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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44)화 (44/141)

44화

바로 저 약을 먹었던 이들이 원인 불명으로 하나둘씩 죽어 나갔고, 죽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생겨났기 때문이었음을.

‘그래, 아직은 모르겠지.’

암암리에 거래되며 소문만 무성하던 저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뒤늦게 황자가 된 리안이 저 약을 만들어 판 일당들을 잡아들인 게 그의 나이 13살 무렵이었으니까.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사생아였던 황자 리안, 아니 칼리안이 황제와 제국민들에게 정식으로 눈도장을 찍게 되는 계기가 바로 이 한여름 밤의 꿈, 사건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뒤의 일.

그러니 몰랐겠지.

‘아니, 반드시 몰랐어야 해.’

만약 이런 부작용 때문에 내가 위험해질 걸 알고서도 한 일이라면, 정말, 정말로 용서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나마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그래도 가장 내 곁에 오래 있었던 하녀의 마지막을 내 손으로 끊게 만들지는 않아 주길 바랐다.

하지만 제 사과에도 내가 아무 말 없이 저와 협탁을 번갈아 보자 다급해진 아리나가 슬쩍 뒤로 물러나 중년의 하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요즘 아기씨가 조금 이상해지신 거 같지 않아요?”

아리나의 은근한 목소리에 나를 빤히 보고 있던 하녀가 아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가?”

“이상한 소리를 자주 하신다니까요? 전보다 더 안하무인이라 너무 힘들어요.”

안하무인이라는 말을 슬쩍 잇새로 눌러 조용히 속삭이는 아리나의 말이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너무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역시.’

역시나 기대를 전혀 저버리지 않는 아리나였다.

이 상황에서조차 나를 매도하며 자신의 결백을 이야기할 줄이야.

저렇게 이야기하면 지금 상황도 이상한 짓을 한 나를 아리나가 말리려다 벌어진 일밖에는 되질 않으니까. 되도 않는 온정을 베풀려고 했던 마음이 싹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 이래야, 아리나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그런 그녀가 하나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내가 별관의 레티시아가 아니라는 거.’

내 위상이 에시어 내에서 조금 올라갔고, 심지어는 할아버지의 시야에 들어와 있다는 걸 간과한 듯했다.

‘잘됐지 뭐. 타이밍만 재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잘 이용하면 내게 유리해질 거라는 확신을 가진 채 중년의 하녀를 올려다보았다.

최소한 그녀는 아리나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신 내 그렁그렁 눈물 맺힌 표정에는 안쓰러워 죽겠다는 얼굴이었고.

“유주아.”

“예, 아기씨.”

“나 아리나 싫어. 자꾸만 아프게 해. 그래서 무서워.”

“……예?”

“세상에 아기씨!”

순간, 아프게 한다는 내 말에 놀란 듯 사용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리나를 향했다.

“대체 무슨 말을. 이거 보세요,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하신다니까요?”

역시나 저렇게 나올 줄 알았지.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유주아 앞으로 걸어갔다.

“아리나가 아프게 했어.”

그러곤 유주아에게 잘 보이게끔 팔을 걷어 올렸다.

“여기랑 여기.”

방금 전 아리나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느라 잡았던 손목에 붉은 손자국이 명확하게 나 있었다. 그리고 팔꿈치 아래를 다 채우는 손자국은 누가 봐도 어른의 것이었다.

그뿐인가.

“요기두.”

반대편 소매도 올렸다.

다 나아 가느라 노란 것부터,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짙은 갈색의 것들로 뒤엉켜 있는 내 양쪽 손목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란 아리나가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아기씨 대체 왜 그러세요. 제가 언제 그랬다구요. 이것 보세요. 아기씨가 이상하시다니까요?”

주변을 선동하듯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되레 그녀를 나무라듯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서서히 현실감이 돌아온 듯, 아리나가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 보려는 것 같은데.

‘지금은 어렵지.’

당사자가 여기 있는데, 거짓말로 속이는 건 한계가 있지 않겠나.

하지만 아리나는 그런 한계를 극복하는 아이였다.

“이건. 헤일도…….”

여기서 헤일을 끌어들일 줄이야.

대단한데?

하지만 아리나가 빠져나갈 구석은 없었다.

“헤일은 반지 없어. 그리고 헤일 손이 아리나보다 커.”

그렇게 말하곤 헤일의 손을 가져와 아리나와 맞대었다.

손바닥이 넓은 헤일의 손과 바닥이 좁고, 손가락이 긴 아리나의 손은 명확히 달랐다.

거기다 가장 중요한 건 아리나의 가운뎃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저 반지.

그 반지는 아리나가 여간해선 빼놓지 않는 것이라, 이것까지 헤일에게 뒤집어씌우기는 어려웠다. 어떤 말을 해도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전부 그녀가 했다는 게 너무 명백한 증거들이었다.

“더 할 말이 남아 있어?”

“…….”

아니라는 말은 못하고, 고개만 젓는 아리나를 경멸하듯 바라보던 유주아가 나와 아리나의 사이를 갈라 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리나는 여전히 뻔뻔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고 있었다.

“전 아니…….”

그 모습에 소매를 팔꿈치 위로 끝까지 올렸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내 왼쪽 팔에 가져다 댔다.

노랗게 변해 가는 멍 자국.

회귀했음을 알게 되었던 그 날,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던 아귀힘이 조금 세다 했더니,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버렸다.

반지 자국까지 몽땅.

그 명확한 증거를 눈으로 샅샅이 살피는 사용인들의 시선이 느리게 아리나를 향했다.

해명을 하라는 듯한 사용인들의 시선에 마른침을 꼴깍 삼킨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아기씨 손목이 붉은 건 지금 제가 한 것이지만 다른 건 모르는 일이에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급격히 불안해하는 아리나의 표정에 유주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리나…….”

“예, 아기씨께서 저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일부러 이러시는 겁니다. 전부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아기씨께서 제가 별관에 조금 소홀히 했던 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계셨……. 아니, 이것도 헤일 네가 아기씨께 주스를 먹여서…….”

“주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주스에 대해 언급하던 아리나가 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난 주스는 아예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작정이었는데.

‘바보네 아리나.’

솔직히 ‘이 한여름 밤의 꿈’ 사건은 애당초 리안의 서사에 꼭 필요한 이야기 중의 하나라, 묻어 두려 했었다. 난 곁다리로 책을 읽고 알게 된 것뿐이고, 심지어 당장 저 주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밝혀내는 건 내 능력 밖이었으니까.

하지만 리안은 검기 이외에 다른 이능도 있었고, 이 상황을 돕는 다른 조연들도 존재했었다.

‘이름이…….’

케일럽이었나.

‘대장, 이 살인자 새끼 눈깔이 좀 이상한데요?’

소설에 서술되었던 사건을 요약하자면,

리안이 살해당할 뻔한 사람을 구해 주는데, 그 살인자를 방위대에 넘기는 과정에서 그의 측근인 케일럽이 그 살인자가 뭔가에 중독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걸 해독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걸로 이 사건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게 초반 극 진행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넘겨야지. 했는데-

자기 입으로 고백을 해 버리다니.

“쯧.”

이렇게 되면 죄가 하나 더 늘어나질 않나.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아리나의 바보 같음에 속으로 혀를 가볍게 찼다.

“주스를 먹였다니. 아리나 그게 무슨 소리야?”

“요즘 도는 소문 못 들어 보셨어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약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헤일이 아기씨께 그걸 먹인 것 같아요.”

“뭐어?”

‘아이고.’

이마를 짚고 싶은 걸 누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리나가 제가 한 짓을 헤일에게 덮어씌울 작정인 건 알고 있었다.

한데 이런 식으로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사용해 버리면, 역습을 당할 위험이 크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그게 아니고는 아기씨가 이상해지신 걸 설명할 수가 없어요.”

아니, 내가 언제 이상해졌는데?

그것부터가 이상한 소리였는데도 아리나는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헤일이 내 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자신이 하려던 걸 더 먼저 해서 그런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듯했다.

그런 게 아니면 제가 쓰려던 약이 안 통할 리 없다고 말이다.

“음식은 린지랑 아리나만 담당하잖아. 헤일은 하우스키퍼라 빨래만 했을 텐데? 무슨 수로.”

“주말에 아기씨를 모시고 포틀런 백작가에 자주 나가셨는데 그때에…….”

“난 포틀런 백작가에서 주는 것만 먹었는데?”

“마차에서.”

“마차에선 속 불편해서 아무것도 안 먹잖아.”

고개를 갸웃했다.

“몰랐어?”

“그게.”

측근 하녀가 되어 그 정도도 모르냐는 듯한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잠깐 착각했어요.”

이제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었다.

대체 어디까지 나락으로 내려갈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자, 그녀의 뒤쪽으로 유리잔이 보였다.

‘역시.’

똑같구나.

“군데, 아리나.”

“네?”

부름에 즉각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선에 손가락으로 그 너머를 가리켰다.

“저 주스는 색이 왜 저렇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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