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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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척하며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든 베넷이 내 얼굴을 살폈다.
울지는 않았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살피는 베넷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괜찮아.”
“네.”
하지만 ‘네.’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베넷은 내 앞에 쪼그려 앉은 헤일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괜찮은 것 같냐고, 괜찮은 것 같다고.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의 표정에 그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이 진짜.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굴어서 마음 쓰이게 하는 거야.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이렇게 되면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다 때려치울 수가 없잖아.
‘정말.’
슬쩍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세 사람의 눈동자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루. 괜찮아.”
“네, 알겠습니다. 다만 아기씨께서도 다 아시겠지만 샤리에 님 때문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을 겁니다. 다른 분도 아닌 샤리에 님이잖아요.”
그래, 나도 안다. 우리 아빠 짱짱맨인 거.
근데도 내가 펠루아나와의 전쟁에 나선 아빠 때문에 우울해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팅커벨이 내게 한 말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아빠는 무사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았다.
왜냐하면 아빠는 내가 알려 준 방법으로 반드시 살아 돌아오실 거고, 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아빠 금방 돌아올게.’
조금 우울하고 시무룩했던 건 아빠랑 계속 같이 있다가 떨어지게 된 허전함 때문이었지 아빠의 생사 여부를 걱정한 건 아니었다.
‘내 기준에선 말이지.’
하지만 내 시한부 12년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걸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아기씨.”
“아라, 아빠는 무사히 레샤한테 돌아올 거라는 거.”
“근데 다 알고 계시면서 왜 이렇게 시무룩한 표정이에요.”
내 이런 고민을 들으면 다들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아니, 이런 내 고민에 베넷은 뭐라고 할까.
‘내가 이능으로 내 운명을 미리 봤는데, 나 20살에 죽는대.’라고 한다면.
믿을까?
아니, 이건 ‘믿을까?’라고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베넷은 당연히 믿을 테니까.
내가 한 말이지 않은가.
‘천재 이능력자 레티시아.’
그렇기에 그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베넷 자유 이용권에 경매장 일까지 덮어 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는 어쩌면 그때 내게 배팅을 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인정하는 샤리에의 딸이 가주 자리에 욕심을 내고 있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런 내가 후계의 자격을 갖추고, 가문으로 돌아오면 다른 직계들과 동일 선상에서 시험을 받고 가주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그에게 내가 스무 살에 죽는다는 말을 하면 그는 과연 어떻게 나올까?
내가 아닌 다른 대안을 바로 찾을까?
아니면 에시어의 부흥을 위해서 나를 이용하려고 할까?
할아버지한테는?
그럼 할아버지는 나를 버리실까?
“아기씨?”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 내는 베넷의 부름에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얼굴에서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듯, 베넷이 미간을 좁혔다.
그 시선에 이내 생각을 지우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
“그냥 다 알고 있지만, 그래두 아빠 걱정돼서 어리광부린 거야.”
“…….”
내내 입을 꾹 다문 채 성질만 부리던 내 말에 헤일과 피어스는 그제야 안도한 듯 걱정으로 굳어졌던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 얼굴에 괜히 걱정을 끼쳤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늘 하루뿐만 아니라 내가 저택에 돌아온 이후부터 내내 졸이던 마음이 풀어진 듯한 얼굴들이었다.
티 내지 말아야지.
난 어쨌든 어른이 아닌가.
감정을 다스를 수 있는 이성을 끄집어내 들썩이는 마음을 다잡듯 베넷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베넷은 왜 왔어?”
“아.”
그제야 나를 살피느라 잊고 있던 방문의 이유를 떠올린 베넷이 뒤늦게 품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폴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폴?”
그가 직접 들어오지 않고, 편지를 보낼 일이 뭐가 있지? 싶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혹시 할아버지 익투스 약 다 만든 건가?
그런 거라면 더더욱 직접 들어왔을 텐데.
폴답지 않은 행동에 베넷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뜯어진 걸로 봐서는 나뿐만 아니라 베넷에게도 함께 보낸 듯한 편지에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무슨…….”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레티시아 아기씨, 필립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필립이면 집사장?
할아버지 곁에서 여간해선 떨어지는 일이 없는 그의 등장에 베넷을 돌아보았다.
“…….”
하지만 베넷 역시 그가 왜 온 건지 모르겠다는 듯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 고갯짓에 더는 필립을 밖에 둘 수 없어 일단 그를 안으로 들였다.
“들어오세요.”
왜 왔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필립이 내 방까지 온 이유인 즉-
‘레티시아 위로 만찬’ 때문이었다.
“가주님께서 샤리에 님의 부재로 아기씨 마음이 편치 않으실까 염려하시는 듯합니다. 해서 오늘 저녁 식사는 모든 식구들이 모여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흠.”
식구들이 다 모인다고 해서 내 마음이 편해지진 않을 텐데.
오히려 더 불편해지면 불편해졌지.
우리 할아버지께서 내 마음을 참, 많이 모르시네.
아니면 다 알고도 그러시는 건가?
설마 뭐 하실 말씀 있으신 건가?
무슨…….
순간 ‘할아버지가 지금 시점에서 가족들에게 하셨던 말이 뭐였지?’를 떠올리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필립은 그저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저 표정에서 무슨 의중을 캐낼 수 있을까.
차라리 필립을 보내고, 베넷에게 묻는 게 낫지.
해서 그냥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금방 내려갈게요.”
* * *
“이런 가족 식사 자리, 너무 오랜만이네요.”
벨리아의 맑은 목소리가 본관 앞 동에 위치한 메인 다이닝룸을 가볍게 울렸다.
“그러게요. 이렇게 다 모여서 식사하니, 더 좋은 것 같아요. 오늘 같은 날은 아카데미에 있는 큰 아이들도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쵸, 형님?”
헬렌의 말에 벨리아가 마주 웃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공부하는 아이들을 고작 식사 한 끼 하자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안 그래요, 여보?”
“그래.”
무뚝뚝하게 가주인 할아버지 곁에 앉은 안드레아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듣기나 하고 끄덕이는 건지 궁금한 그의 태도에도 벨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웃으며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식사는 입에 맞으세요? 제가 주방장에게 특히 좋아하시는 걸로 올리라 했는데.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이이가 좀 열심히 해야 할 텐데요. 그쵸, 아버님.”
“그렇지.”
벨리아의 말에 할아버지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헬렌이 몸을 돌렸다.
“건강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다.”
“얼른 털고 일어나서 복귀하셔야죠, 아버님. 아버님께서 은퇴하시고 난 이후에 가문이 어수선해지는 것 같아서, 속이 상해요.”
“아버님께서도 좀 쉬셔야지, 동서.”
“그래도요.”
호들갑스러운 벨리아의 목소리에 헬렌이 차분히 답했다. 그러자 안드레아가 벨리아를 흘끗 노려보았다.
그 적당히 좀 하라는 듯한 시선에 이내 입을 꾹 다문 벨리아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의 침묵으로 다이닝 룸이 겨우 고요해졌다.
오직 들리는 거라고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뿐인 그 고요 속에-
“난 이만 영지로 내려갈까 한다.”
할아버지가 선전포고하듯 말을 꺼냈다.
“잘 생각하셨어요.”
“벌써요?”
희비가 선명하게 엇갈리는 벨리아와 헬렌의 말투에 안드레아와 윈드런의 시선이 겹쳐졌다.
이어 챈들러와 제이슨.
그리고 나까지.
할아버지께서 오늘 내 위로 만찬이라는 이름을 붙여 다들 불러 모은 이유가 있는 듯했다.
무슨 생각이실까?
직접 영지로 내려가 기피르를 지원하실 생각인 건가?
그런 거라면 급작스러운 영지행이 말이 되기는 했으나 가는 시기가 조금 애매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뭐든 다 그 뜻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난 조금 애매해지긴 하겠네.
다시 동쪽 별관으로 가야 하려나.
헤일이랑 하녀들이 짐 싸느라 고생하겠네 싶었다.
‘아니면 어차피 오네에 갈 테니까. 차라리 일부는 아빠네…….’
순간, 당연히 오네로 가는 걸 전제로 하는 내 계획을 상기하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져 버렸네.
아직 결정 난 것도 없는데.
내가 이능을 제대로 다스리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 날 이후 이능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가야 할 이유보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떠올리는 스스로의 약삭빠름에 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말에 더는 지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레티시아는 바로 오네에서 지낼 준비를 하거라.”
“…….”
“다음 주에 내가 영지로 떠나는 날, 바로 떠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