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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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를 향했고, 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레티시아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방금 전의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챈들러랑 제이슨 아닐까요?”
이미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에서 나는 너를 믿지 않겠다는 걸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헬렌이 웃으며 벨리아를 돌아보았다.
“전 솔직히 챈들러가 제이슨을 괴롭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요.”
“그렇지, 우리 채디가 그럴 아이가 아니긴 하지.”
금세 또 팔랑거리는 귀로 나를 돌아보는 벨리아의 시선에 짧게 한숨을 내쉬자, 피어스의 몸이 나를 가리려는 듯 살짝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뒤에 선 헤일과 그 옆에 선 리리아나까지.
세 사람 모두 나를 지키려는 듯 숙모에게 대항해 움직이는 게 느껴지자,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이번 생은 아무래도 잘 풀리려나 봐.
이전 생에서는 내 편 들어 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혼자 악다구니를 쓰면서 얻어 내야 했는데 이번 생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거니까.
사람이 희한하게도 정말 뭐 하나 달라질 것 없는 아까와 똑같은 상황인데도 그들의 움직임 하나로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냥 근거 없는 자신감이긴 해도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순간에 고개를 들자 할아버지가 보였다.
“그건 헬렌의 말이 맞구나.”
‘와.’
내 인생 진짜 꽃길인가?
할아버지만 오시면 완벽하겠다 했는데, 딱 정말 귀신같이 등장하시다니.
어쩜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리나, 싶게끔 풀리는 상황이 신기하고 또 신기해 눈을 깜박이자, 내게는 시선조차 두지 않은 할아버지가 사용인들을 돌아보았다.
“제이슨을 불러오거라. 챈들러도 상태 괜찮으면 데려오고.”
“예, 알겠습니다.”
* * *
딸꾹, 딸꾹.
제이슨이 어깨를 들썩이며 연신 딸꾹질을 했다.
1년에 한 번 뵐까 말까 한 할아버지 앞에 한 달 사이에 벌써 두 번이나 서게 된 탓이었다.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 봐라.”
거기다 사람들의 이목까지.
온몸이 달달달 떨리고, 이가 닥닥닥 부딪힐 것 같은 제이슨이 애꿎은 손을 비틀고 괴롭혔다.
“제이슨.”
잔뜩 주눅 든 얼굴로 할아버지를 흘끗 한 번 본 그가 옆쪽의 헬렌을 흘끗 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엄마가 알려 주지 않았는데.
솔직히 말을 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의 시선에선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괜히 제가 모르는 말을 했다가 혼이 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엄마도 머리 쓰지 말고 모르겠으면 솔직히 말하라고 매번 다그쳤었다.
‘제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렴. 그럼 혼내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솔직히 자꾸 저를 괴롭히는 챈들러도 너무 싫었다. 화를 내면 장난인데? 하며 넘어가고, 엄마한테 일러도 소용없고, 아빠한테 말해 봐도 그냥 네가 참으렴. 하고 넘어가는 것도.
‘할아버지께 말씀드리면 채디 형을 혼내 주시지 않을까?’
챈들러가 혼나는 건 싫었지만, 제발 저를 좀 그만 괴롭혔으면 싶은 제이슨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채디 형이랑 장난을 치다가 제가 물에 빠질 뻔, 아니 몸이 여기 가슴까지 빠졌었는데 갑자이 막 엄청 밝은 빛이 나와서 나를 구해 줬어요.”
“빛?”
할아버지의 물음에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티시아가 ‘제이슨! 고삐 당겨!’ 해서 고삐를 막 당겼는데 바로 펑 하는 것처럼 빛이 나왔는데 그리고 나서는 물에 빠졌는데 안 빠졌어요.”
제이슨이 어리숙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솔직하게 말을 하자, 벨리아뿐만 아니라 헬렌 역시 당황한 듯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제이, 네가 잘못 본 거겠지.”
“아니야. 엄마 이건 본 게 아니라 경험한 거잖아.”
상황을 수습하려는 헬렌의 말에 제이슨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런 제이슨을 빤히 보던 마고가 헬렌과 벨리아를 차례로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제이슨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챈들러 때문에 빠질 뻔한 걸 레티시아가 구해 줬다.”
“네.”
“이능인가.”
제이슨의 끄덕임에 마고가 곁에 선 올가를 돌아보았다.
“네, 발현된 듯합니다.”
“…….”
이능이 발현됐다는 말에도 마고의 표정은 기쁜 기색이 없었다. 되레 굉장히 복잡한 심경인 듯, 마고가 숨을 몰아쉬자-
“그럼, 챈들러는 왜 구하지 않은 거니?”
벨리아가 따지듯 레티시아를 돌아보았다.
마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따져 묻는 것 같은 벨리아의 물음에 레티시아가 눈을 깜박였다.
마고 역시 궁금했던 물음이었던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푸른 눈을 크게 뜬 레티시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능력이 안 되어서요.”
* * *
능력이 안 된다는데 어쩔 텐가.
“제이슨 오빠 구하고 났더니 온몸에 힘이 다 풀려 버리는 거 같았거든요. 아직 어려서 그런가 봐요.”
그리고 실상 저 말이 사실이기도 했다.
내 능력으로 본 건 제이슨이었고, 그를 구해 냈다는 인식을 할 틈도 없이 이능이 발현되었으니까.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는 데 그 이상의 것을 할 수는 없었다.
물론 구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어땠을지 나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이능이 이타성이고 나발이고.
챈들러는 구하기 싫었으니까.
“그래서 구할 수 없었어요. 죄송해요, 숙모.”
내 말에 벨리아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하지만 뭘 어쩌겠는가.
할아버지가 보고 계시는데.
거짓말하지 말라고 채근할 수도 없는 그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뭐. 그래.”
하지만-
“숙모 그럼 레샤한테 사과해야죠.”
“음?”
리리아나가 그런 벨리아를 콕 집으며 말했다.
“숙모가 오해해서 레티시아를 때릴 뻔했잖아요. 그리구 헬렌 숙모도 레티시아가 잘못 안 했는데 자꾸 사과하라고 하고. 엄마가 어른도 잘못하면 사과하고 미안하다고 하는 거랬어요.”
거참 뉘 집 딸인지.
똘망똘망한 리리아나의 말에 벨리아를 올려다보자, 때마침 챈들러가 시종의 부축을 받아 걸어오고 있었다.
‘타이밍 참.’
혼나기 좋은 타이밍이네 싶었다.
그리고 역시나.
“챈들러 몸은 괜찮으냐.”
“아뇨, 할아버지. 너무 아파요. 레티시아 때문에 물에 빠진 거 같은데. 전 정말 어떻게 된 일인지.”
어쩜 말도 맞춘 적이 없는데 벨리아와 똑같은 주장을 하는 챈들러의 말에 마고가 벨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서늘한 시선에 마지못해 무릎을 살짝 굽힌 벨리아가 챈들러와 시선을 맞추었다.
“채디, 네가 제이슨을 괴롭혔니?”
“아뇨.”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챈들러가 고개를 저었다.
“전 제이슨이랑 그냥 장난친 건데요.”
“네 장난 때문에 제이슨이 물이 빠질 뻔하질 않았느냐.”
“빠트리지 않았잖아요, 할아버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챈들러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에 빠진 건 저인데요?”
빠질 뻔했지, 빠진 건 아니지 않느냐. 라는 그 놀라운 논리에 할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챈들러는 정말 여전하구나.
빠트릴 뻔한 건 문제가 전혀 없다는 듯한 저 무구한 얼굴이라니.
“자식 교육 헛시켰군.”
“아버님!”
그 끔찍하리만큼 남의 감정을 살피지 않는 모습에 마고가 고개를 돌렸다.
“챈들러는 동생을 괴롭힌 벌로 일주일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에시어의 방에서 역사 8권을 필사하거라. 일주일이면 16번을 쓸 수 있을 게다.”
“엄마아.”
“아버님, 챈들러는 너무 어…….”
“매우 실망스럽구나, 벨리아 에시어.”
발끈하는 벨리아 숙모를 향해 할아버지가 싸늘한 시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 서늘한 시선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벨리아 숙모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많은 사용인들 앞에서 당한 모욕에 수치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벨리아 숙모의 뒤에 선 헬렌 숙모가 그야말로 쥐 죽은 듯, 제이슨을 꼭 끌어안은 채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아무도 저를 주시하지 말아 주기를 바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흡사 땅속으로 사라질 수만 있다면, 사라지고 싶은 듯한 표정에 나 역시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똑같이 밉긴 해도 여기서 헬렌 숙모가 할아버지한테 밉보이면 안 되니까.’
벨리아 숙모의 권력의 일부분을 어쨌든 헬렌 숙모가 가져가야 균형과 견제가 가능해질 테니까.
두 사람이 무너지는 건, 내가 다 크고 나서여야 했다. 그 전까지는 서로 뜯어 먹고 싸우면서 그 누구도 이 에시어를 독차지하지 못해야 해.
그러니 오늘 할아버지의 실망은 벨리아만을 향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연민까지.
“할부지.”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할아버지를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공격.’
나를 향하는 할아버지의 차가운 표정 너머로 펠루아나의 복식을 입은 전사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전쟁이야.’
그러곤 이어 성벽을 공격하는 펠루아나와 공성전을 펼치는 제국군, 그 사이로 불타오르는 성벽, 사람들, 기사들, 그리고-
‘성을 포기하고, 길목을 막아야 합니다.’
아빠?
‘아빠가 저기 왜 있는 거지?’
펠루아나 전쟁의 서막에 등장한 아빠의 모습을 좇아 시선을 돌린 그 순간,
‘레티시아?’
“레티시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자아낼 정도로 눈이 마주친 아빠의 모습과 동시에 왈칵 목구멍에서 치미는 핏물에 숨을 컥 하고 내쉬었다.
레티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