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49)화 (49/141)

49화

“아뇨.”

이런 망할 놈.

고집불통, 말도 진짜진짜 안 듣는 놈.

왜 그러는 거야 증말.

나중에 만나면 한마디 해야지.

어후.

상처 덧나면 그거 어쩌려고.

손등을 아주 잘근 밟아 놨던데!

‘진짜.’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숨까지 피휴 하고 내쉬곤 뒤늦게 고개를 들자, 폴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 마따.”

폴 할 말 있었댔지.

번번이 말을 막은 게 슬쩍 민망해져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들었다.

“그.”

“응!”

이번에는 말을 막지 않으리, 다짐하며 그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말해도 되겠습니끼?”

“말해.”

선심 쓰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작게 웃은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투니아에서 온 아이가 아기씨를 뵙고 싶어 합니다.”

“……움?”

“정확히는 자신을 산 여자아이, 를 만나고 싶다. 라고 하더군요.”

여자아이. 라는 단어를 굳이 강조한 폴이 나를 빤히 보았다.

이야기를 대충 전해 들은 눈치에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어째 비밀이 없어요, 비밀이.’

이래서는 애를 쓰고 몰래 나간 의미가 없질 않은가.

이러다 에시어 전체가 다 알겠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는데, 솔직하게 다 털어놓을 수는 없기에 일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음?”

하지만 모른 척 시선을 피하는 내 눈을 보며 폴이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베넷이 제집으로 보낸 아이라, 너를 보낸 사람은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말을 해 주었는데도 듣지를 않더군요.”

“…….”

“해서 베넷에게 물어보니 아기씨가 산 아이라 일러 주었습니다.”

정확히는 베넷 지분 100%인 아이였지만.

어쨌든 내가 질러서 낙찰받은 건 맞으니까.

“아아. 그 아이.”

제가 알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폴을 향해 뒤늦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지, 알아.

“군데 왜?”

“네?”

“왜 만나고 싶대?”

폴의 물음을 풀어서 설명하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물어봐도 말을 않더군요.”

“훔.”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

하지만 고맙다는 말을 하기엔 내가 해 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쟈이든의 미래는 그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그곳이 지옥일거라는 건 몰랐을 텐데.

그러니 고마울 건 없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그가 나를 보려고 하는 이유를 더욱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괜히 나를 주인으로 인식하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문제고.

‘리안네 집 앞에 버려 놓을 걸 그랬나.’

어차피 리안이랑 만나야 하니 좀 일찍 만난다고 탈 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근데 그렇게 되면 그 집에 돈도 없는데 치료도 제대로 못 해 줄 게 아닌가. 어쨌든 소설에서 리안이 쟈이든을 도울 수 있었던 건, 리안네 엄마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거니까.

리안네 엄마가 있으면 어려울 거야.

괜히 구한 건가.

서사를 괜히 제가 꼬아 놓은 건 아닌가 하는 불안에 머리가 아팠다.

‘에휴. 머리 아파.’

회귀에 미래를 대충 아는 상태에서 스토리 진행까지 염두에 둔 채 움직이려다 보니, 확실히 머리가 복잡해졌다.

회귀만 했어도 이 정도로 제약이 생기진 않았을 텐데.

내가 바꾸면 그만인 미래니까.

물론 내가 아는 미래가 그만큼 줄어드니까 내게는 손해기는 하다만 썩 똑똑하지 않은 회귀자라 그런지 차라리 그게 더 편할 것 같았다.

‘휴.’

“아기씨?”

“군데 내가 나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 보려면 반년 기다려야 한다구 전해 줘.”

“…….”

내 말에 납득한 듯 폴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 건강히 잘 이써야 한다구 말해 줘. 아프지 말라구.”

“알겠습니다.”

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 폴.”

“예 말씀하세요.”

주저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나를 돌아본 그가 몸을 살짝 기울여 나와 시선을 맞췄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갈색 눈동자에-

“혹시라도 손을 다치고 막 몸에 맞은 상처가 많은 검은 머리 아이가 와서 엄마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면, 돈 받지 말구 집에 한 번만 가 줘. 그리구 편하게 하늘나라 갈 수 있게 도와줘.”

이런 말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어 하지 않으려 했는데, 곧 여름의 끝이었다.

‘리안 엄마 기일이 이쯤이어써.’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그 시기.

그 순간에 리안이 엄마의 임종을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건, 내 말을 기억해 폴을 찾아가는 것밖에는 없을 테니까.

“부타캐, 폴.”

* * *

“어, 엄마?”

쿨럭, 온몸을 들썩이며 고통스러운 숨을 토해 내는 안젤라의 모습에 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을 뒤틀어 기침을 하는 그녀의 입술 끝엔 며칠 전부터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은 말할 것도 없이 피가 잔뜩이었다.

약을 아무리 써도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작은 손을 꼭 말아 쥐며, 차오른 눈물을 손등으로 슥슥 문지르자, 이제 막 새살이 돋아나려 검은 딱지가 앉은 손등의 상처가 여린 피부를 긁어 댔다.

엉망으로 묶여 있던 붕대는 이미 풀어 버린 지 오래였으나, 그 아이가 뿌려 준 약초 가루 때문인지 상처가 다른 곳보다는 빠르게 나아 가고 있었다.

‘너 지금 아프잖아. 그러니까 빌려주는 거야.’

‘나중에 만나면 그때 갚아.’

개소리.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할까 싶어 쓰지 않고 서랍장 위에 올려 둔 은화 두 닢이 흐릿한 촛불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하지만 저 정도 금액이면.

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베니아 지역에 메디 의원을 찾아가. 거기 폴이라고 의사가 있는데, 그 사람한테 가면 약도 주고, 네 상처도 봐 줄 거야.’

다른 의사들은 안 온다고 해도, 그때 그 아이가 말했던 의사는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은화를 움켜쥐었다.

‘늦지는 않았겠지?’

캄캄한 창밖에 괜스레 다급해진 리안이 급히 문고리를 잡아 돌린 그때-

“리안아.”

힘없이 저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엄마?”

며칠 만에 들어보는 엄마의 부름에 나가려던 걸음을 돌려 급히 엄마 앞으로 다가갔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흐릿하게 웃은 엄마 안젤라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여린 뺨을 쓸어내리고, 보듬어 매만졌다.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손끝으로 얼굴을 익히려는 것처럼, 그렇게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녀의 손길에 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

“우리 리안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아이인데, 이렇게 지낼 아이가 아닌데. 엄마 욕심에 미안해.”

더듬더듬 건네는 엄마의 말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또 그런 소리. 싫어. 하지 마.”

“리안아.”

고개를 내저은 리안이 그녀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도 흐릿해지는 엄마의 내음이 왈칵 서글퍼 어깨가 들썩였다. 흐느낌을 참으려 해 보아도 멈추질 않았다.

“엄마, 내가 가서 의사 데려올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요.”

“리안아, 엄마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나가려는 리안의 손을 힘없이 움켜쥔 안젤라가 침대맡에 놓인 편지를 가리켰다.

“이 편지를 우체부에게 전해 주렴.”

“싫어. 또 나를 다른 데로 보내려는 거지.”

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

“의사만 오면 살 수 있어. 약 먹으면 될 거야. 엄마 나 금방 다녀올게.”

울음을 삼키며 급히 밖으로 나가 거리를 내달렸다.

베니아의 메디 의원.

상업 지구 왼쪽 끝자락에 있는 그 의원의 이름이었다.

의사가 있을 때면 무료로 약도 주고 치료도 해 준다고 오네에서도 유명한 곳이었다. 다만 의원에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문제였지.

하지만 그건 무료일 때가 아닌가.

이 돈이면 의사를 불러올 수 있을 거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자꾸만 부옇게 변하는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엄마만 살 수 있으면.

‘그 귀족의 하인이라도 될 거야.’

그렇게라도 은혜를 갚으면 되는 거였다.

돈을 써 버리는 게 마음에 못내 걸렸지만, 이내 눈앞에 보이는 메디 의원의 간판에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엄마만.

‘아마 넌 나에게 내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갚을 수 있을 거야. 난 믿어.’

질끈 눈을 감은 채 문을 밀고 들어갔다.

딸랑-.

“여기 의사 폴이라고 있어?”

다짜고짜 폴을 찾는 리안의 말에 안쪽에서 누군가 젖은 손을 닦으며 걸어 나왔다.

“내가 폴이다만.”

외눈안경을 쓴 눈으로 문 앞에 선 리안을 돌아보는 그와 벽 쪽에 붙어 앉은 이민족 남자의 시선에 리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곤 이마에서 흐른 땀을 대충 팔을 쓸어 닦아 내곤 그 앞으로 가 손을 내밀었다.

리안, 제가 갖고 있는 전 재산.

은화 두 닢.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그 은화 두 닢을 빤히 보던 폴이 고개를 들었다.

“이걸 왜 내게 주…….”

“엄마를 살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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