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 시각 황궁에도 리비스 영지의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다.
개중에서도 카일의 2황자궁에는 그 소식이 더욱 빠르게 닿았다.
“……뭐?”
“펠루아나가 리비스 영지를 공격하고 있다는 전언입니다.”
쳉!
아침 식사 중에 들린 다급한 보고에 들고 있던 식기를 그대로 내동댕이친 카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송구합니다. 그것이 저희도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모르겠…….”
“스테판 쪽은?
“소식이 전해진 것으로.”
“누가 먼저야.”
“……예?”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치는 시종을 보며 카일이 무릎에 올려 두었던 냅킨을 들었다.
“폐하의 다음으로 소식이 전해진 곳이 어디냐고.”
“…….”
냅킨으로 입가를 툭툭 닦아 플레이트 위에 올려놓은 카일이 시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채근을 끝으로 이어지는 그의 고요한 침묵에 주변 시종들 모두 바짝 긴장한 채로 숨을 삼켰다.
“그, 거의 동시에라고…….”
차마 그것까지는 모르겠다고는 말할 수 없는 시종의 기어들어 가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이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동시에.”
말을 곱씹으며,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제 외숙부이자 장차 네투아 공작가를 물려받을 엘리아스 네투아를 바라보았다.
“동시에라.”
웃고 있는 눈과 달리 카일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궁내부와 행정부에 네투아가 막대한 돈을 들이고 있는데. 스테판과 동시에는 안 될 말이지 않습니까. 삼촌.”
“황자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제 막 20대 중반의 어린 조카가 40대가 넘은 삼촌의 셔츠 깃을 당기듯 매만졌다.
“근데 말입니다. 그때 펠루아나의 움직임이 심상찮다는 보고에 분명, 삼촌께서는 그럴 리 없다.”
“…….”
“펠루아나 따위가 제국을 공격할 수 없을 거다, 라고 했던 거 같은데요.”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또다시 말꼬리를 잡듯이 늘인 카일이 이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송구하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엘리아스와 시선을 맞췄다.
사랑스러운 어머니의 반의 반의 반도 닮지 못한 무능한 엘리아스 네투아. 그 무능한 얼굴을 빤히 보다, 이내 그의 셔츠 깃에서 손을 떼어 냈다.
아무리 저와 네투아 공작가가 혈연으로 묶인 주종 관계이긴 하나, 굳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금세 아름다운 얼굴로 서늘하게 웃은 카일이 엘리아의 구겨진 셔츠 깃을 툭툭 두드려, 정돈을 하곤 고개를 들었다.
“당장, 파악하세요. 스테판도, 리비스 쪽도.”
하지만 그럼에도 펠루아나의 전력을 확인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카일에게 펠루아나는 일주일, 길게는 보름이면 쉽게 치워 버릴 수 있는 약소국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을 이용해 저를 괴롭히려는 자들은 경계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에시어도.”
에시어라는 이름에 엘리아스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하는 게 보였다.
평생을 에시어라는 이름에 짓눌려 산 것은 비단 제 불쌍한 아비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일그러진 표정에 카일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리비스를 쳤다면 황도를 밟기 위해선 에시어의 기피르 지역을 지나야 할 겁니다.”
“…….”
“간신히 무대에서 퇴장시킨 노인네를 다시 전면에 등장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카일이 웃으며, 어리숙한 제 숙부를 보며 웃었다.
“이번에 에시어가 살아나면 우리 네투아에게 미래는 없을 겁니다.”
“…….”
“분명 스테판은 에시어를 등에 업으려 할 겁니다.”
카일의 어미는 황후였고, 네투아 공작가라는 뒷배가 단단했지만, 스테판은 고작 남작 가문 출신의 후궁이었다.
그러니 스테판이 장자라는 이점을 백번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네투아에 비견되는 뒷배를 마련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에시어가 유력했다.
강력한 권력과 재물, 명성. 그리고 샤리에의 검까지.
간신히 주저앉힌 마고 에시어를 스테판의 뒤에 붙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삼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에시어가 등판하지 못하게 막으세요.”
카일의 차가운 말투에 엘리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
“전하.”
궁내부의 부시종장 테무스가 황제의 전언을 들고 카일을 찾았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이는 당연히 스테판과 함께였다.
“폐하, 에시어 공작가에 도움을 청하셔야 하옵니다.”
황제의 개인 집무실에 모인 귀족들 중, 국방장관인 라우스 백작이 제일 먼저 소리를 높였다.
“마고 에시어 공작이 와병을 이유로 물러나 있어 어렵다면 그 아들 샤리에 에시어라도 불러와야 합니다.”
“샤리에는 북부의 타루스에 있질 않소. 오는 데만도 보름이 걸릴 터인데, 펠루아나에게 땅 다 내주고 난 뒤에 무슨 소용이 있어서!”
라우스 백작의 말에 궁내부 장관인 스벤 백작이 불쾌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수많은 기사와 군사들이 있고, 리비스에도 훌륭한 기사들이 수십인데 고작 펠루아나를 상대하는 데에 에시어가 아니며 불가하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아니, 장관. 내가 불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질 않소! 현실적으로 에시어의 기피르만 지나면 바로 황도가 아니오!”
“허면 황도에서 기사들을 보내면 되는 일이지 않소!”
스벤 백작의 말에 근위대장 호루스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들었다.
“그건 라우스 백작님의 말이 맞습니다. 기피르의 기사들이 빠르게 대응을 하면, 황도에서도 시간을 벌어 대응할 수가 있게 되니까요.”
호루스가 라우스 백작의 말에 긍정했다.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에시어의 기사들로 대응하는 것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고 에시어를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꼴이 된다. 황도를 목숨으로 지킨 에시어, 라는 타이틀을 그들에게 또 쥐어 줄 수는 없는 친황후파 귀족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 나중 문제고, 이제 곧 겨울이니 성문만 걸어 잠그면 그 미개한 것들이야 알아서 얼어 죽든 굶어 죽든 하지 않…….”
“성문을 걸어 잠그면, 펠루아나 인들이 옆길로는 알아서 안 가야지 한답디까? 성문을 걸어 잠그면 옳다구나 하고는 황도로 곧장 올라올 기세라 하더이다.”
“…….”
라우스 백작의 말에 자리에 모인 귀족들이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리비스 뒤로 펼쳐진 넓은 기피르 평야를 넘으면 바로 황도행이라는 걸.
그렇기에 기피르에서 반드시 펠루아나를 막아야 한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몇몇 귀족들을 제외하곤, 황제도 황자도, 궁내부 장관도 모두 에시어가 다시 나타나는 걸 기꺼워하지 않았다.
“카일, 넌 어찌 생각하느냐.”
그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던 침묵을 깨트리듯 황제, 이에로가 고개를 돌렸다. 가는 팔에 바짝 마른 얼굴, 황제라고 하기엔 윤기가 전혀 없는 그의 얼굴은 예민한 성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바짝 날이 선 눈빛까지.
금방이라도 픽 하고 쓰러질까 걱정스러워 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또렷한 그의 눈동자에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스벤 백작의 말처럼 테파로아에 에시어만 있는 건 아니질 않습니까.”
“…….”
“제국군으로 대응하심이 어떨지요. 그리고 고작 펠루아나의 햇병아리 왕을 상대하는 데에 에시어의 샤리에까지 나서는 건 저희 쪽이 조금 우스워 보이지 않겠습니까.”
은근슬쩍 에시어의 재등장을 꺼리는 카일의 말에 황제가 그 앞쪽의 스테판을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당연히 제국군도 나서고, 에시어도 나서야지요.”
카일과는 달리 스테판은 꽃놀이패를 쥐고 있었다.
“제국군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황도를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일부를 기피르로 보내는 에시어 없이 전투를 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에시어에만 희생을 요구할 수도 없지요.”
현명한 답이었다.
카일 저도 저 자리에 있었다면, 당연히 에시어를 이용해야 한다 주장했을 거다.
‘왜 하필이면 리비스를 공격해선.’
젠장.
그 북쪽 끝만 되었어도 네투아의 가신 가문인 콜번 영지가 기피르와 맞닿아 있으니, 기사단을 보낼 명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거리가 너무 멀었다.
기피르 영지에서도 남동쪽에 들러붙은 리비스를 떠올리며 입 안의 여린 살을 씹었다.
여기서 기대해 볼 수 있는 건, 에시어에 대한 황제의 적개심뿐이었다.
평생을 싸워 온 마고 에시어를 이제야 겨우 떼어 버렸는데.
다시 그를 전면에 내보이는 건 황제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을 것이었다.
대신 빠르게 정리하면 돼.
포털을 열어서라도.
카일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황제를 바라보자-
“일단은 리비스의 영지로 기사단을 보내 대응케 해.”
“폐하.”
스벤 백작의 손을 들어 주는 황제의 말에 라우스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막은 황제가 손을 들었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을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