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폴의 말을 막은 리안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을 찾아가랬어.”
‘그 사람한테 가면 약도 주고, 네 상처도 봐 줄 거야.’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던, 아니 저를 속이려던 건 아닐 거라 믿고 싶은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폴과 시선을 맞췄다.
“그럼 당신이 약도 주고 내 상처도 봐 줄 거라고, 그랬어.”
혹시라도 언질을 해 놓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손등과 상의를 걷어 발길질을 당해 멍으로 가득한 몸을 보였다.
몸에 난 멍 자국을 살피는 의사의 표정이 심상찮게 굳어졌다.
“어디서 이런…….”
“넘어졌어. 그리고 난 괜찮으니까, 엄마만 살려 줘. 여기 돈도 있어.”
손을 조금 더 앞으로 내미는 리안의 모습을 빤히 보던 폴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 * *
날이 밝았다!
설렘에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떠, 그야말로 뜬눈으로 린지와 헤일이 들어오기를 새벽 내 기다리는데 어찌나 시간이 더디던지.
발끝을 꼬물꼬물 이불을 만지작만지작.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창밖을 한번 흘끗 봤다가 까만 하늘에 시무룩해져 눈을 감았다가 또 떴다가 해뜨기 전까지 그걸 무한 반복하다 보니 끝내는 해가 떴다.
그리고-
“아기씨 좋은 아…….”
“좋은 아침이야! 린지, 헤일!”
하녀들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예, 아침입니다, 아기씨 안 주무셨어요?”
“잤어! 근데 너무 설레서 못 잤어!”
내가 말하고도 이게 무슨 말이야 싶어 헤- 웃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돌아본 헤일이 그 마음 충분히 알겠다는 듯 웃었다.
“제 동생도 소풍 전날이면 그러더라구요.”
“아기씨는 소풍도 아니고, 수업 받으러 가시는 건데도 그렇게 좋으세요?”
“응!”
히히, 어쩐지 오늘은 도형 그리기에 성공할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린지, 나 씻을래!”
“네, 준비할게요.”
“헤일, 쿠키는?”
“주방에 말해 놓았어요. 아기씨 수업에 맞춰서 가져올 거랍니다.”
“알게써.”
모든 것이 완벽한 아침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곤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오자, 린지가 옷과 씻을 물을 내오며 생긋 웃었다.
“아기씨 옷은 어떤 걸로 입으시겠어요?”
“나 하늘색 원피스!”
“네, 준비할게요.”
하녀, 앤이 세숫물을 협탁 위에 올려놓으며 생긋 웃었다.
준비를 다 마치고,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는 리리아나에게 줄 쿠키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계단을 콩콩 내려왔다.
일주일간 침대에 묶여 있다 나왔더니 진짜 한여름의 더위는 꺾여 있었다.
어쩐지 바람결에 서늘한 내음이 묻어 불어오는 것도 같았다. 이대로 훌쩍 가을이 지나 곧 겨울이 오겠구나 싶었다.
“오늘 날씨 조금 시원하고 따뜻해.”
“그러네요. 바람은 시원하고 볕은 따뜻한 거 같아요.”
웃으며 건네는 헤일의 끄덕임에 마주 웃으며 통통 뛰어 내려가자, 남자 사용인들이 한데 모여 호숫가 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오늘이 호수 정비하는 날인 모양이에요.”
헤일의 설명에 고개를 들었다.
“정비?”
“네, 곧 낙엽도 지고, 추워지니까. 미리미리 고칠 거 고치고, 치울 거 치워 놓지 않으면 겨우내 힘들다고 그러더라구요.”
“아.”
하긴 호수가 유달리 깊고, 넓어서 조금만 관리를 소홀히 하면 사람이 빠지거나 다치기 쉬워 보이긴 했다. 그리고 주변 조경도 그렇게 관리를 하니까, 물이 저렇게 깨끗하고 맑은 거지.
새삼 여기가 어마어마한 공작가라는 걸 다시금 느끼며 린지를 돌아보았다.
“린지.”
“예, 아기씨.”
“오늘 날씨가 추워. 물에 들어가고 그럼 더 추울 거야. 호수 청소하는 사용인들한테 따뜻한 스프 가져다줘.”
“예, 주방에 말해 둘게요.”
린지의 끄덕임에 멀어지는 사용인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교실로 향했다.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만.
“병신. 넌 이능이 있긴 하냐?”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비아냥거리는 챈들러의 이죽거림조차 받아칠 수가 없었다.
오전 수업 내내 힘을 너무 써서 기력이 쪽 빠진 것도 있고, 그럼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기운이 나질 않았으니까.
“하아.”
“기운 내.”
위로하는 리리아나의 말에 피식 코웃음을 친 챈들러가 팔짱을 꼈다.
“요즘 소문이 어떻게 도는지 아냐? 너 할아버지한테 거짓말한 거 걸릴까 봐 이리저리 말 많이 만들어 내는 거 아니냐고, 아리나 일도 네 자작각 아니냐고.”
“자작극.”
책상에 얼굴을 묻은 채, 챈들러의 틀린 단어를 정정했다.
나도 유치한 거 아는데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콧숨을 식식대는 챈들러를 보면서 기분이 살짝 좋아지기도 했고.
“하.”
“괜찮아.”
“안 괜찮다니까? 리리아나. 너 지금 저 거짓말쟁이한테 속고 있는 거야. 이능력을 못 쓰잖아. 이능력 없는 이능력자라니. 그게 뭐야. 사기꾼이라는 거지.”
이죽이죽.
한 대 콱 쥐어박고 싶게끔 얼굴까지 흔들어 가며 하는 그 말에 고개를 돌리자, 올가가 그런 나와 사촌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우서?’
후하.
진짜 저 인간이야말로 무능한 사기꾼 아닌가?
이상한 것만 시켜서 사람 기운만 빠지게 하고.
그래, 나도 올가 탓할 거 없다는 거 안다. 아는데, 지금 내가 탓할 게 올가밖에 더 있나?
‘아빠한테 편지라도 써 볼까.’
아빠도 나랑 똑같이 6살에 이능 발현이 됐었으니까. 비슷하지 않았겠나, 를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이능력 있다는 거 아빠가 알아서, 나 부작용까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골치 아파진다.’
할아버지가 아빠한테 소식 전하지 않는 이유가 뭐겠는가.
다들 아는 거지.
‘샤리에 에시어가 알면 모두 다 불편하고 골치 아파진다는 걸.’
그리고 아빠가 알게 되는 걸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저기 뒷동에 존재하고.
며칠간 침대에 누워 고민을 해 보았다.
대체 저들은 왜 나한테 그러는가, 에 대해서.
그동안은 그야말로 버려두다시피 관심 없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들 내가 뭘 하는지 일거수 일투족을 알고 싶어서 왜 안달들인가. 했었는데.
2대에 걸친 이능력자.
그리고 그걸 알게 된 아빠의 반응. 그게 두려웠던 거 같다.
아빠 혼자면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겠지만, 내가 있다면.
내 미래를 위해서라도 아빠가 나설 가능성이 그래도 미약하나마 있으니까.
할아버지는 그 가능성을 거의 백 프로로 보시는 것 같고.
그러니까 아빠한테 절대 안 알리려고 하시는 거겠지.
아무튼 이래저래 이해관계가 복잡한 집안에 한숨을 푹 하고 내쉬자,
“……니까 쫓겨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자수해.”
“응?”
내가 딴생각을 하는 내내 내 앞에서 떠들던 챈들러의 말에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누가 봐도 니 말은 귀담아듣고 있지 않았다, 라는 게 보이는 내 시선과 표정에 챈들러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너 안 듣고 있었어?”
“응.”
“이게 진짜.”
“도련님들?
손을 올려 드는 챈들러의 행동에 내내 지켜만 보고 있던 올가가 뒤늦게 나서서 그를 자제시켰다. 그 목소리에 시근덕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흘끗 뒤를 돌아본 챈들러가 책상을 발로 뻥 하고 걷어차곤 교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런 챈들러의 뒤를 제이슨이 다급히 쫓아 나갔다.
“제이슨 저 멍청이.”
리리아나가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가서 차 마시자. 내가 간식 챙겨 왔어.”
“어?”
“왜, 싫어? 네가 좋아하는 초코 쿠키 만들어 왔단 말이야.”
“아니.”
미간을 좁히는 리리아나의 표정에 고개를 급히 저으며, 헤일을 돌아보았다.
“나두 쿠키 만들어 왔는데.”
“왜?”
“리리 주려고.”
“…….”
헤일에게 쿠키 박스를 받아 내미는 내 손에 리리아나의 표정이 수십 가지 감정을 담은 채 일렁였다. 물론 그 감정들은 전부 다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다만 그 좋아 어쩔 줄 모르겠는 감정을 꾹 누르느라 일렁이는 것이었다.
‘레이디는 좋은 감정도 싫은 감정도 드러내면 안 되는 거야.’
리리아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리리 싫어?” 눈을 크게 뜬 채 깜박였다.
그러자 난생처음 얼굴을 붉힌 리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싫어.”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도도한 레이디를 흉내 내고 있었다.
그 귀여운 표정에 헤헤 하고 마주 웃으며, 박스를 열었다.
“리리가 좋아하는 라즈베리 쿠키.”
박스 가득 머금고 있던 상큼한 향내에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들자, 리리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설마 안으려는 건가?’
싶어 나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쭈욱 뺐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과 달리, 내 손을 꼭 쥔 리리아나가 나를 당겨 일으켰다.
“얼른 나가서 차 마시자.”
“…….”
그치? 아무리 쿠키가 좋아도 갑자기 포옹은 너무 앞서간 거지.
또 너무 많이 앞서간 내 감정에 양 볼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