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아빠의 물음에 아주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계자가 되고 싶어요.”
“…….”
그래요, 아빠 딸이 이렇게 권력욕이 있답니다.
하지만 수줍게 고백한 나와는 달리 아빠는 내 말에 조금, 아니 많이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내 말을 끝으로 아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나를 안은 채 걷기만 했다.
‘너무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나.’
조금 돌려 말할 거나 아니면 나중에 말할 걸 하고 살짝 후회가 되어 흘끗 그를 올려다보자-
“레티시아.”
아빠가 뭔가를 결심한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
“혹시, 그 후계의 자격을 갖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을까?”
의미?
후계의 자격에 후계자가 되는 거 말고 다른 의미가 있었나?
책임감이나 뭐 그런 건가? 싶어 고개를 젖혔다.
“책임감 같은 거요?”
“아니.”
내 말에 고개를 저은 아빠가 마른 입술을 살짝 말았다 물었다.
말을 고르는 듯 신중한 아빠의 얼굴에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그런 내 눈동자에 엷게 웃은 아빠가 내 뺨을 톡 하고 건드리듯 매만졌다.
“후계의 자격을 갖는다는 의미는 자격을 갖춘 그 순간부터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미워해야 함을 뜻한단다.”
웃고는 있지만 조금은 아프고, 쓸쓸한 목소리였다.
* * *
30년 전.
“샤리에 도련님, 저택에 오랜만에 가시는 건가요?”
“응.”
“얼마 만이죠?”
“2년 만인가.”
“설레셔요?”
“아니.”
시종의 물음에 샤리에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오네에 있었던 지난 2년간, 샤리에는 단 한 번도 황도에 있는 에시어 저택에 방문해 본 적 없었다.
다른 직계들은 오네에 있으며, 일이 있거나 중요한 행사 때는 오가기도 하는 것 같았으나, 샤리에에게는 가지 않았다.
반갑게 맞아 줄 이 하나 없는 그곳에 제 발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간다 해도 있을 곳도 없고.
오네에 가기 전에 잠시 지냈던 방도 제가 떠난 그 날로 다 치울 거라며, ‘혹시라도 네가 온다 해도 있을 곳은 없단다.’라고 소공작부인께서 친히 못 박아 놓기도 하셨으니까.
‘그러니 오지 말거라.’
아예 오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웃으며 다정히 건네던 소공작부인의 날 선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일렬로 쫙 펼쳐져 있는 거리를 마차가 시원스레 달려 나갔다.
* * *
“공작님과 소공작님께서는 일 때문에 외국에 나가 계셔서 부득이하게 제가 나왔습니다.”
“괜찮아.”
“지내실 곳은 여깁니다.”
맞이해 주는 이 하나 없이, 본관에서도 가장 먼, 후원을 두 개나 지나야 나오는 동쪽 별관 앞에 선 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부터 도련님께서 쓰시게 될 처소입니다. 이쪽은 도련님을 모실 나오미, 저쪽은 에반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닥터 에멧.”
샤리에의 목소리에 모자를 살짝 벗어 인사를 하려던 에멧이 고개를 살짝 들며 엷게 웃었다.
“기억하십니까.”
“응, 바보는 아니니까.”
그리 말하곤 고개를 돌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동쪽 별관을 올려다보았다.
말한 대로 바보는 아니기에 이 별관이 제게 의미하는 바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영원한 이방인.’
영원히 에시어로 인정받지 못하는 에시어.
-라고 말하는 그들의 의미를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상관없었다.
후계의 자격을 갖췄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자신을 환영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럼에도 오네에서 2년을 보내고 돌아온 건 엄마의 바람을 이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샤리에, 부디 마고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 줘.’
아버지를 너무 많이, 깊이 사랑했던 엄마의 바보 같은 바람을 말이다.
그 날 이후, 샤리에는 동쪽 별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건 검술 수업뿐이었는데, 그것도 일 년여가 지나면서부터는 그를 가르칠 수준의 선생이 나타나질 않아 수업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의 나이가 고작 열 살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 에시어에서 조금씩 이방인처럼 떨어져 나가던 샤리에는 몇 년 지나지 않아 황궁 기사단으로 발탁되었다.
그러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백부장, 천부장의 역할을 하다 열다섯의 나이에 소드마스터에 올라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이 되었다.
실력으로는 그 누구도 샤리에를 따를 수가 없었고, 심지어는 귀족답지 않은 인성까지도 사람들의 추앙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샤리에는 에시어에서 점점 멀어졌고 그를 향한 소공작부인의 미움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지만 샤리에는 솔직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직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이었고, 무엇보다 샤리에는 애당초 가주직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생각을 소공작부인과 안드레아를 볼 때마다 꺼내 놓았지만 그들은 귀를 닫은 것처럼 샤리에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마치 음흉하게 발톱을 숨기고 있다는 듯 저를 미워하고 견제했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샤리에에 대한 그들의 미움이 더더욱 짙어졌을 무렵, 에시어로부터 소식이 들려왔다.
“부단장, 부단장네 막내 여동생이 검기가 있다면서요?”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에 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막내 여동생이라면-
“누구, 미쉘?”
“네. 소드인 거 같던데요? 도검류요.”
부관의 말에 샤리에가 미간을 좁혔다.
심지어 활도 아닌 도검?
미쉘의 나이가 이제 여덟인가 그럴 텐데.
‘괜찮나?’
뒤늦게 발현되는 이능이 고통스럽다는 건,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는 걸 기사단에 들어와 알게 되었었다. 평민들 중에서 몇몇은 일고여덟 살의 나이에 이능이 발현되는데 그때마다 고통이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으니까.
그렇다는 건 미쉘도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조금 잘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깊은 수면 상태에 들어가 그 기간을 보내는 건데.
그것도 이능력자와 마법사가 함께 조절해 주어야만 했다.
‘근데 에시어에 그걸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에멧에게라도 연락을…ㅍ.’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듯 고개를 내저었다.
‘괜한 걱정이야.’
에시어에 사람이 몇인데. 저나 여기 기사 나부랭이들도 아는 걸 모르겠는가, 싶었다.
거기다 아직 소문이 확 퍼지지 않은 걸 보니 발현까지는 되지 않은 듯했고.
뒤늦게 이능을 발견하게 되면 원래 발현까지의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곤 했다.
‘그러니 나중에.’
‘저택에 갈 일이 생기면 그때 알려 주던가 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검을 집어 들었다.
미쉘의 이능이라는 도검이었다.
‘나중에’라고 미뤄 뒀었는데,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샤리에는 장례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유언이었다고 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단으로 아버지의 측근인 리비에 백작이 찾아왔다.
“아버님께서 들어오라십니다.”
“무슨 일로.”
“그것까지는 저도.”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모를 그녀의 반응에 일단은 마차에 올라탔다.
시원스레 공기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마차의 차창 밖 풍경에 샤리에는 어쩐지 오네에서의 2년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가던 그 날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저도 에시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하찮은 마음을 품었던 그 날이.
아무도 환영해 주는 이 없던 그 날, 이 플라타너스 길을 지났던 것이 문득 떠오른 샤리에가 흐릿하게 웃자 리비에 백작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그리 웃으십니까.”
“그냥 어릴 때 생각요.”
어릴 때라는 말에 동그랗게 뜬 눈을 접어 웃는 그녀를 보며 마주 웃은 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오네에서 2년 보내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길 지났는데, 그땐 아무래도 어렸던지 이 길을 지나 저택으로 들어가면 제가 정말 에시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거 같아요.”
“…….”
“그냥 그때 기억이 나서, 조금. 아.”
침묵하는 리비에 백작을 돌아보던 샤리에가 문득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
“미쉘이 이능이 있다면서요. 검기라고 하던데 발현이…….”
“아, 그거요. 이능이 아니었습니다.”
“이능이 아니면.”
“그냥 미쉘 아기씨의 검술이 그 나이대 답지 않게 너무 뛰어나, 검술 선생이 호들갑을 떤 모양이더라고요. 이능이 있는 게 아니냐. 검사를 해 봐야 한다. 하면서요.”
“…….”
“그래서 다들 조금씩 들뜨기도 했고……. 소공작부인, 아니 공작부인께선 기대도 많이 하셨는데, 결론은 아니었죠. 뭐.”
리비에 백작이 많이 실망하던 미쉘의 모습을 떠올리곤 쓰게 웃었다.
“공작님도 실망하시고 뭐 다들 그래서 그 부분은 쉬쉬하는 모양이에요. 그러니 도련님께서도 말씀하지 마세요.”
백작의 말에 샤리에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이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