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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48)화 (48/141)

48화

린지의 장점은 거짓말을 아리나처럼 아주 뻔뻔스럽게 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아, 아기씨?”

특히나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더욱 그 속내가 여실히 드러났다.

“저, 저는…….”

“응, 알아 호기심이었찌? 그게 진짜 되는 건가? 궁금했던 거지 진짜 나를 해치려고 한 건 아니었잖아. 구치?”

“그, 그럼요!”

궁지로 도망칠 수 없게끔 몰아넣고는 빠져나갈 구멍을 완벽하게 내어 주는 내 말에 린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가.”

“린지는 착한 사람이야.”

“아기씨.”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대. 알겠지? 나 린지 죠으니까.”

“아기씨. 아기씨는 정말 천사예요!”

감동에 젖은 것처럼 나를 빤히 보는 린지의 눈동자엔 여전히 연기로 이 상황을 넘어가려 하는 교활함이 보였다.

엘론이 나를 향해 보여 줬던 순수한 웃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 그 까만 시선에 나 역시 반달눈을 접으며 웃었다.

내가 뭘 알고 있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 미치게끔 그냥, 웃어만 주었다.

* * *

탁-.

조심스레 문을 닫고, 느긋하게 걷던 걸음이 이내 조급하게 복도를 내달렸다.

‘저게 어디까지 아는 거지?’

손톱 끝을 볼썽사납게 씹으며, 이번에 새로 옮긴 방으로 내달려 들어가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2급 하녀가 되자마자 방부터 독방으로 바뀌었고, 아직 받지는 못했지만 매달 받는 월급도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 했다.

거기다 레티시아 아기씨를 모시는 데에는 부수입이 짭짤했다.

지금도 엉덩이 아래에 한쪽에는 헬렌이 한쪽에는 벨리아가 준 금화 주머니가 잘그락거리고 있었으니까.

애당초 헤일은 그런 쪽은 전혀 머리를 못 쓰는 사람이라 상관없었고, 아리나 쪽 돈까지 제게 집중되어 아마 몇 년 안에 수도 안에 집도 사고, 동생들 학교도 보내 줄 수 있을 거였다.

둘째는 몇 년 안에 시집을 갈 텐데. 저와는 달리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 혼인 시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남동생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궁내부나, 행정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리나가 그렇게 된 건 안된 일이었지만, 아리나가 저렇게 된 이후로 제게는 매일매일이 꽃밭이었다.

한데-

‘나 베넷한테 말 안 했어. 린지도 나한테 똑같은 주스 준 거.’

레티시아가 베넷이나 다른 사람에게 입만 벙긋해도 그 모든 게 끝이었다.

젠장.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엄지손톱 아래 살점이 뜯겨 나가고, 검지와 중지까지 내내 잘근잘근 씹어 보아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는 건지.

‘차라리 협박이라도 할 것이지.’

그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라도 알 수 있을 게 아닌가.

한데 작고 영악한 레티시아는 저를 향해 웃을 뿐,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질 않았다.

‘떠본 건가?’

아니, 떠봤다고 하기엔 너무 확신에 차 있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저는 절대 아리나처럼 쫓겨날 수도 죽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헬렌 님께 말을 해 볼까? 라는 생각도 언뜻 했으나, 만약 그랬다간 제 활용 가치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렇다고 벨리아 님을 찾아갈 수도 없었다.

이미 아리나가 잡혀간 그 날 베넷이 벨리아 님의 하녀인 엘린을 데려다가 심문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베넷이 안다는 건 가주님께서도 알고 있다는 거였고, 이는 곧 벨리아 님은 아기씨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음을 의미했다.

‘괜히 덤터기 쓸 수도 있어.’

제가 아리나에게 했듯이 그녀를 희생양 삼아 다른 이로 대체할 수도 있음이었다.

‘어쩌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제가 엉덩이에 깔고 앉은 침대는 푹신했고, 이불과 베개는 제 평생에 이런 호사가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좋은 것이었다.

손바닥으로 이불 위를 쓰다듬던 린지가 손으로 이불을 와락 움켜쥐었다.

절대 이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간 린지가 엄지손톱을 다시 잘근잘근 씹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어 새로 들어온 3급 하녀 앤이 트레이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린지 님, 식사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싶어, 창밖을 보자 여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이라니.’

린지가 답답함에 숨을 크게 삼키자, 달큰한 기름내음이 훅 콧속으로 들어왔다.

배고픔을 모르고 있었는데 음식 냄새를 맡자 배 속에서 요동을 치는 것 같았다.

“아기씨께서 오늘도 조금밖에 안 드셨어요.”

그래서 먹을 게 많았다는 내용을 흘린 앤의 말에 턱짓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 시선에 트레이를 내려놓은 앤이 웃으며, 방을 빠져나갔고 식기 위에 놓인 따끈따끈한 스프와 빵, 고기들을 차례로 보던 린지가 천천히 테이블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작게 썰어 고기를 입에 넣고, 빵을 뜯어 오물오물 씹으며 숨겨 놓았던 와인도 꺼내 잔 가득 따라 머금었다.

돈의 맛이었다.

제 동생들은 평생 구경도 못 할 음식들이었고, 오네와 디아브리아의 경계에 살던, 그리고 여전히 살고 있는 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레티시아의 발아래를 기어서라도.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이 와중에조차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음식의 맛에 린지가 입술을 씹었다.

절대 이 맛을 놓을 수 없었다.

* * *

며칠 뒤.

“이제 다 끝나써?”

“예.”

장장 일주일간 이어진 치료사들의 해독이 드디어 끝이 났다.

솔직히 한 이틀 정도면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억지로 일주일가량을 더 붙들어 놓은 탓이었다.

“폴?”

이제 너도 적당히 좀 하라는 의미를 담아 폴을 바라보자, 그가 마도구를 걷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십니다.”

“다행이다!”

이제 해방이다! 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참고,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새 조금 더 자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에서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에 사람들의 얼굴도 노곤노곤하게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집안으로 죄다 불려 온 나이 든 치료사들은 처음엔 떨떠름한 기색이 조금씩은 엿보였으나, 나의 미친 듯한 친화력으로 지금은 다들 떠나는 걸 아쉬워했다.

할아버지들이 손녀딸 귀여워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다음에도 불러 주세요, 아기씨.”

“저도.”

“저, 오네에 삽니다. 아기씨! 오네에 가셨을 때에라도 언제든.”

“저도 오네 삽니다!”

“엘칸파가 어째 오네던가!”

“거기나 거기나, 하루 거린데 같은 동네지 거참. 아무튼 부르시면 가겠습니다.”

치료사들 두셋이 모여 꼭 불러 달라며 소리를 높였다.

“구르케 말해 줘서 다들 고마어!”

“하아, 천사셔.”

턱을 살짝 올려 든 채 나이 든 치료사들을 향해 해맑게 웃었다.

그 미소에 치료사들이 마주 웃어 주었다.

시끌시끌하게 어깨로 서로를 밀치며, 밖으로 걸어 나가는 치료사들의 귀여운 싸움을 보며, 통통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 웃었다.

지루하긴 했지만, 그래도 치료사들의 애정을 듬뿍 받아 매우 기분이 좋았으니까.

사랑은 아무리 받아도 지겹지가 않아.

가슴에 가득 채워진 행복한 감정에 양 볼이 붉게 물들었다.

이 감정을 솔직히 계속 느끼고 싶었다.

‘잘 해야지.’

주먹을 꼭 틀어쥐며, 작게 아자! 하고 올렸다 내렸다.

“나 이제 수업 받으러 가도 대?”

“네.”

폴이 외눈안경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아나가 며칠 사이 세 번이나 편지랑 선물을 보내왔던 걸 떠올리며, 헤일을 돌아보았다.

“쿠키 구워서 리리 주자. 리리 라즈베리 쿠키 좋아해. 레샤는 초콜릿 쿠키.”

혹시나 라즈베리 쿠키만 준비할까 싶어 다급히 초콜릿 쿠키를 덧붙이자 헤일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에 말해 놓겠습니다.”

“얏호.”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몸에 안 좋은 게 다 빠져서 그런가?

헤헷 하고 웃으며, 리리에게 편지도 써 줘야지 싶어 책상에 가려 몸을 돌리자 폴이 외눈안경을 눈가에 맞춰 조정하며 내 쪽으로 다가섰다.

“아기씨.”

“웅? 아 맞다. 잘 되어 가구 이써?”

내 기분이 너무 좋아서 할아버지 챙기는 걸 깜박했네.

“네, 어느 정도는요.”

내게 말을 해 줘 봐야 모를 거라고 생각한 듯 대충 그렇게 얼버무린 폴이 흘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헤일과 며칠 전 새로 온 기사, 피어스가 방 안을 지키고 있었다.

비리비리하게 생겨서는 아무래도 내가 지켜 줘야지 싶게 생겼는데.

그래도 실력은 좋다니까. 하며 폴을 다시 보았다.

“군데 왜 불렀어? 아, 마따!”

리안!

할아버지의 병보다도 더 까맣게 잊고 있던 존재에 손뼉을 짝 하고 부딪힌 내가 폴 가까이로 다가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혹시 폴, 의원에 손 다친 애 와써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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