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39)화 (39/141)

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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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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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이 좁은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밤이라 그런지 더 허름하고 음침해 보이는 그 벽 사이에 마른침을 꼴깍 삼키자, 돌벽에 기대서 있던 남자들이 건들거리며 몸을 돌렸다.

“뭐.”

그러곤 나와 펠을 아래위로 훑어보곤 캬악- 소리를 내며 침을 뱉었다.

‘웩 드러워.’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후드에 가려져 고개를 아주 많이 젖혀야지만 사내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닌 펠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중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데? 여기는 곱상한 아가씨가 애 달고 올 곳이 아닌디?”

저택으로 돌아갈 때에 맞추기 위해, 제법 깨끗하고 말끔한 옷을 입고 있는 펠이 하급 귀족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눈을 아래위로 홉뜬 채, 골목을 몸을 막듯이 선 그가 펠의 앞에 섰다.

“옷가게는 저기 저짝 아래여.”

하지만-

“경매장 왔어.”

턱짓을 하는 남자의 말에 대꾸한 건, 나였다.

“그러니까 비켜.”

“……뭐?”

그리고 남자 역시, 펠이 아닌 아래쪽에서 들린 내 목소리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살 거 있어서 왔으니까, 비키라구.”

“하, 이 쪼꼬만 게.”

말이 짧은 게 기분이 상했던지, 손끝으로 이마를 쿡 눌러 찌르려는 남자의 손에 고개를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물건 파는 데에 물건 사러 온 게 잘못이야?”

“돈은 있…….”

잘그락거리는 주머니를 열어 보여 주었다.

금화 서른 개 정도가 들어 있는 주머니에 나와 펠을 한 번씩 번갈아 본 그가 살짝 앞으로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됐지?”

“뭐.”

돈만 있으면, 딱히 어린애를 막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들어가쇼.”

몸을 틀어 길을 내주었다.

손까지 앞으로 뻗어 안내하는 남자의 모습에 당당히 주머니 입구를 꽉 조인 채, 걸어 들어가자 픽 하고 웃은 그가 내 뒤를 쫓았다.

“뭐, 귀족 나으리들 현장 학습 이런 겁니까?”

“아냐.”

“그럼, 그 에시어 그 얼빠진 놈들처럼 가문을 물려받기 위한 관문?”

‘에시어 그 얼빠진 놈들?’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 거슬리는 말에 멈추어 고개를 홱 돌렸다.

“모?”

“모르쇼? 에시어 놈들이 뭐 귀족입네 하고는 오네에 와서 평민들의 삶을 배우네 어쩌네 하면서 주변 사람들 드럽게 귀찮게 하는 거?”

‘그거라면 잘, 알지.’

귀족 아닌 척하고 나와야 하는데, 나 너무 완전 진짜 찐 에시어 직계임. 하고는 나와서 사람들 잔뜩 괴롭히고는 들어가는 거.

“뭐 다 그런 건 아니라고는 하는데……, 아무튼 그런 거 말고는 뭐요?”

“알 거 없써.”

“싸가지 하고는.”

“말조심하시지.”

펠이 눈살을 찌푸리자, 남자가 알겠다는 듯 입을 삐죽이곤 경매장 문을 열었다.

벽처럼 생겼는데.

신기하게 문처럼 열리는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자, 밖의 고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져 있었다.

약간 시끌벅적한 것도 같고.

탕탕- 타앙!

“낙찰!”

소란스러운 그 분위기와 혼탁한 공기에 숨을 몰아쉬었다.

‘얼른 하고는 나가야지.’

일단은 그 단검이 나왔는지부터.

해서 고개를 휘휘 저으며 여기 직원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아기씨.”

“레샤라구 해. 들키묜 안 대.”

“아.”

검지를 입에 대고는 작게 속삭이는 내 말에 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레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일하는 사람.”

“물건 나왔나 확인하시려구요?”

이 자매는 쌍둥이라 그런지, 눈치가 아주 백단이네.

“웅.”

“제가 물어보고 올게요. 여기 잠깐 계세요.”

“알게써.”

최대한 사람이 없는 쪽 벽에 나를 세워 두고는 인파 사이로 사라진 펠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직사각형의 공간 사이를 두터운 벽으로 갈라 놓은 이 경매장은 내가 바라보는 쪽을 기준으로 왼쪽은 물건을, 오른쪽은 노예들을 거래하고 있었다.

이시아의 21세기 가치관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고, 레티시아의 지금 이 세계의 가치관으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인.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불편함에-

‘차라리 보질 말자.’

고개를 돌리려는 그 순간.

“자, 오늘 여러분께 이 귀한 물건들을 소개할 수 있어 어찌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가슴팍에 모자를 대고 과장스럽게 고개를 숙인 남자 뒤로 쇠사슬에 묶인 남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대략 8살에서 14살의 나이. 고작해야 그 정도로밖에는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국적은 매우 다양해 보였다.

흰 피부에 은발도 있었고, 검은 피부에 흑발도 있었다. 적당히 그을린 얼굴에 검은 머리칼, 금발도 있었다. 구릿빛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그을린 몸에 적발도 있…….

‘적발?’

순간, 스치는 기억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성인들 사이에 꼬꼬마인 내 눈에 보이는 건 고작해야 무대 위에 선 이들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뿐이었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

폴짝폴짝 후드가 벗겨질 정도로 콩콩 뛰어 보아도, 어디에 올라가지 않고서는 앞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의자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돌리자,

“도와주랴?”

웬 남자, 아니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만큼이나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보이는 아이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칼을 부스스하게 털어 넘긴 아이의 갈색 눈동자에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

“저 앞에 궁금한 거 아니야?”

그건 그런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었다.

적발이 그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소설 속에서 읽었던 서사와 비슷해서 잠깐 그 사람이 아닐까, 생각을 한 거였다.

노예 경매장, 투니아에서 넘어온 이민족, 구릿빛 피부, 적발. 뛰어난 검술,

이 모든 것이 리안의 최측근 호위가 되는 쟈이든을 설명하는 단어들이었다.

그리고-

‘끔찍한 노예 시절.’

남자아이를 사들여 성적인 학대를 일삼던 귀족에게 팔려 간 쟈이든은 1년여 동안 햇빛 한번 보지 못한 채 매일 밤을 고통 속에 발버둥 쳐야만 했다.

‘이 소설은 남자 등장인물에 대한 서사가 너무 가혹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물론 그러다 끝내 목숨 걸고 탈출에 성공해 리안을 만나게 된다만.

“괜찮아?”

리안이 제집 앞에 쓰러진 쟈이든을 집으로 끌고 들어가, 숨겨 주고 치료까지 해 주며 서로 가까워진다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그 1년이 너무 끔찍하질 않나.

고작 12살밖에 안 된 어린애가 감당하기에 너무 가혹한 그 설정에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이야.’

그 고통이 숨겨진 이능을 발견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악몽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는 건-

‘가혹해.’

이시아 시절,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를 정말 살벌하게도 욕을 했던 걸 떠올리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기…… 아니, 레샤.”

나를 어색하게 부른 펠이 갈 때와 똑같이 인파를 헤치고 다가왔다.

“아직 단검은 나오지 않았대요. 아마도 지금 나오는 방패 끝나고 다음, 다음 번쯤에나 나올 거라고 하네요.”

“잘됐다.”

혹시라도 넘어갔을까 봐 걱정했는데.

‘운이 좋네.’

펠을 향해 싱긋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어?”

내내 나를 도와주겠다던 그 검은 머리 남자아이에게 괜찮다고 말을 하려 한 건데.

사라졌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아이의 모습을 찾으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인파 속으로 들어가 버린 건지, 아니면 여길 떠난 건지 아이는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희한하네, 또 꿈꾼 건가.’

며칠 전 돼지 인형도 그렇고 뭔가에 홀린 것만 같은 일들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펠이 가깝게 다가섰다.

“왜요? 뭐 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아니야, 아무것도.”

또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걸까, 걱정이 잔뜩 들어찬 펠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잘못 본 거 같아.”

하지만-

“자, 이번 물건은 투니아에서 제가 직접 공수해 온 이민족 아입니다. 나이는 열둘!”

아빠의 물건을 기다리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오른쪽 노예 시장에서 내 기억 속 아이와 꼭 맞는 설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이 맨질맨질한 구릿빛 피부에 적발을 보십시오. 거기다 이 근질! 이 왼쪽 팔뚝에 이 문신도 보십시오, 멋지지 않습니까? 이, 뭐라고 쓴 거야.”

“…….”

하지만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꾹 입을 다물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사내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아이의 머리를 툭툭 밀었다.

“뭐라고?”

그 모습에 그 앞에 모인 사람들이 웃음소리를 냈다.

“다들 미쳤어.”

눈을 질끈 감자-

“다시 묻지. 뭐라고 쓴 거야.”

사내가 숨을 몰아쉬며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대답을 안 하…….”

“캬투나.”

“뭐?”

전쟁의 신.

“전쟁의 신.”

제가 떠올렸던 단어와 똑같이 말을 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진짜, 쟈이든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맞아떨어져 가는 이 상황에 대해 확인을 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키는 작았기에 밟고 올라갈 걸 찾아야 했다.

‘의자, 의자.’

의자나 나무 상자 따위를 찾으려 고개를 휘휘 돌리자, 언제 있었는지 모르게 옆에 놓인 의자가 보였다. 바로 옆에 놓인 걸 찾지 못했던 건가 싶은 생각을 하며 끙차- 의자를 밟고 올라갔다. 까치발을 조금 해야 했으나, 무대를 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고개, 고개 조금만.’

발끝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자, 적색이 짙은 머리칼에 구릿빛 피부.

그리고 드러난 상반신 왼쪽 팔을 덮어 버린 문신과 앞을 노려보는 갈색 눈동자.

‘너 진짜 좀 꺼져라. 주인님 좀 그만 괴롭히고.’

‘차라리 나랑 놀아.’

리안의 옆에 들러붙으면 떼어 내고, 내게 윽박지르던……. 때리는 거 빼고 리안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걸 다 했던 쟈이든.

그 사납고, 반항적인 눈동자.

진짜 쟈이든이야.

아직 고통에 침잠되지 않고, 악몽을 꾸지 않는.

12살 쟈이든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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