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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83)화 (83/141)

83화

‘그, 그러니까 내 말은 아등바등 독하게 살지 말라는 소리야.’

상처 입은 듯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향한 팅커벨의 마지막 말이 저택으로 돌아와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명처럼 맴돌았다.

내가 또, 죽는다고?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또.

“…….”

그런 게, 아니 그런 법이 어딨어?

이시아 때도 스무 살에 죽었고, 레티시아가 사망한 나이도 스무 살이었다.

근데 이번 생도 내가 스무 살에 죽는다면.

‘내가 뭐 한다고 이렇게 열심히 살아?’

팅커벨의 말처럼 ‘지금 내가 한번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죽는 거라면.

안드레아가 에시어를 말아먹든 말든, 황제가 가문 사람들을 다 죽이든 살리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난 어차피 죽는데?

내가 가주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주가 된다고 해도 물려줄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니, 설혹 가주가 되었다고 해도 내가 죽으면 안드레아 자식들이나 윈드런 자식들이 물려받을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죽 쒀서 개 주는 상황이란 말인가.

시한부라니!

명줄이 20살까지라니!

“덴장.”

“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아니라는 말도 정정도 하지 않았다.

이판사판이다.

“덴쟝! 덴쟈앙!”

“아기씨!”

“아기씨? 세상에, 왜 그러세요!”

나를 말리는 하녀들의 말에도 소리를 빽빽 내지르는 걸로도 부족해 발로 바닥을 쿵쿵 굴렀다.

“악! 악! 악!”

억울해. 억울해! 억울하다고!

주먹까지 꼭 쥔 채 발을 쾅쾅 구르자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제각각이었다.

린지는 ‘저게 왜 또 저래?’라는 표정이었고, 헤일과 피어스는 그런 내가 걱정스럽다는 얼굴들이었다.

아마 그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내가 아빠를 보내고 난 뒤에 불편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러니 섣불리 뭐라 입을 떼서 나를 위로할 수가 없는 거겠지.

하지만 그런 그들의 반응을 다 알고는 있었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또 죽는다는데?

내가 몇 달간 아등바등해 왔던 것들이 모두 쓸모가 없어진다는데.

사람들의 시선 따위가 다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그런 내가 제정신일 수가 있겠어?

‘그 자리에서 바로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지.’

“후우.”

“아기씨?”

카펫 위에서 그야말로 방방 뛰던 걸 뚝 멈추곤 몸을 돌려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헤일과 린지 그리고 그 뒤의 피어스까지. 나를 빤히 보는 그들의 시선에 자세를 바로 하고는 작은 단풍잎 같은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하아.”

그 급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린지가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저러다 혹시라도 다른 귀족 영애들처럼 성질을 부려 제게 불똥이 튈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무슨 수를 써서든 내 곁에 붙어 있는 걸 테니까.

“나 배고파.”

“네, 제가 갈게요! 식당에 바로! 음식 준비하라고 할게요.”

그래서 그녀를 내쫓는 건 너무 쉬웠다.

배고프다는 말 한마디에 냉큼 손을 들고 방을 빠져나가는 린지의 뒷모습을 보며 풀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하도 방방 뛰었더니 발바닥이랑 무릎이 울리는 것 같았다.

성질 내는 것도 힘드네.

이마를 손등으로 닦으며 어깨를 축 늘어트리자, 창밖으로 나뭇잎을 다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가 보였다.

처음 회귀했을 때만 해도 앙상한 가지에 싹이 나고 있었는데.

벌써 가을도 다 지나고, 진짜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고작 반년.

시간 참 빠르네.

솔직히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서 그런지 지난 몇 달의 시간이 엄청 길게 느껴졌다.

그때는 솔직히 조금 막막하기도 했었는데.

“하아.”

근데 막상 생각해 보면 처음 마차 사고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가 진짜 최악이었고, 몇 달 전은 그나마 희망이 있었다.

이번 생은 진짜 잘 살아 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렇게 따지면 지금이 처음 회귀한 걸 알았을 때보다는 나은 것일 수도?’

솔직히 성질이란 성질은 혼자 다 부리긴 했으나, 알고 있다.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운명이 거기까지면 그냥 그렇게 흘러가서, 죽게 된다는 것까지.

그때는 몰랐지만, 이시아가 그랬고, 레티시아가 그랬지.

솔직히 병에 걸려 죽는 거라면, 할아버지께 했듯이 치료제를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20살에 죽는다는 것밖에는.

“하아.”

‘14년.’

답답함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후, 하고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니지 이미 6살은 다 지났으니까 한 살 빼고, 20살도 20살 1월에 죽을지, 12월에 죽을지 모르니까 또 한 살 빼면.

정확히 12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고.

뭔가를 이루기엔 충분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한 시간이었다.

지난 6개월이 길게 느껴졌듯이, 12년은 아주 긴 시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에시어를 지키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는 점이었다.

‘나 스스로를 위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지만.’

아빠가 죽고, 할아버지가 죽는 건 내가 스무 살이 되기 전의 일들이었으니까.

그 생각을 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신이 나를 살린 이유가, 내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며 손을 뻗던 그 목소리가 바라던 바를 너무 잘 알게 되었으니까.

‘나보고 회귀해서 에시어를 지키라는 거잖아?’

“…….”

젠장.

아니, 근데 그걸 왜 나한테 시키는 건데?

난 심지어 에시어들이 말하는 직계도 아닌데.

그리고 사람을 다시 살리고 되돌릴 수 있는 존재가 신이라면, 그냥 처음부터 아빠와 할아버지를 살려서 에시어를 지키면 되는 거 아니야? 안드레아는 방해꾼일 테니까 죽이던가.

왜 하필이면 나한테 이러는 건데?

고작 20년밖에 못 사는 나한테!

아니, 고작 20년밖에 안 줬으면서!

“왜!”

“……네?”

“…….”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를 향한 헤일과 피어스의 시선이 등 뒤에 달라붙었다.

이제는 정말 심각하다는 듯 서로를 흘끗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느끼곤 슬쩍 소파에 엉덩이를 댔다.

‘진정하자.’

“아무것도 아니햐.”

“아기씨.”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화를 참지 못하고 불쑥 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한들 이미 상태가 심각하다고 결론을 내린 헤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녀가 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내 앞에 무릎을 굽혔다.

“왜 그러세요. 무슨 안 좋은 생각을 하셨어요?”

“…….”

나와 눈을 맞추고, 내 무릎에 손을 올린 그녀의 다정한 시선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12년은 살 수 있으니까, 최소한 헤일이 먹고 살 수는 있게 해 줄 수 있겠지?

내가 죽고 헤일이 가문에서 쫓겨나더라도 그녀가 편안히 살아갈 방도는 만들어 주고 싶었다.

‘펠이랑 안나 그리고 동생들 건사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겠던데.’

그리고 피어스는 마검사니까 걱정할 거 없고.

엘론도 실력자니까 괜찮을 거다.

쟈이든도 리안한테 잘 붙여 놨으니까, 앞으로는 그 두 사람 모두 괜찮을 거다.

‘리안이 황제의 부름을 받기까지 3년 남았던가?’

어차피 이렇게 이판사판이 될 거 폴이 말할 때 베넷한테 줘서 황제한테 직접 갈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할걸.

그럼 걔도 행복하고, 나도 굳이 오네에 가서 고생 안 하고, 아빠 곁에서 시간이나 보낼 텐데.

‘어차피 가주가 안 될 거면.’

오네에 갈 필요가 뭐 있고, 리안이랑 잘 지낼 필요는 또 뭐 있어.

그리고 에시어 직계들한테 절절맬 필요도.

‘없지.’

뭐 회귀하고 난 뒤로는 이판사판으로 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더더욱 아무 생각 없이 굴어도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그래도 12년을 살아야 하는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죽기 전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하아.”

“아기씨, 샤리에 님은 무사히 돌아오실 거예요.”

헤일의 말에 문 쪽 벽에 달라붙듯이 서 있던 피어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이 어떤 사람인데요. 마물 그라덴이랑, 그라덴 아시죠? 그 드래곤 닮은 산만 한 마물이요. 아무튼 그 그라덴이랑 싸우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로 목에 있는 아가미부터 칼로 찌르고 다 뜯어 버려서 푸른 피를 잔뜩 뒤집어쓰…….”

“흠흠.”

피어스의 폭력적이고 생생한 묘사에 헤일이 주의를 주듯 작게 헛기침을 했고, 그 말에서야 알아들었다는 듯 피어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웃으면 안 되는데도 작게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아빠와 할아버지를 지키면 이 사람들도 다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때마침 들려온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선 베넷까지 말이다.

“아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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