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고롱고롱 콧소리를 내며 잠이 든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샤리에가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혹여나 들썩이는 걸음에 아이가 깰까 싶어 조심스레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만 걷다 보니 아이를 이렇게 안고 있는 것 자체가 좋아 더욱 걸음이 느긋해졌다.
‘아기씨의 이능이 정말 예지라면, 아기씨 혼자서 버티기 힘드실 겁니다.’
‘가주님께서 지켜 주시는 데도 한계가 있고요.’
‘가주님께 익투스 진단을 받고 난 이후, 아기씨에 대한 걱정이 많으십니다, 샤리에 님.’
남은 이유가 저를 설득하기 위함이었던 듯 이어지던 베넷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베넷의 말대로 레티시아의 이능이 정말 예지라면, 제가 아이의 곁에 있는 게 가장 안전했다. 아이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위협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악의에 기생한 위협까지.
예지를 이능으로 타고 태어난 이들이 유달리 일찍 생을 마감했던 이유는 사람들의 악의 때문이었다.
특히나-
‘네. 후계자가 되고 싶어요.’
레티시아가 가주가 되고 싶다, 정말 그렇게 다짐했다면 더더욱 위험했다.
‘편히 살겠다 하면 좋을 텐데.’
이미 예지를 이능으로 타고 태어난 순간부터 가혹한 삶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것 이외에는 조금 편안한, 안온한 삶을 꿈꾸면 좋겠다는 게 아비 된 이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고작 6살밖에 안 되었으면서 왜 가주가 되고 싶은 걸까.
아니 6살이니까 꿀 수 있는 꿈이려나.
‘나중에 꿈이 바꿀 수도 있을까, 레티시아?’
아빠는 꼭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바꿔 주면 안 되겠니.
아이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희미하게 숨을 몰아쉰 샤리에가 멀찍이 보이는 눈앞의 집을 등지고 뒤를 돌았다.
‘한 바퀴만 더 돌고.’
아이의 머리를 조금 더 깊게 어깨에 묻으며 몸을 돌렸다.
그렇게 집 주변을 몇 바퀴쯤 더 돌았을까. 먼저 출발한 샤리에가 들어오지 않아 걱정이 된 피어스가 두 사람을 찾으러 나오고서야, 달밤의 산책이 마무리되었다.
“내가 곁에 있으마.”
사리에는 아이를 침대에 누이곤, 의자를 당겨와 침대 맡에 앉았다.
* * *
“저희 집엔 술이 없어서. 차 괜찮으시겠습니까.”
라우스 백작이 일찍부터 집으로 찾아온 스벤 백작을 향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술이든 차든 상관없다는 듯한 스벤 백작의 끄덕임에 하녀를 응접실로 들인 라우스 백작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의 찬 공기와 잘 어울리는 따뜻한 차의 온기에 라우스 백작이 찻잔을 들었다.
“그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그 날 폐하의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 깊이 생각해 보니, 경이 하신 말씀이 대부분 맞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의논을 드리고 싶은 것이 생겨 이리 아침부터 무례를 무릅썼습니다.”
장황하게 말이 긴 걸 보니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지.
아무래도 수상쩍은 느낌에 라우스 백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별다른 기대 없이 라우스 백작이 그를 바라보자, 스벤 백작이 한 모금 머금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경의 말씀대로 에시어에 도움을 청하는 게 옳지 싶습니다.”
“…….”
엉덩이를 최대한 뒤로 빼고 있던 라우스 백작이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이 작자가 지금 무슨 꿍꿍이속인가.
알 수가 없었다.
네투아 공작가에서 절대 달가워하지 않을 텐데.
오랜 숙원인 마고 에시어를 주류 무대에서 내려 보냈는데, 이렇게 되면 다시 그가 귀족 사회의 중심이 될 게 불 보듯 뻔했다.
한데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스벤 백작이 에시어를?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스벤 백작 또한 그런 제 꿍꿍이를 숨길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아니,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지금은 아주 딱 맞아 떨어질 테니까.
“폐하게 말씀드려 샤리에 에시어를 제국군 단장으로 임명할까 합니다.”
스벤 백작의 말에 라우스 백작이 엉덩이를 살짝 들썩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미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수였다.
지금 샤리에 에시어를 제국군 단장으로 임명하면, 그는 당연히 펠루아나 전투에 출병해야 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마고는 제 사생아 아들인 샤리에를 장자로 입적시킬 정도 아끼고 있었다. 그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마고가 지금처럼 무시로 일관할 수는 없을 터.
문제는 탈루스였다.
“샤리에가 탈루스를 비워도 되겠나.”
“곧 탈루스도 겨울이라, 마물의 활동량도 줄어드는 시기라 하더이다.”
“아, 맞아.”
가뜩이나 추운 탈루스의 겨울은 그야말로 얼음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혹독하다 했다. 그래서 마물들도 활동량을 줄인다고.
물론 개중에는 그 추위에도 활동하는 마물도 있지만, 그 개체 수가 현저히 적었고 힘도 약했다.
그러니 겨우내 이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그리고 다시 돌려보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스벤 백작의 말에 맞장구치듯 라우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황제의 신하이니. 어디서든 황명을 따라야지요.”
그 사악한 미소에 어쩐지 찜찜함을 느낀 라우스 백작이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근데 탈루스에서 예까지 보름 거리인데. 거기서 리비스까지 언제…….”
“모르셨습니까? 샤리에 에시어 지금 황도에 있습니다.”
“하.”
너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에 헛웃음을 지은 라우스 백작이 스벤 백작을 바라보자, 그가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신께서 테파로아 제국을 특별히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그래, 지금 상황은 그렇다고밖에는 설명되질 않았다.
펠루아나라는 시련을 주셨으나 이미 다 극복할 방법을 쥐여 주신 신의 은총에 라우스 백작도 찻잔을 들었다.
“신의 은총에 감사하며.”
“감사하며.”
마치 술잔을 털어 마시듯 떫은 차를 한입에 털어 삼킨 스벤 백작이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럼, 찬성하시는 걸로 알고 추진하겠습니다.”
* * *
오늘도 푹 자고 일어났다.
꿈도 안 꾸고 정말 푹, 아주 곤히 자고 일어나자 눈앞에 보이는 건 아빠였다.
“아빠다!”
“일어났어?”
아빠 냄새도 좋고, 아빠 품도 좋고.
다 좋았다.
“아빠, 안아 줘요.”
이틀 전에 처음 아빠를 만났을 때는 이런 어리광은커녕 앞에서 말도 잘 못 했었는데, 지금은 아빠한테 안기는 게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아빠도 내가 바닥에 발 딛고 있는 게 싫은 듯 어지간해서는 안아 주려 했다,
‘이러니 부모님이 다 해 주는 애들이 버릇이 나빠지지!’
하지만 그래도 좋은걸?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레샤도 좋은 꿈 꿨니?”
“꿈 안 꿨어요. 그리고 진짜 깊이깊이 잤어요.”
“잘됐네.”
아빠가 웃으며 계단을 내려오자, 펠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펠두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도 아침을 부탁해서 미안하군.”
“공짜로 부려 먹는 것도 아니신데요, 뭐.”
정당한 금전 지원.
그거면 되다는 듯 펠이 주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어제 저녁 식사는 얼마를 주면 되려나.’라고 생각하며 아빠 품에 안겨 식탁에 앉자, 얇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어젯밤 하루 방탕한 만찬에 쓰인 비용이 깔끔하게 정리된 계산서.
그걸 보며 고개를 들자, 펠이 약간 민망한 듯 눈썹을 긁었다.
“비싸다고 생각되실 수도 있는데……. 그게 밤이라 식재료가 조금 비싸기도 했고, 제 인건비도 있어서. 우와!”
펠이 적은 은화 6개에 4개를 추가로 더해 주머니에서 꺼냈다.
물론 아빠 주머니에서.
내 돈은 황도 저택에 있으니까.
그리고 아빠 돈이 내 돈 아니겠어요?
해서 아빠 돈으로 큰 선심을 쓰며 펠에게 주자, 저기서부터 헤일이 쫓아 나왔다.
“아기씨, 너무 많아요! 6개도 많아서 등짝 때리려고 그랬는데 10개는 너무 많아요. 6개만 주세요.”
“아, 왜에.”
“야! 넌 진짜 양심 좀 있어라. 으유!”
퍽퍽 소리가 나게 펠의 등을 때리는 헤일의 목소리에 아빠가 내가 준 은화에 10개를 추가로 더해 두 사람 쪽으로 밀었다.
“며칠 집에 머무르는 동안 식사를 준비해 주면 좋겠구나. 이건 오늘까지의 금액이고, 내일부터는 매일 은화 5개씩 주마. 재료비는 별도고.”
“끄아아아아!”
아빠의 말에 발을 동동거리던 펠이 끝내 참지 못하고 하늘로 팔을 뻗어 올린 채 소리를 질렀다.
너무 좋아 죽겠다는 듯이 내지르는 비명에 헤일이 다시 펠의 등을 후려쳤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 큽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입으로 틀어막으며 펠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급히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밖에 가서 본격적으로 소리를 지를 작정인 듯한 그녀의 뒷모습에 아빠와 마주 보며 쿡 하고 웃은 그때,
“으악!”
벌컥 문을 열고 나가는 펠의 앞에 제복을 입은 두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말아 쥔 주먹을 올린 채 굳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에 아빠 역시 굳어진 채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