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76)화 (76/141)

76화

“베넷.”

마고가 먼저 떠나고, 샤리에가 자리에 남은 베넷을 불렀다.

“예.”

“올가는 불러 왔나?”

“네, 며칠 전에 이능 발현하셨을 때에 올가가 곁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가가 뭐라 했지? 아이의 특성.”

샤리에가 베넷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포기 못 하시는 이유. 그 특성 때문이잖아.”

“…….”

베넷이 샤리에를 빤히 바라보았다.

놀라우리만큼 마고 에시어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저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아 자세한 걸 알지는 못했다.

“저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저 이능력의 기질이 이타성을 띠고 있다는 것 정도밖에는.”

“이타성?”

베넷의 말에 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이타성이라면.”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그 특성의 기질을 가진 인물에 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초대 테파로아 황제.’

그의 최후를 알고 있는 제가 그 기질을 레티시아와 동일 선상에 올릴 수는 없었다.

“다른 건.”

“배운 적 없는 제국어와 고대어를 읽으십니다. 그리고 며칠 전 물에 빠질 뻔한 제이슨 도련님을 구해 내셨고요.”

“그리고.”

쥐어짜듯 묻는 말에 베넷이 안경을 올려 썼다.

이 이능에 대해서는 함구하라 하셨지만, 이대로라면 샤리에가 아는 건 시간문제였다.

“올가조차 판단을 미뤄 놓은 상황에서 제가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으나.”

“잡설이 길어. 그래서 요점만.”

“미래를 보십니다.”

앞뒤를 너무 다 잘라먹은 베넷의 말에 샤리에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베넷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전 아기씨의 이능이 예지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 *

하지만 베넷이 내가 미래를 본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는 그 시각.

다른 미래는 잘도 보는 난 내 미래는 보지 못한 듯했다.

“어? 주인님이시네.”

망했네.

헤일네 집에 가는 와중에 하필 리안을 딱 만나다니.

저 뒤로 돌아갈걸.

지금이라도 뒤돌아서 돌아갈까?

오만 생각을 하며 일정 거리를 벌리듯 자리에 멈춰 서자, 리안과 쟈이든도 덩달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매우 기묘한 대치 상태였다.

그 자리에 있는 네 사람. 아니 저 뒤에 피어스까지 다섯 명 모두 가지도 오지도 않고 유지하는 그 일정 거리라니.

국경선도 아니고. 괜히 이럴 거 뭐 있나 싶어 내가 먼저 손을 들었다.

“안녕.”

“안녕.”

그리고 동시에 나온 인사에 쟈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둘이 뭐 해?”

그러게 우리 둘이 뭐 하냐, 이거.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상황에 어깨를 으쓱하며 헤일의 손을 잡았다.

“헤일, 가쟈.”

“네.”

이렇게까지 눈치 볼 상황이 아닌데. 내가 괜히 또 밀어낼까 싶어 겁을 집어먹은 게 문제였다.

그냥 자연스럽게 굴면 되는걸.

하지만 마음과 달리 어째 발과 팔이 같이 앞으로 나가는 느낌이었다.

뻣뻣한 게 무슨 나무토막이냐고.

어쩐지 우스꽝스러워 보일 모습에 헤일의 손을 꼭 잡고는 리안을 지나치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 나중에 봐.”

“어.”

“주인님, 나는요.”

“쟈이든두.”

“근데 주인님,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순간, 쟈이든의 매우 날카로운 질문에 헤일의 손을 잡고 그 두 사람을 지나치다 멈춰 섰다.

생각해 내자.

“아, 응. 폴이 말해 줬어.”

“아, 역시.”

역시라고 생각했으면 물어보지 말아 줄래?

간담이 서늘하게 떨어졌다가 위로 올라붙는 느낌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 더 있으면 안 되겠다.

얼른 헤일네 집에 가야지 싶어 진짜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안녕.”

“고마웠어.”

“아, 어, 응?”

순간 등 뒤에서 들린 리안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고마웠다고. 엄마 돌아가셨을 때 옆에 있어 줘서.”

얘가 나를 아주 가지고 노는구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말 한마디에 이틀 동안 얘한테 받은 서운함이 싹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너무 매정하게 밀어내서 미안해. 그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어. 너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 아니야. 그럴 수 있어.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내가 그랬잖아 나 신경 안 써도 된다구.”

이렇게까지 사과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얼굴이 어쩐지 붉어질 것만 같았다.

귀 끝이 뜨끈뜨끈해지는 느낌에 한쪽 손으로 귀를 식히려 손을 올리자 내 손보다 쟈이든의 손이 더 빨랐다.

“내 걸로 해요. 내 손이 더 차가워요.”

“어, 어. 그래.”

시원하긴 하네.

근데 이 어색한 분위기는 어쩔 것인가.

“…….”

하지만 쟈이든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보였다. 아니, 그에겐 나 말고는 아무것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다만 내가 리안을 챙기라고 했기에 명령을 수행하듯 그를 흘끗댈 뿐.

그러다 정 붙고 그래서 같이 잘 지내면 되는 거지.

“이제 됐어. 고마워, 쟈이든.”

“내가 정말 옆에 없어도 되겠어요?”

“응, 괜찮아.”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려 살짝 밀어내곤 도로 헤일의 옆에 바짝 붙어서 섰다.

이제 진짜 좀 가자.

이대로 가다간 여기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다시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네, 주인님도요.”

쟤도 저런 캐릭터 아니었는데.

붕붕 손을 흔들어 주는 쟈이든의 인사 옆에 리안이 조그맣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또 마음이 짠해지는 것만 같아, 걸어가다 말고 멈추어 몸을 돌렸다.

“둘이 뭐 먹었어? 저녁 먹었어?”

“아니, 나도 얘도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존대도 아닌 것이 반말도 아닌 것이.

어딘가 이상한 쟈이든의 대답에 리안을 바라보았다.

“괜찮으면 뭐 먹고 가. 빵이라도.”

물론 헤일네 집에 음식을 맡겨 둔 건 아니었지만. 주변 상점에서 사서 들어가도 되는 거고.

해서 헤일을 올려다보자, 그녀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기씨, 어서 오세요. 어머나, 손님들이 잔뜩이네요.”

펠이 반갑게 나와 사람들을 맞으며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다들 어서 오세요.”

헤일과 똑같이 생긴 얼굴로 반갑게 사람들을 맞아주는 펠의 모습에 놀란 리안이 헤일과 펠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쌍둥이네.”

하지만 놀란 리안과 달리, 쟈이든은 익숙한 듯 흘끗 보고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투니아에서는 흔해, 쌍둥이. 근데 진짜 유달리 똑같이 생기긴 했네.”

“내가 조금 더 여성스러운 편이지.”

펠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웃었다.

그 모습에 리안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쫓아 들어가며 펠에게 작게 속삭였다.

“미안, 펠.”

“별말씀을요. 요것만 든든히 챙겨 주면 상관없어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은근하게 보이는 펠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웅, 나 돈 많아.”

“자! 그럼 오늘 한번 만찬을 제대로 즐겨 볼까요?”

돈 많다는 내 말에 펠이 신이 난 듯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고기 싫어하시는 분?”

* * *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저녁을 먹는 내내 이어졌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정확히 9시를 넘기자 고개가 앞뒤로 푹푹 꺾이기 시작했다.

“아기씨 졸리신 거 같은데?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르는 펠의 말에 고개를 돌린 헤일이 레티시아의 머리를 받쳐 주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기씨, 집에 가실래요?”

“우웅, 나 졸려.”

헤일의 물음에 두 번 생각하지도 않은 레티시아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안기는 순간에도 뒤로 살짝 넘어갔던 고개가 앞으로 푹 하고 꺾이듯 묻히는 모습에 펠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진짜 피곤하신 모야……양이신데.”

하지만 그 순간, 남자 셋이 하나같이 먹던 것도 멈춘 채 레티시아의 머리를 받쳐 주고 싶어 손을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펠이 ‘호오.’ 하고 웃었다.

‘다들 아기씨한테 반한 얼굴이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과 아기씨의 신분이 너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도 좋아는 할 수 있는 거니까.

펠이 셋 중에 누가 제일 잘 어울릴까, 쭈욱 훑어보다 마지막으로 레티시아를 돌아본 그때-

똑똑-

나무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헤일의 집인가요?”

나직한 남성의 굵은 목소리에 펠이 얼른 일어나 문을 열자, 레티시아와 꼭 닮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아주 많이 잘생긴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멀리서 모르는 사람이 봐도 ‘부녀지간이구나.’ 할 정도로 닮은 두 사람에 펠이 얼굴을 발갛게 붉히자, 안쪽 상황을 확인한 듯 ‘실례하겠습니다.’라며 안으로 들어온 샤리에가 헤일에게서 레티시아를 받아 들었다.

아주 안정적으로 안아 머리까지 가슴과 어깨 사이에 받쳐 든 샤리에가 들썩이던 남자 셋을 죽 훑어보곤 집 밖으로 나갔다.

‘어쩌냐. 너희는 완패다.’

부드럽게 들어와 우아하게 나가는 샤리에의 뒷모습에 펠이 가볍게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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