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레티시아.”
행정관들이 돌아가고도 한참을 아빠 품에서 울던 나를 다독이는 목소리에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울어서 그런지 팅팅 부은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누르는 게 느껴졌다.
“녜.”
그래,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서럽게 울어 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작 그거 조금 틀어진 게 뭐 이렇게 울어 댈 일인지 말이다.
아빠는 검기를 2개나 다룰 수 있는 소드 마스터였고, 이능력자이자 기사단장이었다.
거기다 탈루스에서 마물들이랑 싸우는 것보다 안전할지도 몰랐다.
펠루아나는 사람인데 더 약하겠지!
그리고 아빠가 대장인데 직접 칼 들고 싸울 일이 뭐 얼마나 있다고.
그래, 나도 다 알고 있었다.
근데 눈물이 안 멈추는 걸 어쩌겠나.
눈물이 멈추면 흐르고, 그치면 또 울컥 흘러내렸다.
‘아빠가 우리 레샤 다 컸다고 해 줬는데.’
진짜 왜 이러는 건지.
스무 살이었던 정신 연령이 아무래도 이 몸에서 몇 달 살면서 퇴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토록 서럽고 슬픈 감정이 울컥울컥 올라와 제어가 안 될 수가 없었다.
어려지고 나서는 몸만 쉽게 피로해지는 게 아니라, 몸과 정신이 같이 힘든 순간에 문득 어린아이의 영혼이 튀어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이렇게 이 몸에 적응해 버리는 건가.
그건 아닐 거야.
그건 아니어야 해.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빠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푸르르 떨었다. 그 기척에 아빠가 내 등을 다정히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우리 레티시아가 왜 이렇게 울까. 아빠 속상하게.”
그러게요.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우는지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아빠.
이렇게 울어 댈 일이 전혀 아닌데 말이지.
차라리 이 시간에 이성적으로 아빠를 도울 생각을 해야지.
그래, 울 시간에 아빠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게 맞지.
“아빠.”
“응?”
“내가 가지 말라고 울어도 갈 거죠.”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역시.
그렇다면 일단은 숨을 가다듬고.
“펠루아나가 지금 리비스에서 싸우고는 있지만요. 그건 다른 영주들이 성문을 꽁꽁 닫아 감추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야 겨울 전에 황도로 올라올 수 있으니까요.”
“…….”
아빠가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어제 할아버지나 베넷한테 내 이능에 대해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빠가 빨리 가서 싸우고 얼른 레샤한테 돌아오려면.”
손끝을 톡 하고 튕겨 리비스와 기피르 그리고 황도까지 이어지는 지도를 허공 중에 그렸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그 지도를 한참 보던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맡에 놓인 의자로 문을 막듯 문고리에 걸쳐 기울여 놓았다.
그러곤 아빠도 손끝으로 지도를 그려 냈다.
대략적으로 모양만 흉내 낸 내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이걸로 설명하면 더 편할 거란다.”
“네.”
아빠가 그려 준 지도로 리비스 남쪽의 버려진 항구 끝에서 점선으로 그려 올라간 선을 기피르로 쭉 이어 올렸다. 그러곤 선을 5개로 나누었다.
제일 왼쪽, 황도에서 가장 먼 곳에 그어 놓은 선 위에 왕이라고 적었다.
“왕은 앞에 네 개로 교란하고 제일 멀리 돌아서 바로 황도로 가요. 그래서 여기. 기피르의 콴테 지역에서 앞선 군대들의 전투 상황을 보고받다가 순식간에 올라갈 거예요.”
물론 그때 할아버지에게 걸려서 다 박살 나고 크게 대패하긴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말에 의하면 이건 전적으로 제국의 패배였다고 했다.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무수한 전투들에서 다 졌고, 그래서 펠루아나를 황도 코앞까지 올라오게 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제국이 펠루아나에게 대패한 싸움이었다.
거기다 제국군이 너무 많이 죽기도 했고.
전쟁 중엔 그 무엇보다 무능한 지휘관이 가장 위험한 거라 했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
이번엔 아빠가 지휘관이니, 이렇게 대패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빨리, 할아버지가 펠루아나의 왕을 잡고 승보를 전했던 그 시기보다 하루라도 더 빨리 끝내고 돌아왔으면 싶었다.
“근데 여기요. 코루누 지역요.”
리비스에서 기피르로 향하는 깔때기.
여기를 틀어막으면 끝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영지가 길게 조성되어 있는 리비스과 기피르를 가르는 피리 산맥이 뚫려 있는 곳이 여기가 유일했으니까.
제국에서도 절대 피리 산맥을 넘지 못할 거라는 자만 때문에 여기 코루누가 뚫렸던 거였다.
펠루아나는 오직 여기를 뚫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으니까.
“제일 먼저 여기를 막아야 해요.”
* * *
“샤리에가 기사단장이 되었다고?”
아침나절부터 들려온 기분 나쁜 소식에 벨리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탈루스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기어 나와서는 사람 속을 뒤집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이 또 발작하겠네.’
며칠 전, 마고가 오네에 샤리에를 만나러 갔을 때 크게 발작한 걸 달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안드레아에게 소식이 전해져 또 그 지경이 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케이트, 나 두통약.”
벨리아는 소파에 늘어지게 누웠다.
이마에 손을 올린 채 잠시 눈을 감자-
“엄마.”
챈들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채디?”
“엄마, 나 손가락에 물집 잡혔어.”
며칠 전, 가주님의 명령으로 필사를 백번 한 탓에 며칠을 앓다 일어나더니, 손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었다.
“케이트, 얼른 의사 들어오라 그래.”
“네.”
벨리아의 명에 다급히 하녀가 밖으로 나가고, 중지를 들어 올린 채 울먹이던 채디가 이내 씩씩 대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게 다 그 더러운 년 때문이야. 요즘 제이슨도 나랑 잘 안 놀아 주려고 한다구!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느닷없이 잘 있다 발작하듯 화를 쏟아 내는 챈들러를 벨리아가 꽉 끌어안았다.
“내 새끼. 괜찮아, 네 잘못 없어. 그럼, 없고 말고. 엄마가 그것들 아주 혼쭐을 내 줄게.”
“엄마아, 진짜지? 약속해.”
“그러엄! 우리 아들, 엄마 믿지?”
안았던 손을 풀어 거리를 벌린 벨리아가 챈들러의 토실토실한 뺨을 양손으로 꾹 하고 누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움, 미더.(웅, 믿어.)”
“그래, 우리 채디는 엄마만 믿어. 엄마가 그 영악한 계집애, 후계 자격은커녕 당장에 이 집구석에서 내쫓아 줄게.”
“정말?”
“그러엄! 우리 채디도 못할 걸 그 애가 할 수는 없지. 안 그래?”
“웅, 엄마. 직계인 나도 못했는데, 그 계집애가 하게 둘 수 없어.”
챈들러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눈을 반짝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에 벨리아가 얼굴을 차갑게 일그러트렸다.
그러고 보니, 내 아들이 못 한 걸 그 애가 하게 둘 수는 없었다.
‘후계의 자격. 샤리에가 그걸 가졌던 게, 그게 모든 악의 씨앗이었어.’
‘내 자식들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만들어야겠어.’
안드레아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후계의 자격. 그게 모든 악의 씨앗이었다고.
그러려면 일단 가주님의 신임을 떨어트려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요즘 그게 아주 영악해져서 곁에 사람 심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그 헤일이라는 하녀가 대체 뭘 얼마나 받고 있는 건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고도 했다.
‘생각해 보면 아리나랑 엘린이 있었을 때가 참 편했…….’
순간 아리나와 함께 엘린이 했던 말이 떠오른 벨리아가 엄지로 입술을 매만졌다.
‘아기씨께서 요즘 돈을 찾는다고 하십니다. 아기씨 앞으로 들어오는 돈도 물어보시고, 샤리에 님께서 보내 주시는 돈은 어디 있냐고 묻기도 하셨다는데요.’
그 당시엔 단순히 ‘이제 제 것을 챙기려고 하나, 괘씸한데.’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제 직감은 단순히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뭘 샀으려나?’
‘지가 살 게 뭐가 있어서?’
조금 알아봐야 하나 싶어 벨리아가 손톱 끝을 톡톡 깨물었다.
아무래도 그걸 파다 보면 고 계집애를 내쫓을 뭔가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하지만 이걸 제가 혼자 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이런 건 움직이는 사람을 따로 두고, 난 슬쩍 말만 던지고 뒤로 빠져 있어도.’
충분하지 않겠나 싶었다.
“케이트.”
“예, 부인.”
“지금 막내 동서 어디 있지?”
“후원에서 알레프 도련님과 산책 중이신 거 같았습니다.”
“알레프가 왔어?”
“네. 아카데미가 며칠 휴강이라 어젯밤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그럼 우리 레오는?”
“형은 어디 술집에 있겠지. 애인 만나러 갔거나.”
챈들러가 테이블 위에 놓인 간식을 입에 꾸역꾸역 넣으며 말했다.
“제발, 채디. 음식 입에 넣고 말 좀 하지 말라고. 넌 대체 누굴 닮은 거니.”
“엄마, 아빠 아들이니까 엄마, 아빠 조금씩 닮았겠지.”
챈들러가 어깨를 으쓱하다 이내 오른쪽 팔이 아픈 듯 울상을 지었다.
또다시 시작되려는 아이의 울음 떼에 벨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아후, 머리야. 케이트 의사는 언제 온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