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설마 그거일까 했는데.
진짜 그거일 줄이야.
약간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빠를 빤히 보았다.
하지만 아빠의 표정은 너무 진지했다.
장난치는 기색이라고는 없는 아빠의 푸른 눈동자를 빤히 보며 눈을 깜박였다.
‘우리 아빠가 이런 캐릭터였나?’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뭐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약간 아빠한테 배신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애정하는 캐릭터의 설정이 붕괴됐을 때 독자들이 느끼던 감정.
냉혈한인 줄 알았던 샤리에 에시어가 사실은 딸바보였다니.
아무도, 심지어는 아빠 딸인 나도 몰랐던 아빠의 본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자, 아빠 역시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은 부끄러운 듯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딸바보가 아니라, 아빠 노력하고 있는 건가?
어쩐지 그런 것도 같은 아빠의 붉어진 귓불과 흔들리는 눈동자에 괜히 마음이 시큰해져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그러곤 도도도 뛰어가 의자에 앉은 아빠 앞에 섰다.
“아빠.”
처음 마음은 안아 달라고 양손을 뻗어 볼까 하고 온 것이긴 한데. 한 번도 해 본 적, 아니 평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에 괜히 나도 부끄러워졌다.
할아버지한테는 쉽게 했는데.
아빠는 어렵네.
왜인지 모를 거리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나중에 하지 뭐.
그건 조금 더 친해지면 그때 해야지, 하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서운했어요?”
작게 끄덕이는 아빠의 고갯짓에 어깨를 늘어트렸다.
“구거…… 사실 레샤도 아빠한테 미안했는데요. 근데 리안이는 아빠 없고, 엄마도 지금 막 돌아가셨는데……. 응?”
잔뜩 시무룩해져서는 시선은 발밑을 향한 채 검지를 꼬물거리는 내 말에 아빠가 나를 가볍게 안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자, 돌아가셨는데?”
그러곤 나를 다정히 안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아빠가 아니었다면, 홀딱 반해 버렸을 잘생긴 얼굴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 응. 근데 그래서 아빠 왔다고 리안이 손 딱 놓고 아빠한테 갈 수가 없었어요. 아빠는 어른이지만 리안이는 어린아이니까요. 막 울고 있는 아이인데 또 상처받으면 어떻게 해요. 구래서…….”
“…….”
여전히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웅얼거리는 내 말에 나를 빤히 보던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러곤 양손을 모아 내 몸을 감싼 아빠가 나를 품에 당겨 안아 주었다.
아빠의 가슴에 닿은 내 왼쪽 귀에 심장 소리가 쿵쾅쿵쾅 들렸다.
일정한 박동으로 쿵쿵 울리는 아빠의 품이 따뜻하고 편안했다.
금방이라도 나른히 잠이 들 수 있을 것처럼.
‘자면 안 되는데.’
아빠는 금방 갈 거니까.
조금 더, 아빠를 봐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만 눈이 감겼다. 거기다 토닥토닥 내 몸을 다독여 주는 아빠 손의 울림까지.
“아빠아.”
“응?”
아빠의 목소리가 가슴에서 울려, 귀에 닿았다.
“많이, 많이 보고 시펐어요.”
“…….”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더욱, 매일같이 아빠가 그리웠다.
그리고 후회가 많이 남았었다.
아빠한테 조금 더 잘 할걸. 아빠 밉다고 얼굴도 안 보고 그러지 말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안아 달라고 할걸.
하지만 그 와중에 더 슬펐던 건,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가는 아빠의 얼굴이었다.
오래 보지 못해서였을까.
지진이 일어나서 죽기 전엔 아무리 떠올려 보려 해도 아빠의 얼굴이 그려지지 않았다.
어느 날은 그런 나 스스로가 답답해서 목 놓아 울어 버릴 정도로.
그렇게 그리웠던 아빠의 품이었다.
“항상, 맨날 보고 싶었어요.”
“…….”
넓은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아빠의 체향이 들어와 몸을 감싸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가뜩이나 나른하고, 노곤한 몸에 수마가 찾아왔다.
“안 되는데.”
고개를 저으면서도 떨칠 수 없는 졸음이 아빠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내가 잠시 잠들어 있는 동안 아빠가 떠날까 봐.
“보고 시펐어요.”
“그래.”
“꼭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시퍼써.”
“…….”
아빠가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해 주는 것처럼. 나도 아빠를 많이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아빠 죽지 마요.”
“…….”
“나만 혼자 두고 가지 마요.”
제발.
* * *
한참 만에 방에서 나온 샤리에가 굳게 닫힌 문을 빤히 보다 아래로 내려왔다.
“대장.”
“샤리에 님.”
“레티시아가 잠이 들었으니,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 입히거라. 옷장에 입을 만한 게 있을 거다. 얼굴도 좀 씻겨야 할 테고.”
“예.”
헤일이 샤리에의 말에 2층으로 올라갔고, 이어 얼굴을 쓸어내린 샤리에가 피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택에는.”
“베넷에게 말을 전하라 했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샤리에가 소파에 가 앉았다.
‘많이, 많이 보고 시펐어요.’
“피어스.”
“예.”
제 품에 안겨 작게 속삭이던 레티시아의 목소리를 떠올린 샤리에가 손끝을 매만졌다.
“레티시아는 어떻게 지냈지?”
“…….”
샤리에의 말에 조금은 말문이 막힌 피어스가 고개를 들었다.
실은 대장이 이렇게 물어 올 때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많이 고민을 했었다만 결론은 하나였다.
사실대로 말하기.
“혼자, 꿋꿋하게요.”
“…….”
“혼자 꿋꿋하게 지내셨습니다.”
피어스의 말에 샤리에가 싸늘하게 식은 표정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설명해. 네가 본 것, 들은 것. 빠짐없이 전부 다.”
그 서늘한 눈동자에 피어스가 뒷머리를 긁으며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야기를 다 마친 피어스가 조금 발갛게 상기 된 얼굴을 들었다.
“황도에 말만 들었는데 진짜 미친 사람들 천지더만요.”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뒤늦게 화가 치민 까닭이었다. 하지만 씩씩 숨을 몰아쉰 피어스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하지만 그런 피어스와는 반대로 샤리에의 얼굴은 되레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게 요 몇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능이.”
샤리에가 천장을 보며 답답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발현됐고.”
“…….”
“그걸 레티시아 혼자 겪어 냈다.”
“네.”
말끝에 눈을 질끈 감아 버린 샤리에가 욕설을 짓씹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릴 때부터 이능을 타고 태어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이능과 함께 자라지만, 후에 발현되는 사람들은 이능이 발현되는 그 순간,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것만 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솔직히 저도 겪어 내기 버거웠었다.
한데 그 고통을 레티시아, 저 어린 것이 홀로 감당했을 걸 생각하니 누군가 심장을 쥐어 파내는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았다.
“하아.”
얼굴을 감싸 쥔 채, 한참 숨을 몰아쉬던 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아이의 이능이 뭐라더냐.”
“그것까지는 저도 잘…….”
피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그걸 아무도 모르네? 싶어 그가 고개를 갸웃한 사이-
똑똑-
“샤리에 님, 베넷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밖에서 나직한 노크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초대받지 않은 방문자가 제 신원을 밝혔다.
* * *
“가주님께서 마차를 보내셨습니다. 아기씨와 같이 저택으로 돌아가시죠.”
집 안을 가볍게 둘러본 베넷의 말에 물 잔을 내려놓은 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지.”
“샤리에 님.”
손등으로 입술을 닦은 샤리에가 베넷을 바라보았다.
“가주님과 맞서는 게 능사는 아니질 않습니까.”
“가주님과 맞서려는 게 아니라 그 집에 갈 이유가 없진 것뿐이다.”
“샤리에 님.”
“그간 반기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그 저택에 갔었던 건, 오직 레티시아를 보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아이가 여기 있으니 굳이 거길 내 발로 갈 이유가 없어.”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가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의 저택 방문은 환영받지 못했다.
공작부인 소생인 안드레아와 윈드런에게 샤리에는 제 것을 빼앗으러 온 약탈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거기다.’
길게 한숨을 내쉰 베넷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는 레티시아뿐만 아니라, 샤리에도 있을 곳이 못 되었다.
에시어가 소유했던 가옥 중에서도 가장 작고 허름한 곳이 여기 오네의 루체가 13번지 집이었으니까.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이런 집에 레티시아 아기씨를 두는 건 제가 불안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내 여기서 지내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가 어때서? 내 이름으로 된 유일한 내 집인데.”
“샤리에 님.”
“레티시아가 원하면 아이는 내일 돌려보내마.”
제 말을 끊어 내는 샤리에의 말에 베넷이 고개를 들었다.
“싫다면 안 보내실 작정이십니까.”
“그래. 그럴 거다.”
베넷의 시선에 샤리에가 맞붙듯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면, 보내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