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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73)화 (73/141)

73화

“오셨습니까, 도련님.”

마차가 본관 앞 동에 멈춰 서고, 이내 열린 문 앞에 서 있던 집사장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가끔 저택에 들를 때면 저를 맞이해 주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극진함에 의아함을 느낀 샤리에가 마차에서 내리자 이번엔 현관 앞에 사용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미친 짓인가, 싶어 리비에 백작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 *

“집으로 들어와 후계 수업을 받거라.”

“…….”

말을 듣기는 했는데, 이해가 잘 안 되었다.

후계 수업이라니.

“제가 왜, 안드레아가 있지 않습니까.”

“네가 장남이 아니더냐.”

“잊으셨습니까. 전 사생아입니다, 아버지.”

“…….”

서류에 파묻힌 채 말을 잇던 마고가 샤리에의 말에 안경을 벗었다.

“지금 나를 비난하는 것이냐.”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오네의 2년으로 네 자격은 충분히 갖춰졌다.”

“공작부인의 직계들이 있습니다. 저는…….”

“내가 정한 후계는 너다.”

마치 선대 공작님께서 돌아가시기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마고의 말에 샤리에가 미간을 좁혔다.

“싫습니다.”

“샤리에 에시어.”

“전 가주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아무 내색 없으시질 않으셨습니까. 갑자기…….”

“내가 갑자기 가주가 되었으니까.”

마고의 말에 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에 길게 한숨을 내쉰 마고가 안경다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가 아니다. 네가 오네에서 2년을 보내고 돌아온 날부터 내가 정한 후계는 너 하나뿐이었으니까. 이 집안에서 너만 몰랐을 뿐이다.”

“…….”

그러곤 그 말을 끝으로 안경을 도로 쓴 마고가 보던 서류를 마저 살피려 고개를 숙였다.

나만 몰랐던 이야기라니.

그럼 안드레아와 윈드런은, 공작부인은.

“아버지.”

“앞 동에 네 방을 마련해 놓을 테니, 기사단은 오늘부로 정리하고 들어오너라. 일주일이면 충분히 정리할 시간은 되겠지. 척 지는 거 없이 잘 마무리하고 들어와. 행정부에 네 자리 만들어 두마. 몇 년 구르다 보면 익숙해질 거다. 루시아도 있으니 별 문…….”

“아뇨.”

일방적인 통보에 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알겠다.”

그리고 그런 샤리에를 마치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마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

그 며칠 뒤에는 당연히 제 뜻대로 움직일 거라 확신하고 있는 말투였다.

“공작님을 너무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나름 고충이 많으셨습니다.”

리비에 백작이 따라 나와 샤리에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도련님을 챙기지 않으려 하신 게 아니라, 선대 공작님의 눈이 도련님을 향하는 게 두려우셨던 겁니다. 그 시선이 닿는다고 해도 지켜 주지 못하셨을 테니까요.”

알고 있다.

아버지가 왜 제게 매정하게 굴었는지.

할아버지의 시야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게 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셨다는 것도. 그래서 원망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를 이해까지는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해해 버리면 제 어린 날들이 너무 안쓰러워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더는 아버지를 두둔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그대로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그런 내색을 알아차린 듯 리비에 백작이 하던 말을 멈추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집에서 좀 쉬다 내일 나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본관에 잠자리를 봐 놓으라 이르겠습니다.”

백작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그 말대로 해는 이미 진 지 오래였다.

말도 타고 들어오지 않아 가문의 마차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 밤길을 오가게 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별관에 가서 쉬다 아침에 나가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얼굴을 쓸어내리자, 뭐라 한 마디 더 붙이려던 백작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는 매일같이 오갔던 길을 천천히 가로질러 별관으로 향했다. 좋아했던 익숙한 후원과 정원들이었지만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저 속이 타들어 갈 것처럼 더운 숨을 빨리 씻어 내고 싶었다.

“하아.”

숨을 몰아쉬며 별관에 들어간 순간, 품에 넣어 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자 순식간에 샤리에의 손에 딱 맞는 장검으로 변화했다.

지잉지잉.

검기가 제가 별관에 만들어 놓은 수련 공간을 울렸다.

“하아.”

지금은 뭐라도 베어 내지 않으면 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해서 눈앞에 보이는 허수아비들을 향해 검을 내리치자-

“내 거야. 건드리지 마.”

그의 뒤쪽에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기세에 놀란 듯 검집을 움켜쥔 채 허수아비를 건드리지 말라 말하는 그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샤리에가 검을 내렸다.

“미쉘, 너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어.”

제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달빛 아래로 걸어 나온 미쉘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내 동생 이름도 모르는 천치는 아니야.”

“그럼 내가 미쉘인 건 어떻게 알았어?”

“마찬가지로 동생 얼굴도 모르는 천치는 더더욱 아니니까.”

샤리에의 말에 미쉘의 입가가 슬쩍 실룩이는 게 보였다.

하지만 웃는 얼굴은 보여 주지 않으려는 듯 입꼬리에 최대한 힘을 준 미쉘이 고개를 들었다.

“어쨌든 저 허수아비들 오늘 내내 내가 만들었어. 그러니까 화풀이할 거면 다른 데 가서 해.”

그 말과 함께 미쉘이 손과 칼자루를 고정해 놓았던 흰 천을 둘둘 풀었다.

두꺼운 천 안쪽에 스며 있던 피가 배어 나왔다.

“아야.”

쓸린 상처가 쓰라린지, 얼굴을 찌푸린 미쉘이 그대로 검을 놓아 버렸다.

그 모습에 샤리에가 미쉘 가까이로 다가가자, 손바닥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능은 아닌 모양이에요.’

귓가를 울리는 리비에 백작의 목소리에 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8살밖에 안 먹은 아이가 손바닥과 손이 저렇게 될 때까지 수련을 했으니, 검술 선생이 호들갑을 떨 만도 했겠다 싶었다.

“너 손.”

“괜찮아, 내일 마력으로 치료받으면 돼.”

그런 식으로 선생들을 속여 온 모양이었다.

손은 멀쩡한데, 검술은 매일 같이 늘지.

선생들이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에 샤리에가 미쉘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미쉘 에시어.”

“왜.”

“너 이능 없는데 왜 사람들한테 말 안 해?”

샤리에의 말에 미쉘이 고개를 들었다.

“없다고 말해야 해?”

“…….”

“나 있다고도 말 안 했는데?”

미쉘의 말에 샤리에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좋아서 훈련했고, 아픈 거 싫어서 치료받았고, 상처 있으면 훈련 못 받으니까 아침마다 수업 전에 받은 거야. 내가 한 일에 잘못된 거 있어?”

“…….”

“오빤 오빠 갈 길 가고, 나는 내 갈 길 가고.”

고작 8살짜리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싶은 생각이 언뜻 들었다만,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래.”

“근데.”

해서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그런 샤리에를 미쉘이 붙잡았다.

“이능력이 있으면 뭐가 달라? 노력해도 못 이겨?”

제가 검을 계속 잡아도 되는지가 궁금한 듯한 미쉘의 말에 샤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노력하면 이겨. 근데 너 그래서는 노력해도 못 이겨.”

“…….”

“상처나 께끗하게 관리해. 그대로 두면 덧나서 검 못 잡는데.”

샤리에의 잔소리에 미쉘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곤 제 손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손을 닦으려 몸을 일으켰다.

검은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은 채, 일단 제 말대로 할 참인지 물가 쪽으로 뛰어나가는 미쉘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몸을 돌리자-

“샤리에.”

앞쪽 통로에서 걸어들어오는 공작부인이 보였다.

“부인.”

“너 왜 들어온 거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아주 보란 듯이. 왜 네 아버지가 네게 소공작 자리라도 약속하든? 그래서 들어온 거야?”

“부인.”

“부르지 마!”

소리를 빽 하고 내지른 공작부인이 양손으로 귀를 막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그때 널 죽였어야 했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바닥을 훑던 부인이 미친 사람처럼 떨어진 검을 주워들었다.

“부인, 그러지 마세요. 검은 내려놓고.”

“아니? 난 그럴 수가 없어. 네 엄마가 내 남자를 차지하고, 네가 내 자식의 자리를 차지하게 가만둘 것 같아? 어림도 없지.”

“부인.”

“네가 오네에서 돌아온 그 날 죽였어야 했어. 후계의 자격을 갖추었을 때에. 안드레아의 자리를 노릴 거라고 생각했어야 했어.”

울며 고개를 내젓는 공작부인이 악귀처럼 고개를 쳐들고 샤리에를 노려보았다.

“검이라도 내려놓으세요. 다치세요, 부인. 제발.”

하지만 만류하는 샤리에의 목소리에도 공작부인은 칼끝을 그에게 드리운 채, 달려들었다.

“제발…… 죽어 다오, 샤리에.”

“엄마!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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