을 살짝 들며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미쉘 고모도 예법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내 예법이야 나무랄 데 없지.

“그래, 너도 좋아 보이는구나. 레티시아.”

내 인사를 빤히 보던 미쉘이 이내 별다른 지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고모다운 대꾸였다.

할아버지랑 똑같아.

이 냉랭함이 나를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본래 말투가 그런 것이라는 점까지.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엷게 웃자, 리리아나가 미쉘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엄마, 얼른요. 얼른 나 레샤 집 소개시켜 줄래요.”

어린 딸의 투정에 흐릿하게 웃은 고모가 그제야 리리아나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렴.”

“감사해요 고모님.”

“고모면 충분해.”

딱딱한 호칭을 정정한 미쉘이 몸을 돌리려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점심 같이 하자꾸나.”

‘아.’

흠.

점심을 같이 먹는 건, 불편한데.

물론 고모가 악의를 갖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고모 앞에서 식사를 하면 잘 안 넘어갈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방법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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