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하지만-
“됐어.”
리안은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 호의를 내팽개친 채, 바닥에 떨어진 동화 한 닢을 주워 몸을 일으키는 그 미련한 고집에-
“되긴 뭐가 돼.”
벌떡 일어나 물과 붕대를 들고 그와의 안전거리를 깨트리고 다가섰다.
쳇.
그와의 첫 만남에 안전거리는 그가 깨고 다가오게 만들려고 했었는데.
‘그게 그를 편안하게 할 테니까.’
근데 다 망했네.
아무래도 그가 나를 싫어하게 된다는 설정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있어야 여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길 테니까.
나는 소설 내에서 그런 설정을 안겨 주는 조연일 뿐이니.
눈앞의 리안을 보며, 붕대와 물동이를 움켜쥐었다.
나를 좋아할 수 없다면.
‘더더욱 단검을 사서 돌아가야지.’
그게 나의 유일한 구명보트가 될 테니까.
다시금 열의를 불태우며, 그의 가까이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아주 지척까지 붙어 앉아서는 귀족 놈들이 잘근잘근 밟아 놓은 손을 잡았다.
“놔.”
하지만 역시나 내 손을 뿌리치는 그의 움직임에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서 더 힘주면 너 아파. 그러니까 힘 빼.”
“…….”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는 내 말에 리안의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잔뜩 경계하는 어린 짐승 같은 눈동자. 거기다 내가 잡지 않은 나머지 손 안에 든 동전을 조금 더 꽉 틀어쥔 그의 작은 손등이 어쩐지 애처로워 보였다.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그 경계심에-
“지금은 내가 힘으로 하면 너 이겨. 그러니까 얼른 손 줘.”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러곤 물동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천 조각을 적셔 아이의 손등을 콕콕 두드리며 흙먼지 같은 이물질들을 닦아 냈다.
‘미친놈들.’
아예 손을 못 쓰게 만들 작정이었던 거야?
손등의 여린 살이 뭉개질 정도로 짓이겨 놓아 벌어지고 찢겨진 상처는 흙을 닦아 내자 더 엉망이었다.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쓰라리고 아플 것 같은 상처에 “후.” 하고 속 답답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오네에서의 삶이 이런 거였지.
문득 스치는 지진으로 천장이 무너져 죽기 전을 떠올리며 입 안의 여린 살을 씹었다.
힘없는 사람은 짓밟고, 힘 있는 사람에게는 아부하는, 어린아이들은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여기는.
귀족들의 세계와 비슷한 듯 다른 세상.
어디가 더 비참하고, 더 처참한지는 모르겠으나.
“미련하게 왜 맞고 있어. 도망이라도 가지.”
리안의 모습을 보자니 화가 났다.
내 과거가 떠올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남아야만 하는 주인공의 서사가 짜증 나서.
‘행복할 수도 있는거잖아.’
아버지의 존재조차 모르고 이렇게 힘들게 살다가 엄마 죽고서야 내가 네 아비다, 하고는 나타난 황제 아버지. 그리고 호시탐탐 나를 죽이려 하는 배다른 형제들. 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미친 서사, 개연성.’
소설이라고는 해도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했다.
그냥 글줄 몇 자, 한 문장, 문단, 챕터. 이렇게 글자 몇 개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이렇게 무너져 버린 느낌에 고개를 들자 리안이 나를 빤히 보았다. 정확히는 찡그린 내 미간을.
마치 ‘네가 왜 화를 내는 건데?’라고 말을 하는 듯한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말……, 아니 네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데.”
고개를 내저으며 말문을 닫으려다 왈칵 치미는 감정에 고개를 들었다.
“맞고 다니지 마. 못 때리겠으면 차라리 도망가.”
“…….”
내 말에 흘끗 주먹 쥔 손을 내려다보는 리안의 시선에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망할.”
“!”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리안의 시선에-
“모!”
턱 끝을 살짝 올려 들곤 이내 고개를 숙여, 호호 상처를 불어 가며 젖은 천으로 피딱지를 닦아 냈다.
얼른 리안이 이능력이 발현되어야지.
그래야, 덜 맞고 사……, 아니 그렇게 되면 때리면 때렸지 맞지는 않겠지.
거기다 그의 이능에는 검기뿐만 아니라, 자가 치유도 있었으니까.
그가 가진 검기처럼 아주 고급은 아니어도 작은 상처 정도는 쉽게 치유할 수 있었던 그의 이능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자-
“…….”
그가 나를 빤히 보았다.
처음 상처 입은 짐승마냥 경계하던 것은 살짝 누그러진 듯한 표정에 펠을 돌아보았다.
“약초 가루 줘.”
“예.”
조심스레 건네는 작은 주머니에 담긴 약초 가루를 깨끗해진 손등에 솔솔 뿌리자-
“으.”
내내 잘 참아 내던 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아무래도 많이 쓰라렸던 모양이었다.
“그래두 이거 뿌리면 상처는 빨리 나을 거야.”
그러곤 붕대로 손등을 둘둘 감쌌다.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금 엉성하고 손이 두 배 정도 커진 듯 엉망이었으나.
“나중에 저기 베니아 지역에 메디 의원을 찾아가. 거기 폴이라고 의사가 있는데, 그 사람한테 가면 약도 주고, 네 상처도 봐 줄 거야.”
“…….”
하지만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 이야기를 해서라도 가라고 하고 싶지만 극강의 자제력으로 말을 꾹 삼켜 넘겼다.
‘괜히 그런 이야기를 해서 경계심을 키울 필요는 없지.’
“꼭 가.”
대신 한 번 더 강조하며 그의 몸을 손으로 가리켰다.
“뼈 다쳤을 수도 있어. 난 그건 못 보니까.”
“…….”
“폴한테 꼭 가.”
꼴을 보니 안 가겠네.
“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고집불통.
어쩜 이렇게 성격이 똑같나 싶을 정로도 답답스러운 그를 보며, 주머니를 뒤졌다.
‘금화는 안 받을 거고.’
닥닥 긁어 나온 돈 중에서 은화 두 개를 찾아 그의 손, 아니 손이라고 불렸던 붕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게 미미하게나마 호감을 보이던 아이의 시선이 이내 사납게 불거지는 게 보였다.
“이걸로 의사…….”
“나 거지 아니야. 갖고 꺼져.”
이 새끼, 말본새 하고는 진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 홱 집어 던지는 그의 성질머리에 은화 두 개가 달그락거리며 바닥을 뱅글 구르다 내 발끝에 엎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같이 성질내며 한 대 쥐어박기라도 했겠지만,
“거지라서 주는 거 아니야.”
지금 나는 20살의 이성을 가진 어른이지 않은가. 해서 최대한 차분히 몸을 굽혀 은화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다시 그의 붕대 위에 올려놓았다.
“너 지금 아프잖아. 그러니까 빌려주는 거야.”
“…….”
“나중에 만나면 그때 갚아.”
“개소리하지 마.”
‘이걸.’
후.
그래, 리안의 입장에선 말도 안 된다는 소리겠지.
나를 또 언제 만날 수 있겠느냐, 고 그냥 자신을 달래려고 하는 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난 이 은화 두 개의 빚을 아주 톡톡히 받아 낼 작정이라, 그가 반드시 받아 주었으면 싶었다. 이런 음흉한 속셈을 가진 난 이번 생은 반드시 잘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으니까.
“진짜야.”
“…….”
“아마 넌 나에게 내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갚을 수 있을 거야. 난 믿어.”
그를 빤히 보며, 그의 손가락을 감싸듯 구부려 은화 두 닢을 쥐어 주었다.
“그러니까 받아.”
제발 받고, 나중에 나 좀 잘 봐줘.
‘죽이지 말고.’
차마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 입을 꾹 다문 채 그냥 리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곤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좀 넘어가자는 듯, 그리고-
“아기씨.”
나도 얼른 가야했다.
그러니 이대로 좀 끝내자.
“나중에 꼭 돌려줘. 안녕, 나 가야 해.”
그러곤 손을 놓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름.”
뒤에서 내내 사납게 굴던 리안이 목소리를 내어 내 이름을 물으며 고개를 들었다.
* * *
‘난 리안이야.’
경매장으로 향하는 걸음 내내 리안의 목소리가 귀를 웽웽 울리는 것 같았다.
먼저 이름을 말해 줄 거라고는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어쩐지 뒤통수를 뎅 하고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고작 이런 것에 그럴 건가? 라고 누군가 말할지 모르겠으나, 과거 그와의 악연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했다. 과거의 리안은 자기 이름을 내게 알려 주려 하지 않았다.
정확히 그때의 그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내가 너무 집요하고 또 지겹게도 붙어서 이름이 뭐냐고 물었던 게 화근이었던 거 같았다.
그때의 난,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진상이었지.’
끔찍하게도 그를 따라다녔던 순간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어쩌면 리안이를 괴롭힌 만큼 많이 좋아했었던 거 같기도 했다. 문제는 그 좋아하는 걸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게 그와 나의 가장 불행이었던 것뿐.
“휴.”
이번엔 잘해야지.
일단 리안이에게 이름을 들었으니까.
그걸로 1차 방어선은 뚫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만남은 그걸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음에 감사하며 두 번째 방어선을 위해 고개를 들었다.
“여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