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47)화 (47/141)

47화

린지와 헤일은 두 사람 다 2급 하녀가 되었다.

처음에는 린지는 그냥 두고, 헤일만 2급으로 올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해서 적을 늘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린지야 오네에 데리고 가지 않으면 그만이었고, 무엇보다 사용인들에게 상벌의 개념을 알려 주는 것도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그 날 아리나를 쫓아내는 데 린지가 활약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였겠으나.’

해서 이 상황은 아리나가 가문에서 쫓겨나 귀족 시해 죄로 법정에 세워지는 걸로 마무리가 되었다.

물론 린지는 헤일이 자기와 동급이 된 것을 썩 반겨 하진 않는 것 같았지만. 이내 2급 하녀로서 제가 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의 대부분을 헤일이 담당해 주니 그건 그대로 좋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내 처소는 평화를 찾았다.

아리나가 쫓겨나고 3명의 3급 하녀가 추가로 들어왔고, 헤일이 담당하던 하우스키퍼 일은 앞동을 담당하는 하녀들이 같이 처리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아, 그리고 내게도 호위가 생겼다.

“가주님의 명령도 있었지만, 오네에 가실 때에 어차피 호위 둘은 데려가셔야 하니, 차라리 일찍이 곁에 두고 익숙해지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호위를 두는 건 싫다고 할 줄 알았던지, 콕 집어 할아버지와 오네를 언급하는 베넷을 향해 우우 하고 입을 내밀었다.

며칠 전 일 때문에 그런 거 같은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호위에 대해서는 에시어의 역사에도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으니까.

[오네로 가는 후계들은 유모 혹은 하녀 한 명과 호위 둘, 가정교사 한 명을 대동하여야 한다.]

명시된 걸 따르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보다 넘치게 해서 문제지 줄여서 문제였던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 저게 최소한이라는 거였다.

‘하긴.’

고작 7살인 어린 직계들이 오네에서 살게 되었을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들의 안위였으니까.

호위가 따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베넷의 말처럼 차라리 일찍이 면을 익혀 익숙해지는 게 나은 거 같기도 했다.

해서 받아들였는데…….

“엘론입니다.”

“피어스입니다.”

두 명의 호위 중 한 사람은 20대 초반처럼 보였고, 다른 한 명은 어린 티를 이제 막 벗은 듯 아주 앳되어 보였다.

근데-

‘두 사람 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특히나 저 앳된 호위는 아주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한 번 본 얼굴은 아니었다.

만난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 아주 익숙한 생김새에 피어스라 자신을 소개한 이를 돌아보았다.

“우리 어디서 봐써써?”

“처음 저택에 와서 뵙고는 처음일 겁니다. 그때 계단에서 마주쳤던…….”

“아, 말랐던 애!”

“누가 누구 보고 애래.”

픽- 하고 삐뚤어지게 말한 피어스가 미간을 좁혔다.

맞네.

“몇 살인데.”

“열셋입니다.”

“오빠네.”

“…….”

헤헤 웃으며 오빠라 부르자, 그 단어에 괜히 얼굴을 단단히 굳힌 피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이 나쁜 건지, 아니면 좋아서 그러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억지로 끌려온 건가?

고개를 갸웃하자, 베넷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소외받고 있는 엘론도.

“엘론 오빠두 반가워.”

“어유! 전 아닙니다! 그냥 엘론이라고 불러 주시면 충분합니다. 오빠라뇨! 하핫.”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엘론의 벌개진 얼굴에 배시시 웃었다.

그런 내 모습을 멍하니 보던 엘론이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나는 봤지, 내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머리 한번 쓰다듬어 보고 싶어서 움찔대는 손도.

나중에 만져 보라고 해야지.

또다시 귀까지 발갛게 달아오를 엘론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어스를 보았다.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보다가도 이내 경계하며 살피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낯익었다.

‘그 날 본 게 전부가 아닌데.’

턱 끝을 톡톡 두드리다 문득, 그가 처음 왔다던 날을 떠올렸다.

계단 아래위에 마주 섰던…….

‘그럼 올가가 왔던 그 날인데.’

만약 그런 거라면 입단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고작해야 두 달 남짓.

근데 벌써 누군가의 호위를 맡을 정도로 뛰어난 건가?

고개를 돌려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봐도 전생이나, 소설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키는 작고, 몸을 말라 힘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거기다 검은 머리카락은 그때보다는 나아 보였지만 여전히 부스스했으니까.

‘아, 맞다 마검사라고 했지.’

딱 보아도 내가 지켜 줘야겠다, 싶게끔 생긴 피어스의 얇은 몸을 빤히 보다 그의 손등에 난 상처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몸에 자잘하게 상처가 많이 보였다.

얼굴도.

치유사가 급히 손을 쓴 것 같은 상흔이 아직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괴롭히나?

하고 입을 달싹이려다 말고 이내 혀를 깨물었다.

기사들 사이에는 자기들 사이의 룰이 존재했고, 그걸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오해한 걸 수도 있었고.

마검사라니까.

기사들한테 괴롭힘은 당하지 않겠지.

근데도 고작 두 달도 안 된 아이를 호위로 보낸 이유가 뭘까? 를 잠시 떠올리다, 이내 떠오른 생각에 쓰게 웃었다.

‘다들 싫다고 그런 모양이구나.’

전생에서도 내 호위는 아주 급이 낮은 기사들이 맡거나, 급이 낮은 자들조차도 싫다고 거부해서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사생아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이라던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게 전부는 아니었겠다 싶었다.

그 출신과 별개로 아빠의 능력은 제국 내 최고였으니까.

황제의 근위대장도 쨉이 안 된다구.

그런 아빠를 존경하는 기사들도 많았고, 심지어 남자 주인공인 칼리안도 아빠를 존경한다고 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내 호위를 거부하진 않았을 거 같았다.

내가 형편없는 직계였으니까 그런 거지.

‘휴우.’

앞으로 달라지면 되는 일인데도 과거의 나를 직면하게 될 때면 기운이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두 사람한테 잘해 줘야지.’

그런 상황에서도 내게 와 준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지원자가 많아서 애를 먹었는데, 개중에서 이 두 사람의 실력이 가장 월등했습니다.”

“음?”

내 생각과는 너무 다른 말이지 않은가.

“지원자가 많아써?”

“예. 서른 명 정도.”

“우와.”

입이랑 눈이 동시에 크게 벌어지자, 엘론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런 엘론을 흘끗 보며, 얼굴을 찌푸린 피어스는 살짝 거리를 벌렸다.

“왜 구래찌?”

“아기씨가 귀여우시니까요!”

하지만 틀어막아도 막을 수 없는 엘론의 주접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고, 그 말에 난 화악 얼굴을 붉혔다.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 탓이었다.

* * *

나의 찹쌀떡 같은 두 뺨과 커다란 눈동자에 서린 귀여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엘론의 고백에 한바탕 웃고 난 뒤에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헤일은 며칠 간 치료사들에게 시달리며 제대로 먹지를 못한 내 저녁을 챙기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갔고, 베넷도 일이 있어 일찍 자리를 떠야 했기 때문이었다.

엘론과 피어스는 각자 번갈아 내 방 문밖에 서 있는다고 하던데, 어찌 됐든 조용했다.

‘그럼 이제 린지가 문제인데.’

겉으로야 뒤로 받는 돈이나, 떨어지는 콩고물에 관심 많고, 제 주인에 대해 떠벌리기 좋아하는 적당히 속물적인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사용인의 전형처럼 보여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만.

‘주인이 나 말고 또 있다는 게 문제지.’

내 밑에서 다른 주인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아리나와 똑같이.

물론 아리나와 다른 점은 아리나는 에시어의 하녀라는 직함이 주는 권력에 취해 있었다면, 린지는 철저하게 돈으로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주인도 돈에 얽혀 있었고.

물론 그녀가 돈돈 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신 상태에서 어린 동생들이 그녀의 아래로 줄줄이 있었고, 그들을 린지 홀로 책임져야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다 그런 선택을 하는 건 아니야.’

헤일도 비슷한 상황인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

모든 건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걸 비난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제가 한 선택에 책임은 져야지.

물론 지금 당장 그 책임을 물리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지금 상황에서 린지까지 쫓아내면 더욱더 교묘한 첩자가 달라붙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내게 린지가 필요했다.

내가 오네로 갔을 때에 저택 상황을 알려 줄 수 있는 사람 하나쯤은 있어야 했으니까.

‘베넷에게 물어보는 것도 한계가 있구.’

그리고 베넷이 모르는 것들을 편하게 알려 줄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는데, 그런 사람을 지금 와 찾는 것도 무리였다.

그러니 차라리 옆에 있는 린지를 역이용하는 편이 낫지.

돈 말고도 린지를 다룰 수 있는 건 차고 넘쳤으니까.

예를 들면-

“린지.”

“예, 아기씨.”

“있지, 나 베넷한테 말 안 했어.”

“뭘요?”

“린지도 나한테 똑같은 주스 준 거.”

웃으며 드레스 룸 정리를 마치고 걸어 나오는 린지의 얼굴을 사색으로 만들 수 있는 이런 약점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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