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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46)화 (46/141)

46화

영문도 모른 채 서쪽 별채로 호출된 엘린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가주님의 부관이라고는 하나, 벨리아 님을 모시는 저를 이렇게 오라 가라 하는 것이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단 부르는 이가 워낙에 다급했기에 저도 하던 일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온 참이었다.

거기다 앞동에서 지금 막 큰 소란이 있었다고도 하고.

‘근데 내용을 알 수가 없으니.’

혀를 쯧 하고 찬 엘린이 고개를 들어 현관 앞에 섰다.

“베넷 님을 뵈러 왔네만.”

“아, 전해 받았습니다. 3층으로 바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문을 열어 주며 안쪽으로 안내하는 시종을 향해 고개를 까딱한 그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솔직히 말해, 서쪽 별채는 같은 에시어 저택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행정관들이 주로 사용하는 곳이라 그런지,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이랄까, 귀족 특유의 멋도 전혀 느껴지질 않고.

올 때마다 답답함에 숨이 탁 하고 막히는 것만 같았다.

거기다 이렇게 층층마다 막아서는 것도 기분 나쁘고.

“무슨 일로.”

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또다시 막는 남자의 말에 엘린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대체 불러 놓고는 몇 번을 막는 건지.

하지만 베넷은 벨리아 님도 한 수 접어 주는 가주님의 최측근이었으니.

밉보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베넷 님을…….”

“아, 전해 받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베넷의 이름에 극진해지는 사내의 태도에 기분 나빴던 걸 조금 누그러트린 엘린이 턱을 살짝 올려 든 채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콧대를 한껏 올려 들고 있던 엘린의 오만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르…… 아리나?”

“엘린 님!”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기가 무섭게 눈앞에 보이는 아리나의 상태에 엘린이 벌린 입을 꾹 다물었다. 2급 하녀인 아리나가 주인도 아닌, 주인의 부관 앞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까.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듯 그녀가 혀를 깨물었다.

앞동에서 벌어진 사고가.

‘설마.’

그 물건을 들킨 건가 싶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일로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보이는 광경이 매우 불쾌하군요. 내 주인이 벨리아 님이신 걸 잊으신…….”

“잊지 않았습니다.”

“한데 어찌 이렇게 함부로…….”

“대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떻게 그대도 꿇을 텐가?”

베넷이 엘린을 돌아보며, 작은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유리병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본 엘린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듯 고개를 들었다.

“…….”

그 마치 시위하듯 날 선 시선에 베넷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나가 레티시아 님을 해치려는 수작질을 하다 걸렸는데, 이에 그대도 얽혀 있다는 소리를 해서 말이야.”.

“미쳤군요.”

“엘린 님!”

“제가 대체 왜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저와 하등 아무 관련이 없…….”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뱉은 엘린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베넷이 작은 마도구를 꺼내 내려놓았다.

“이게 있다면?”

그러곤 마법사의 손끝을 빌려 살짝 움직이자-

“아기씨 이능이요. 아니 그 종류요.”

“알아 올 수 있다고?”

“네.”

“설마, 그걸 쓰려는 거야?”

“네, 용량을 늘리려고요.”

“이번이 마지막이야. 더는 없어.”

“예.”

“그리고 만약에 들키더라도.”

“그, 그만!”

저 쥐새끼 같은 것.

엘린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아리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리나는 그런 제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베넷을 향해 항변 중이었다.

“이, 이것 보십시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라니까요? 제가 오죽 무서웠으면 이 비싼 마도구까지…….”

“거기까지.”

“부관님!”

“그런다고 그대의 처벌이 달라지진 않아. 다만 우리 손이 아니라, 정식 재판으로 넘겨 주는 것 정도일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에겐 거의 신의 은총이나 마찬가지였다.

마고 에시어의 입에서 나온 영영 치워 버리라는 말이 나온 사람치고 멀쩡히 정문을 걸어 나간 이는 없었으니까. 죽거나 실려 나가거나.

둘 중 하나지만, 그나마 이 마도구 덕분에 걸어 나가 죽게 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정식 재판에 넘겨지면 최소한 고문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이제는 볼일 없어진 그녀에게서 시선을 잘라 낸 베넷이 엘린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나 딱 잡아떼며 고개를 저었다.

“난 모르는 일이에요.”

“그대의 목소리가 아닌가?”

“내 목소리는 맞지만, 아. 음식에 조미료를 넣겠다고 했던 그 대화였던 거 같은데, 요즘 일이 하도 많아서 그런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하긴 저 대화 속에 직접적으로 그 마력액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니까.

‘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평소에 조심성이 많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군요.”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열어 마도구를 챙겨 넣었다.

“협조 감사합니다.”

“끝난 건가요?”

“네.”

고작 이딴 걸 보여 주고 물어보려고 그리 다급히 부른 건가 황당한 엘린이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베넷은 이런 걸 보여 주고, 들려주고, 이딴 게 더 있다는 걸 일러 주기 위해서 부른 것이었다.

목적을 충실히 다 수행한 그가 엘린을 빤히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아, 하나 빠트린 것이 있네요.”

“…….”

마치 지금 막 생각이 났다는 듯, 아차차 소리까지 내며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린 베넷이 엘린의 지척까지 걸어갔다. 그러곤 몸을 살짝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아기씨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안드레아 님 내외분의 신상에 좋을 겁니다.”

“…….”

“물론 이 문제에 벨리아 님까지 얽혔다고 생각은 않겠습니다만. 가주님께서 이번 일로 아기씨를 주시하신다는 걸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베넷의 날 선 경고였다.

그리고 그 경고에 엘린이 빳빳하게 세운 목을 겨우 끄덕였다.

“자, 그럼 나중에 뵙죠.”

베넷이 웃으며, 문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가라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 * *

“그래서.”

“아기씨는 지금 해독 중이시고, 아리나는 서쪽 별관으로 끌려간 모양이에요. 아, 엘린 하녀님도.”

“엘린까지?”

하, 하고 가볍게 웃은 헬린이 이내,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끈이 다 떨어져 버렸네?”

“아마도 당분간 벨리아 님 쪽 사람들은 앞동에 얼씬도 못 하시지 싶어요.”

“다행이네.”

헬렌이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금보다 더 귀한 설탕까지 아주 듬뿍 넣어, 달고 고소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지는 게 이게 돈의 맛이구나 싶었다.

“너도 마시렴. 맛있구나.”

“네, 감사합니다.”

헬렌의 권유에 잔을 든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꼴깍꼴깍 우유를 삼켜 넘기는 걸 보며 헬렌이 작게 웃었다.

“동생들이 있다고 했나? 좀 더 챙겨 줄 테니 가져가서 맛도 보여 주고.”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내 성의란다. 이번에 일을 아주 잘해 주었어.”

헬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었다.

거기다 우유 옆에 놓인 작은 자루.

“수고비 조금 넣어 놓았으니, 동생들 챙기는 데 쓰렴.”

“가, 감사합니다.”

헬렌이 제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드는 하녀의 정수리에 작게 웃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염려 놓으세요.”

돈주머니에 눈을 번들거리며 빛낸 하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역시, 이게 돈의 힘이지.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선의나 신의는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돈은 아니었다.

돈만 있으면, 선의도 신의도 모두 다 사들일 수 있었다.

지금도 돈주머니 하나에 저리 믿음직스럽게 눈을 빛내질 않은가.

‘돈 이외엔 믿을 게 없지.’

헬렌이 코끝에 닿는 이 자본의 짙은 향을 느끼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질 그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했다.

안드레아는 저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고, 벨리아 역시 가주님의 신임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 사이를 저와 제 남편이 채우는 건 쉬운 문제였다.

단,

샤리에 에시어라는 변수만 사라지면.

물론 그가 스스로 후계를 내려놓고 전방으로 가 고생을 자처하고 있으나, 또 사람 욕심이라는 건 모르는 게 아닌가.

특히 레티시아는 제 아비와는 달라 보였다.

하지만-

‘오네에 있는 하녀의 집에 잠시 들렀는데, 아주 잠시였습니다.’

‘샤리에 에시어의 흔적도 없었고요.’

‘뭔가를 했다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주말마다 나가는 레티시아의 곁에 붙여 놓았던 용병들의 보고에도 이상은 없어 보였다.

차라리 샤리에가 있는 전방으로 사람을 붙이는 게 더 나으려나.

아니면 눈앞에서 둘 다 사라지는 것도.

나쁜 수는 아니었다.

샤리에는 전장에 있었고, 레티시아는 너무 어렸으니까.

기회를 봐야겠어.

헬렌이 웃으며, 눈앞에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하녀를 돌아보았다.

“아, 이만 돌아가 봐야지. 내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구나.”

“그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녀가 엉덩이를 떼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우유와 돈주머니를 챙겨 들어올 때처럼 아주 조용히 방을 벗어났다.

“믿을 수 있을까요?”

그 사라지는 뒷모습에 헬렌의 하녀가 다가섰다.

“내가 사람 믿는 거 봤니. 돈을 믿는 거지.”

헬렌이 느른히 콧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의 팔이 하나가 날아가 버렸어.”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

오늘 밤은 아주 푹 잠들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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