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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42)화 (42/141)

42화

그리고 끝내 할아버지가 에시어를 안드레아에게 물려주시려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시일을 최대한 뒤로 늦추는 것뿐이었다.

내가 오네에 다녀와서 데뷔탕트를 치르고, 성년식을 하는 그 날까지.

그래야 내가 기반을 제대로 다질 수 있을 테니까.

그 사이에 아빠 문제도 해결하고, 돈도 좀 모아 놓고.

그러려면 오네에 가서도 사용할 기본 자금이 필요하긴 한데.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걸 위해서라도 벨리아 숙모 쪽을 해결해야…….’

내 앞으로 되어 있는 개인 재산을 관리하는 건, 벨리아 숙모였으니까.

아빠는 1년에 한 번 오는 게 고작일 정도로 멀리 있었고, 어찌 되었든 수도 저택에서 지내는 나를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책임지고 있는 건 둘째 숙부 부부였다.

물론 며칠 전 일로 할아버지의 의심은 샀으나, 여전히 내 것을 쓰기 위해서는 벨리아 숙모를 거쳐야 했다.

내 개인 계좌부터, 아빠가 황제한테 하사받아 내게 주셨던 땅. 보석, 모두.

‘레샤는 어리니까, 숙모가 잘 관리했다 어른이 되면 돌려줄게.’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들어왔지만, 전생의 나는 쫓겨나는 그 순간까지 내 앞으로 된 재산을 본 적이 없었다. 내 재산은 에시어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아빠의 것이었고 내 것인데.

난 죽기 전까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추측컨대 이미 다 빼돌렸거나, 죄다 써 버려 내게 돌려줄 게 남아 있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다음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나를 쫓아낼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걸 돌려줄 생각 자체를 안 했겠지.’

그러니 이번 생에서는 할아버지가 멀쩡하실 때 손 떼게 만들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아리나랑 린지가 필요한데.’

내 옆에서 포도주스 들고 알짱거리는 아리나나 그런 아리나가 미워 죽겠는 린지의 신경전을 내버려 둔 것도 이 때를 위해서였다.

아리나와 린지가 둘 다 벨리아의 사람인 듯 보이지만-

‘린지는 아니거든.’

아마도 아리나와 엘린, 그리고 그 뒤의 벨리아의 뒤통수를 거하게 칠 건 바로 린지가 될 거였다.

‘전생에서도 그랬으니까.’

어쨌든 그 판만 제대로 깔아 주면 되는데.

물론 베넷에게 도움을 청하면 쉽겠으나, 이런 일에 베넷 자유 이용권을 사용하는 건 아깝지 않은가.

그는 조금 더 귀하게 써야지.

그리고 그가 개입하지 않아야 아리나를 효과적으로 쫓아내고, 더불어 벨리아 숙모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벨리아 숙모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야지만 그녀가 나를 관리하는 것부터 집안 살림에 대한 권한 일부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될 테니까.

최대한 크게 문제를 일으켜야 해.

‘내 미래가 편하려면.’

흐음.

턱 끝을 톡톡 두드리며 커다란 1인용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돈 문제는 너무 쉽고.’

그건 큰 문제에 곁다리로 더해 자잘한 타격을 주기 위함이지 그걸 단독으로 터트리기에는 너무 하찮은 문제였다.

할아버지도 그 정도는 다 알고 계실 거야.

물론 아리나는 쫓겨나겠지만, 벨리아 숙모는 그냥 조금 혼나고 말겠지.

며칠 전 나를 몰아붙였던 일처럼.

‘그럼, 뭐가 좋을까.’

내가 알고 있는 아리나와 린지의 수많은 약점들을 떠올리며 머릿속을 빠르게 굴렸다.

하지만-

“아기씨?”

그런 나를 방해하는 아리나의 등장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휴.”

하지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에도 생글생글 웃은 아리나가 유리병 가득 주스를 들고 들어왔다.

“우리 아기씨가 좋아하는 포도주스으.”

왜 저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를 정도로 좋아 보이는 기분에 눈을 가늘게 뜨자, 아리나가 웃으며, 콘솔 위에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적포도네.

청포도가 싫다고 했더니, 적포도를 주스로 갈아 온 아리나의 끈질김에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오늘은 더 달콤할 거예요. 제가 특별히 신경 써서 갈아 왔거든요.”

“저기 둬, 이따 마실게.”

“지금 드세요.”

얘 또 이러네.

요즘 들어 강요가 자꾸 느는 그녀의 행동에 미간을 좁혔다.

찡그리는 얼굴에 살짝 아차 싶었던지, 아리나가 다급히 생긋 웃었다.

“제가 열심히 갈아 온 건데요. 피곤하실 때 한 잔 마시면 얼마나 달고 좋은데요.”

“후.”

말을 말자.

이런 걸로 말씨름하고 싶지 않아, 맘대로 하라는 듯 손사래를 치자 아리나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흠흠흠.”

콧노래까지?

하지만 느긋하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것과는 달리 유리잔을 꺼내 드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그답지 않은 행동에 미간을 살짝 좁히자, 아리나가 흘끗 내 쪽을 살피는 게 보였다. 아주 흘끗거리는 그녀의 시선이 내 위치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급히 유리잔 속에 뭔가를 쪼록 따라 넣곤 급히 포도주스를 콸콸 따르는 게 보였다.

그러곤 긴 스푼으로 휘휘 저으며 몸을 돌렸다.

“이거 드시면 기운이 좀 나실 거예요.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몰라요.”

쟤 주스에 뭐 탔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아리나의 행동에 그녀가 주는 걸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안 마셔. 아리나 마셔.”

고개를 저으며 눈을 다시 이불에 코를 박았다.

하지만 아리나 역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다정히 웃으며 유리잔을 들이밀었다.

“건강에 좋아요.”

“싫어.”

“얼른요.”

강요에 가까울 정도로 집요하게 구는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돌리자, 아리나가 생긋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그 이상한 행동에 더더욱 의구심이 굳어졌다.

‘진짜 뭐 탔구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확신에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

하지만 아리나에게는 지금 내 표정도 시선도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 듯했다.

대체 뭘 넣었길래?

설마, 나 죽이려는 건가?

‘왜?’

순간 스치는 생각에 굳어진 얼굴 그대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가 나를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요 며칠 내가 그녀를 홀대한 일 때문에 내게 살의를 품기에는 너무 하찮지 않은가.

그러니 최소한 독살은 아닐 거다.

그리고 지금 나를 죽여서 아리나가 얻는 이득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 곁에 바짝 붙어 있어야 득이 되지.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 본관에서 살게 된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그 사람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만 내다 팔아도 수입이 쏠쏠할 텐데, 굳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이유가 없었다.

‘그럼 대체 저기에 뭘 탄 거지?’

그간의 포도주스들이 다 의심스러웠다.

“싫어.”

해서 입을 막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내 모습에 어깨를 늘어트린 아리나가 내내 웃고 있던 얼굴에 경련이 인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아기씨, 요즘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으시는 거죠? 자꾸 이러시면 샤리에 님께서 곤란해지신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

“건강히 잘 지내시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죠. 자, 어서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이제는 아빠까지 끌어들여 나를 옭아매려는 아리나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분명 뭔가 있는데.’

독은 아니겠으나, 나를 해칠 물건은 분명했다.

“싫어.”

해서 일단은 피해 볼 목적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급히 침대로 도망가 베개 아래에 손을 넣었다. 아빠의 단검. 그걸로 뭘 할 수는 없겠으나 일단은 그걸 손에 움켜쥔 채 베개에 얼굴을 깊게 파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에 거칠게 콧숨을 내쉰 아리나가 침대 가까이로 다가와 내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아야!”

얼마나 억세게 쥐었던지 아리아가 끼고 있던 반지가 손목뼈에 콱 하고 눌렸다.

“아기씨, 정말!”

계속 거부하면 이대로라면 강제로라도 먹일 기세로 억지로 일으키는 힘에 눈을 크게 떴다.

우악스럽게 잡힌 손목이 꼬집힌 것처럼 아팠다.

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여린 살이 눌리는 고통에 고개를 들었다.

“아파!”

“아기씨!”

아프다는 내 말에도 팔이 빠질 정도로 잡아 흔들어 대는 아리나의 힘에 고개를 들었다.

소매 끝까지 내려온 내 옷 위로 움켜쥔 그녀의 손에 잡힌 손이 희게 변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날 원장실로 아이를 끌고 들어가던 원장의 얼굴처럼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는 아리나의 모습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그녀가 내게 위협을 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시아의 기억이 몸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 보아도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절망감이 온몸을 내리누르는 것만 같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놔, 놔줘.”

버둥거릴수록 더욱 꽉 옭아매는 그녀의 손아귀의 힘에 벌벌 떨리는 입술을 말아 문 채 고개를 들자-

“좋은 말로 할 때는 왜 듣지를 않는지.”

‘말로 하니까 내가 우스워 보이니?’

원장의 얼굴과 겹쳐 보이는 아리나의 이죽거림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리나는 원장이 아니야.’

그리고 여기도 고아원이 아니었다.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공간이 아니었다.

문만 열면,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

린지만 있어도 돼.

그러면 아리나를 끝이었다.

계속해서 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곤-

“자, 주스.”

“으아아앙!”

이내 크게 울어 버렸다.

본관의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최대한 크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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