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아파, 아파아. 놔아!”
내 울음에 순간 당황한 듯 아리나가 유리잔을 협탁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고는 내 입을 다급히 막았다. 유리잔을 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로 다른 억센 손길에 고개를 저으며 버둥거렸다.
“아기씨!”
내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고는 뒤통수를 고정해 앞뒤로 입을 막는 아리나의 커다란 손에 순간 코까지 눌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얘 진짜 미쳤구나.’
공포를 걷어 내니, 그녀의 미친 짓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지금 눈앞의 뭔가에 씌여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상태인 듯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여긴 동쪽의 외딴 별관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별관에선 내가 이렇게 버둥거려 봐야 나를 보러 올 사람이 린지나 헤일 말고는 아무도 없었지만 여긴 아니었다.
수십 명의 사용인들이 오가는 곳이었고, 바로 위층의 저 끝으로만 가면 할아버지가 계셨다.
창문이 열려 있지 않아, 할아버지께 바로 들리지는 않겠지만 할아버지가 알게 되시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내 울음소리에 언제든, 누구든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아리나는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 얼굴을 막는 손에 힘이 실리다 못해, 나를 향해 왈칵 화를 낸 아리나가 내 몸을 거칠게 흔들며 내려다보았다.
“조용히 하세요!”
그래, 저 탁한 눈동자.
장난이라고 넘겼었지만, 분명 이상하게 굴었던 그 날의 눈동자와 꼭 닮아 있었다.
그럼 며칠 전 속이 이상했던 것도.
‘아기씨, 주스요.’
현관의 포치까지 다급히 뛰어 내려와 주스를 건네던 아리나를 떠올리며, 시선을 올렸다.
그래, 지금 생각해 보면 아침 내내 좋았던 컨디션이 그녀가 준 주스를 마시고부터 엉망이 됐었다.
마신 직후에는 몸이 크게 휘청일 정도로 어지러웠고,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속도 많이 불편했다. 백작가에서 나왔을 때는 기운이 너무 없어 보여서 헤일이 다음에 가자고 말을 할 정도였었으니까.
‘저 주스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해.’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리나는 지금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직감적인 위험 신호에 방금 전보다 더 발을 동동 구르며 온몸을 뒤틀며 소리를 질렀다.
“놔아! 놔!”
“아기, 아기씨!”
“놓으라구!”
진정될 기미가 전혀 없어 보이는 극악스러운 울음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아리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대로 내가 발광하게 두었다가는 저택 사람들이 죄다 뛰어 들어오겠다 싶었던지 내 몸에 닿아 있던 손을 뗀 그녀가 한 발 물러섰다.
“알겠어요, 알겠어요. 아기씨. 저리 치울게요.”
일단은 나를 달래려는 듯 양손을 올려 드는 아리나의 말에도 난 우는 걸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내 예상대로 울음소리에 놀란 사용인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기씨!”
“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 우세요?!”
중년의 사용인들이었다.
모두 할아버지의 방을 담당하는 3층 하녀들이었고, 벨리아와는 접점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 얼굴들에 그제야 소리 내 울던 것을 멈추곤 입술을 깨물었다.
“나, 나 헤일, 헤일 불러 줘.”
헤일이라는 이름을 입으로 뱉어 낸 순간 밀려드는 안도에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빠아.”
그리고 동시에 아빠가 보고 싶었다.
“아빠 보고 싶어어.”
나를 이 나쁜 것들 사이에서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울 아빠 말이다.
* * *
헤일이 들어오고서야 훌쩍훌쩍 울던 것을 가라앉힌 채 그녀의 옷자락을 애처롭게 움켜쥐었다.
“죄송해요, 아기씨. 제가 곁을 비우질 않았어야 했는데.”
우는 내 뺨의 눈물을 닦아 주며, 헤일이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
그 모습에 괜찮다고 말을 해 줘야 하는데, 많이 지친 건지. 아니면 정말 공포에 떨었던 건지, 어른의 이성이 아니라 어린 몸에 깃들어 있던 설움이 차올라 진정이 되질 않았다.
훌쩍훌쩍.
깊게 들이마신 숨을 부르르 떨며, 울음을 삼켰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어도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은 그칠 수가 없었다.
턱 끝에 맺혀 끊임없이 뚝뚝 흐르는 눈물에 여전히 놀란 사용인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아리나를 흘끗 댔다.
그 불편한 공기에-
“아리나.”
셋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의 하녀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아리나를 돌아보았다.
“아기씨가 왜 이렇게 우시는 거야? 그리고 측근 하녀인 네가 무섭다는 말은 뭐고.”
그 말을 시작으로 방에 들어온 하녀 세 명이 죄다 아리나를 돌아보았다.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울기 시작하셔서.”
하지만 정말이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아니라가 고개를 저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거 같은데. 전부 제 탓이죠.”
그 충실한 하녀의 얼굴로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이 내 변덕스러움 때문이라고 말을 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 말에는 내가 사실을 말할 걱정 따위, 아니 내가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어 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 난 이 집안에서 그런 존재였으니까.
고작 베넷, 고작 헤일이 몇 번 내 역성을 들어 줬지만 그게 내 지금까지의 평판을 뒤집어엎을 만한 건 아니었으니까.
이능력이 있으면 뭐 할까.
그래 봐야 천덕꾸러기, 사생아 샤리에의 딸일 뿐인데.
본관 앞동으로 온 것도 가주님의 변덕일 뿐, 은퇴 선언을 한 그가 장원으로 돌아가고 나면 원상 복귀될 것이라 예상하는 이들도 많았다.
‘예전이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상황이 달랐다.
난 여기서 한 발짝도 벗어날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기씨, 죄송해요. 화 푸세요.”
가증스러운 얼굴로 나를 향해 몸을 돌린 아리나가 슬쩍 협탁 위에 올려놓은 포도주스를 몸으로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저걸 보고는 또 발작하듯 울기 시작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엎어 버리려나?’
아무래도 그게 깔끔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숙였던 고개를 든 아리나는 내 예상과 달리 그걸 내 눈앞에서 가릴 뿐 없애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뭐지?’
돌아온 이성에 코를 훌쩍였다.
저기에 뭔가를 타는 걸 내가 분명 봤고, 저걸 내가 문제 삼기 시작하면 곤란해질 텐데도 증거를 내버려 두고 있었다.
‘왜?’
아리나가 바보가 아니고선 대체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거지? 하고 고개를 든 순간, 그녀가 잠시 휴가를 나갔다 왔음이 떠올랐다.
‘새로 사 왔구나.’
그리고 아주 고가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까워서 깨트리지 못하는 거였다. 거기다 내가 문제를 삼으면 그냥 주스일 뿐이라고 우기면 그뿐일 테니까.
굳이 저걸 깨트릴 이유가 없는 거였다.
어렵게 구해서 들어온 거니까, 나중에 뒀다가 먹이면 될 거라고.
대체 뭘까.
뭘 탔기에.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나를 보며 송구해 죽겠다는 얼굴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푸는 아리나의 표정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액체, 주스에 섞지만 독은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정리하며 그녀를 빤히 보자, 문득 소설 속 한 장면과 더불어 전생의 기억 한 자락이 떠올랐다.
‘한여름 밤의 꿈.’
마력석을 가공해 만든 혼몽액을 사랑의 묘약이라고 만들어 팔던 자들.
이 약을 먹으면, 약을 먹인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말만 믿게 되고 그 사람만 보게 만들 수 있다던 마력제였다.
일시적인 부작용은 숙취처럼 머리가 조금 아프고 속이 미식거리는 정도고, 약만 끊으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만든다 해서 사람들은 약 이름을 한여름 밤의 꿈이라 불렀었다.
‘주로 신맛이 강한 음료에 섞어서 다른 맛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했지.’
‘그래서.’
그제야 아리나가 굳이 건더기도 많고, 색도 탁한 포도주스를 건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약을 먹여서 세뇌시키려고 한 거구나.
나를 이용해야 돈벌이가 될 테니까.
남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 같은 것들도 털어놓게 만들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조종도 해야 했겠지.
‘하.’
순간 제가 마셨던 몇 번의 포도주스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날 제게 미친 소리를 했던 것도, 그 약을 먹이고 시험을 해 보려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음료 뒤쪽으로 씁쓸한 맛을 느낀 건 사실이었으나, 이후 그녀에게 세뇌 당해 움직인 건 없었다.
‘말을 한 건 더더욱 없고.’
그랬으니 아리나가 저렇게 애닳아하는 걸 거다.
약을 몇 번이나 먹였는데도 약효가 없었으니까.
내게 기억 소실이 있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리나는 알고 있었을까.
처음에는 미미한 부작용뿐이라던 저 약을 만들어 판 일당들이 잡혀 들어가 끝내 사형까지 선고된 이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