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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68)화 (68/141)

68화

씻고 머리도 양 갈래로 빗고 옷 갈아입고 거울도 보고 1층으로 내려가자 맛있는 냄새가 났다.

“펠한테 아침 식사 조금 만들어 오라고 했거든요. 빵도 사 오고요.”

“우와, 잘해따.”

헤헤-

헤일을 향해 웃으며 1층으로 내려가자, 응접실에 아빠가 앉아 있었다.

아빠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소파에 앉은 옆모습에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와 헤- 하고 입을 벌렸다.

아빠다.

어제는 어둡고, 혼나는 와중이라 아빠를 자세히 볼 새가 없었는데.

역시 내 기억대로 아빠는 꽃미남이었다.

깔끔하게 정리한 밀밭색 머리부터, 그 추운 곳에서 지냈는데도 상한 부분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피부까지.

귀족적인 자태가 줄줄 흐르는 아빠의 모습은 안드레아 숙부보다 더 에시어의 후계 같아 보였다.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찐 공작님 말이다.

솔직히 안드레아 숙부는 너무, 어른한테 이런 말 쓰면 혼나겠지만…….

그래, 천박해 보였다.

근데도 누구한테 더럽니 어쩌니 하는 건지.

쳇.

“내려왔으면 아빠한테 인사를 해 줘야지, 레티시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웃으며 고개를 돌린 아빠의 말에 마지막 계단을 폴짝하고 뛰어 내려가 아빠 앞에 섰다. 근데 막상 아빠 앞에 서니까 입이 딱 달라붙은 것처럼 생각한 대로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막 와락 안기면서 ‘아빠아! 안녕히 주무셔써요? 밤새 레샤 안 보고 싶었어요?’ 오두방정을 떨고 싶은데.

“안녕히 주무셔써요, 아빠?”

공손히 앞으로 모은 손으로 고작 하는 게 혀 짧은 소리라니.

내 속의 오두방정이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도 해 봐야 늘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이런 일들을 능숙하게 잘하는 건 그거 나름대로 또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니 적당히 하자.

나 스스로와의 타협을 마치고 아빠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 미소에 아빠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침 먹자.”

처음,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 듣는 아빠의 말에 어쩐지 코끝이 시큰거릴 것만 같아 눈가를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랑 단둘이 먹는 첫 아침이었다.

근데.

파다다닥!

저기 저 서랍장 뒤에 저거.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일어난 아빠 뒤로 아주 익숙한 뒤태가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진 거 같은데.

분명 내가 아주 자알 아는 뒤태가.

그러니까 투실투실한 분홍빛 엉덩이에 돋아난 돼지 꼬리와 그 위로 이어진 매력적이고 살찐 등에 돋아난 옹졸한 날갯짓.

파다다닥!

‘저 돼지 새끼!’

여기 있었네.

멀리는 못 가고 오네의 가옥들 중에 한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아빠네 집에 숨어 있다니.

여기가 당연히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듯 다급히 몸을 숨기는 팅커벨의 엉덩이와 가는 꼬리를 흘끗 보다 이내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당장에 잡아 단검 내 놔! 할까도 아주 잠깐 생각했었는데.

저 돼지가 그걸 들고 다닐 리는 없었고, 또 도망가면 골치 아팠다.

그러니 차라리 일단은 내가 그를 기억 못 하는 척하면서 방심하게 만든 다음에 잡는 편이 더 나을 거 같았다. 솔직히 그 많은 가옥 내 어디 있는지 찾는 게 힘든 거지, 찾은 뒤에 잡는 건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 저 돼지 새……. 아니, 집 요정 팅커벨님이 서랍장을 좋아하더라고.

그때 나한테 처음 걸려 놓고도 또 거기 기어 들어가서 나한테 또 걸린 거 보면.

이 집에서도 그 습성은 어디 안 가지 싶었다.

그러니 마음껏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고 난 아빠랑 아침 먹어야지.

오늘 시작이 아주 좋았다.

“빵 줄까?”

“네!”

“스프는 많이요!”

아빠가 줘서 그런가 빵도 맛있고, 어쩐지 스프도 더더 맛있는 거 같았다.

“아, 배불러.”

지인짜 오랜만에 배가 빵빵하게 부를 정도로.

“진짜 맛있어. 저택 본관 요리사보다 펠이 음식을 더 잘하는 거 같아!”

“그러게 솜씨가 좋구나.”

“감사합니다, 펠이 들으면 좋아하겠어요.”

내 칭찬에 이어, 아빠의 칭찬까지 이어지자 헤일이 뿌듯한 듯 웃으며 식기를 치웠다. 그녀가 사라진 공간 저 너머에서 열심히 식사를 하던 피어스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스프에 빵을 쿡 찍어서 입에 넣었다.

먹을 줄 아네.

물이랑 햇볕만 먹고 자라는 식물 같은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뭐든 잘 먹으니 쑥쑥 크는 건가 싶었다.

나도 많이 먹으면 이번 생에는 좀 쑥쑥 크려나?

‘아니지.’

키는 정해져 있고, 옆으로 살만 찌는 거 아냐?

‘안 돼.’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안 되지, 안 돼.

아빠가 저렇게 완벽하게 잘생겼는데 내가 살이 찌면 안 될 말이었다. 대체로 살이 찌면 얼굴이 커지고 못생겨질 테고 그러면 사람들이 뒤에서 욕을 시작할 거다.

제대로 된 레이디 교육을 받지 못해서 저러는 거라고.

아니, 살이랑 레이디 교육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들이 그렇게 떠드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아빠한테 걸맞는 사람이 되어야지.

우리 아빠가 짱짱맨이니까.

아빠 얼굴만 보고 있어도 가슴이 간질간질 행복한 느낌에 헤- 하고 웃자 그런 내 얼굴을 보며 아빠 역시 마주 웃어 주었다.

“오늘 아빠랑 놀러 나갈까? 레티시아 사고 싶은 것도 사고.”

“우와아! 네!”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은 채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물론 필요한 건 집에 다 있었다.

사시사철 옷부터, 신발, 모자 하며 어린 내가 갖춰야 할 장신구까지.

아주 비싸고 좋은 게 아니어서 그렇지 대외적인 자리에서 최소한의 구색은 맞춰야 했기에 벨리아 숙모가 다 갖춰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사 주는 건 다르지!

“좋아요!”

해서 방방 뛰며 좋아하자 아빠의 얼굴에 미소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미소에 나도 또 기분 좋아져서 헤, 하고 웃었다.

“헤일, 나 아빠랑 나가따 올게.”

그 말에 식기를 설거지통에 넣은 헤일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럼 전 저택에 잠시 다녀올게요. 아기씨 옷가지 좀 챙겨 오려고요.”

“웅! 나 아빠 갈 때까지 여기에서 같이 있을 거야. 군데 아빠, 몇 밤 자고 가?”

해맑게 이야기하다 문득 아빠가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웃어야 하는데. 희한하게 웃으려고 하면 할수록 얼굴이 삐뚤어지는 것만 같았다.

못나 보일 텐데.

그리고 역시나 그런 나를 빤히 보고 있던 아빠의 표정도 살짝 굳어지는 게 보였다.

“아니야.”

해서 아빠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양 손바닥으로 볼을 주물렀다.

“아니. 아니야, 아빠. 레샤도 아빠 바쁜 거 알아요. 어리광부리려고 그런 거 아니구. 내 표정 이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쪼꿈 서운해서 그런 거야. 레샤 괜찮아.”

‘이게 왜 이러지?’ 하며 굳어진 얼굴을 손으로 주물렀다. 하지만 얼굴은 어째 더 이상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빠가 일찍 가서가 아니라, 내 표정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게 속상해져 울상을 짓자-

“레티시아.”

그런 나를 약간은 안쓰러운 듯 보던 아빠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우리 레티시아, 아빠 없는 사이에 정말 다 컸구나.”

그러곤 얼굴을 주무르는 내 손을 잡았다.

“근데 레샤야, 레티시아는 그런 거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 넌 그냥 어리광부려도 되는 나이란다. 아빠의 사정이나, 다른 어른들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아도 돼.”

아빠의 말에 어쩐지 또다시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질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아빠가 해 준 말에 어쩐지 내 과거들이 위로받는 느낌이라, 시큰거리는 코끝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근데 여기서 울면 아빠가 또 걱정할 거 같아, 눈물을 꾹 참고 입꼬리를 당겼다.

“그럼 아빠 일곱 밤, 아니 열 밤 자고 가요.”

해맑은 내 말에 짧게 한숨을 내쉰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마.”

* * *

헤일이 저택으로 떠나는 걸 배웅하고, 아빠와 함께 길을 나섰다.

아침나절의 소란은 조금 잦아들긴 했으나, 여전히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귀족들이 많이 사는 던힐이나 리에트 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하긴 귀족들이 주로 사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기 위해선 정원에서 한참을 걸어 나와야 하니까. 근데 여긴 문만 열면 도로고, 고개만 돌리면 옆집이었다.

아마 옆집에서 뭐라 싸우는 소리까지 다 들리지 싶었다.

죽기 전까지 익숙하게 듣던 그 소리에 어쩐지 정감이 느껴졌다.

정감이라니.

처음엔 그 낯선 소리에 밤잠 못 자고 매번 깜짝깜짝 놀래서 깨곤 했으면서.

낯선 소리만 들려도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었는데.

근데 나 어제 엄청 잘 잤어.

집이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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