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레티시아는?”
벨리아의 물음에 엘린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막 귀가하셔서, 주무시는 중입니다.”
“벌써?”
“네, 피곤하셨는지, 잠든 상태로 헤일에게 안겨 들어오신 모양입니다.”
“요 몇 주 내내 나가 노느라 정신이 나가 있더만. 쯧.”
벨리아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 나가 봐.”
“마부의 보고는.”
“뭐 별거 있었대?”
“아뇨. 헤일의 집에 잠깐 들렀다 온 거 말고는 없다고 합니다.”
“그럼 됐어.”
피곤하다는 듯 벨리아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나가 봐.”
“…….”
솔직히 엘린은 레티시아의 마차가 헤일의 집에 들렀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잠깐이라고 해도 뭔 짓을 하려면 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와는 달리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벨리아에게 괜한 확신이나 증거도 없이 말을 꺼냈다간, 어떤 소리를 들을지 뻔했기에-
“예, 부인.”
그대로 아무 말 않고, 몸을 돌렸다.
저녁에라도 제가 마부에게 한 번 더 체크하고 난 뒤에 말을 해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말이다.
“뭐?”
마부를 찾아가 전후 사정을 묻던 엘린이 이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것이…….”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턱을 긁적긁적거리던 마부가 엘린의 눈초리에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지가 일이 있어서 쿤트한테 오늘만 좀 바꿔 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바꿔 주더만요.”
술 냄새를 짙게 풍기는 마부의 말에 엘린의 얼굴이 점점 알 수 없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름 첩자 노릇을 열심히 해 온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어, 길게 숨을 내쉬곤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헤일의 집에 들렀다 온 건 어떻게 안 거야. 쿤트가 말해 준 거야?”
“예.”
“하아.”
이마를 짚은 채 몸을 돌렸다.
이렇게 되면 헤일의 집에 대체 몇 분이나 머무른 건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더 오래 있었다고 해도.
“근데 걱정 안 하셔도 되는 것이, 그 사람이 다른 짓을 할 리…….”
“그럼 자네는 다른 짓을 할 사람이라, 하는 거야?”
“그건.”
엘린의 톡 쏘아붙이는 말에 입을 다문 마부가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술에 취해 풀린 눈동자가 썩은 생선 눈깔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이걸 어쩐다.’
대충 넘겼다가 벨리아가 알게 되면, 정말 크게 난리가 날 수도 있음이었다.
거기다-
‘잠들어서 안겨 들어왔다고 했지?’
그건 하녀들의 말이었으니, 아마도 사실일 거다.
한데 왜 자꾸 그 사실이 거슬릴까.
‘만에 하나라도 바꿔치기를 해서 들어온 거라면?’
잔다는 말에 벌써? 라고 반응을 한 벨리아처럼 그녀가 생각해도 너무 초저녁부터 잠이 깊게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약을 먹여서 그런가?’
부작용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아무래도 가서 레티시아를 확인해 봐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불안해.’
벨리아 님의 말대로 그 사생아와 레티시아가 만나서 뭔가 일을 꾸미게 된다면, 뒷동의 직계들뿐만 아니라 저 역시 끈 떨어진 연 신세였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제가 이 자리를 어떻게 차지했는데.
벨리아의 곁에서만 십수 년을 버틴 결과였다.
이제 막 편안해지려 하는데, 그걸 방해하게 둘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된 이상, 벨리아의 가족과 저는 같은 운명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들의 흥망성쇠가 저와 직결되는 이상, 움직여야 하는 건 저였다.
“알겠어.”
그러곤 빠르게 앞동, 레티시아의 처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마주한 건 헤일이었다.
‘헤일은 있고.’
마치 문 앞을 지키듯 선 헤일을 향해 걸어간 엘린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벨리아 님께서 아기씨를 좀 뵈고 오라셔서.”
“주무시는데요.”
“얼굴만 보고 갈게. 벨리아 님께서 아침에 잠깐 어지러워하셨다는 보고를 들으시고 너무 걱정을 하시네.”
엘린이 뻔뻔스럽게 말하며 문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신지, 얼굴이라도 보고 말씀을 드려야 안심을 하실 거 같아.”
“…….”
“돌아오셨을 때도 안겨 들어오셨다며.”
“그건 피곤하셔서.”
“그러니까. 몸이 안 좋으신 거잖아. 내가 확인을 좀…….”
하지만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는 엘린을 막아선 헤일이 고개를 저었다.
“주무시니, 내일 오세요.”
‘안에 누가 있구나.’
아니면 무슨 일이 있거나.
‘혹은 아무도 없거나.’
어찌 되었든 이상한 헤일의 대응에 엘린이 보란 듯이 문고리를 조금 더 꽉 틀어쥐었다.
“내쫓기고 싶어?”
“…….”
“감히 누굴 막는 거야!”
짓눌린 목소리로 화를 내는 엘린의 표정에 헤일이 얼굴을 굳혔다.
어쩐지 입매가 뒤틀리는 것 같기도 하고, 평상시 헤일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에 엘린이 미간을 좁혔다.
이 정도로 했으면 물러서야 하는데?
그런 낌새라고는 없이 되레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헤일의 날 선 시선에 엘린이 고개를 들자-
“밖에 누구햐?”
방 안쪽에서 레티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아주 잠깐 당황하긴 했으나-
“아, 아기씨. 저 엘린입니다. 벨리아 님께서 아기씨를 좀 뵙고 오라셔서요.”
“엘린이구나. 들어와.”
안쪽에서 들린 레티시아의 허락에서야 헤일이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던 문고리에서 손을 풀었고, 엘린은 의기양양하게 문고리를 아래로 내렸다.
“무슨 일이햐?”
한밤중에 촛불도 키지 않은 어두운 사위를 두리번거리는 제 시선을 잡아끄는 목소리에 엘린이 고개를 돌렸다.
“아, 아침에 아기씨께서 쓰러지실 뻔했다는 이야기에 벨리아 님께서 놀라셨어요.”
“아, 나 괜찮운데.”
“초를 좀 킬까요?”
“잠을 아예 깨우려구?”
레티시아의 말에 초를 찾으려 살짝 돌렸던 몸을 바로 했다.
뭔가 평소답지 않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레티시아가 이렇게 나와 버리면 어찌할 도리가 저도 없긴 했다.
‘레티시아는 맞는 거겠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은 것도 같고.
헤일의 반응도 이상하고.
이래저래 뭔가 감이 좋지 않았다.
‘레티시아가 아닌 거 아니야?’
만약에 그런 거라면.
문제가 크지.
6살밖에 안 된 아이가 영악하게 사람을 따돌리고,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에 대한 문제가 불거질 테니까.
그러면 앞동으로 입성한 것도 무산되고, 쫓겨나게 될지도.
‘거기다 이능이 있다고는 하는데 제대로 발현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니.’
이능력자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들을 단 하나도 못한다는 소문에 더해 ‘가주님께 잘 보이려고 거짓말하신 거 아니야?’라는 말까지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나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레티시아가 다른 짓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고, 심지어는 거짓말까지 하며 사람들 따돌리고 있다는 걸 가주님께서 알게 되시면-
‘큰일이네.’
비죽비죽 올라올 것 같은 웃음에 혀를 깨물었다.
벨리아 님께 무얼 달라 해야 하나,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엘린이 어깨를 잔뜩 늘어트리며 “아휴-.”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가 크게 아프신 건 아니구요?”
“웅.”
“제가 어디 좀 보…….”
“괜찮아.”
하지만 괜찮다는 레티시아의 말을 무시하듯 손을 뻗으며 침대 쪽으로 걸어가자, 제 예상과는 달리 베개에 폭 파묻힌 채 레티시아의 푸른 눈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잔뜩 잠에 취한 얼굴이었다.
“이게.”
확신을 하고 있었던지, 예상과 다른 눈앞의 상황에 엘린이 입술을 살짝 말아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눈을 깜박이다 얼굴을 찌푸린 레티시아가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잠옷을 입고는 흐트러진 머리를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자다 깬 레티시아의 모습을 아래위로 살피던 엘린이 고개를 들자 레티시아가 설렁줄을 당겼다.
“아, 아기씨.”
그 종소리에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듯, 엘린이 고개를 들었다만, 이미 상황은 늦은 뒤였다.
“혹시라도 아기씨 몸이 안 좋으시면 어쩌나 제가 마음이 앞서다 보니, 송구합니다. 아기씨.”
엘린이 납작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엘린의 곁에 있는 하녀장, 코벳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송구하다는 얼굴이었으나, 딱히 문제 될 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이 시간에 끌려온 것이 조금 짜증스럽기도 해 보였다.
“모두 엘린이 아기씨의 안위를 염려해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코벳의 말에 헤일이 발끈해 앞으로 나오려다, 이내 옷자락을 당기는 내 손길에 발끝을 꾹 누르는 게 보였다.
콧숨을 훙 하고 내쉬는 헤일의 굳어진 표정에 잔뜩 지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알겠어. 하녀장이 이렇게까지 말하눈데. 그럴게.”
“감사해요.”
“그리구 둘째 숙모님께 앞으로 내 걱정은 안 해두 된다구 말씀드려 줘.”
“……예, 아기씨.”
떨떠름한 얼굴의 엘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 역시, 그 얼굴에 마주 웃어 주었다.
“나 졸려.”
그러곤 축객령을 내렸다.
“다들 나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