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85)화 (85/141)

85화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다이닝룸에는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치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순식간에 말을 잃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마고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는 나도 있었다.

나 아직 6살인데? 7살 되려면 아직 2달 남았는데?

할아버지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복잡한 심경 그대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 침묵을 제일 먼저 깨트린 벨리아 숙모가 할아버지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아버님, 아직 레샤는 6살밖에 안 되었는데 오네라뇨. 그러기엔 너무 어려요.”

벨리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예, 아버님. 저랑 형님은 오네로 간다 해도 내년 겨울쯤에나 해서 늦게 보내려 했답니다. 저 어린 것을 어떻게…….”

헬렌 역시 내가 안쓰러워 죽겠다는 듯 나를 빤히 보던 시선 그대로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들이 어찌나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던지.

‘예전 레티시아였으면 깜박 속았겠네.’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눈앞의 푸딩을 디저트 스푼으로 툭툭 건드렸다.

“제 눈에는 제이슨도 아기처럼 보여서 오네로 못 보냈는데, 그보다 작은 레샤를 어찌….”

“예에, 맞아요. 아버님. 저도 채디를 오네로 보내 놓고 얼마나 울었는데요. 그런데 6살밖에 안 된 레티시아를 어떻게 그 험한 곳에 보내겠어요.”

이게 바로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 건가 보다.

게다가 헬렌의 말은 너무 속이 빤히 보이지 않은가.

‘내 아들인 제이슨도 너무 어리고 안쓰러워서 안 보냈으니까, 그보다 작은 레티시아 너도 가지 마.’라니.

그게 무슨 멍멍이 소리인지.

하지만 너무나도 예상 가능했던 반응들인지라,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숙모들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할아버지의 한마디면 끝날 이야기였으니까.

“6살이나 7살이나. 어차피 나갈 거라면 한 살이라도 빨리 나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편이 낫다. 그리고 네 아들들도 7살이 되자마자 오네로 보내질 않았더냐.”

특히나 ‘돌아오는’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의중을 명확히 드러내는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한 사람들의 시선이 저마다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팅커벨 말만 아니었어도 이 꿀잼 상황을 즐겼을 텐데.’

자신들이 버러지 취급했던 사생아 딸에게 후계의 자격이라니.

아마 안드레아 숙부와 윈드런 숙부의 입장에서는 저기 저어어 아래 방계의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에게 자격을 준 것보다 더 최악일 게 분명했다.

방계의 그들은 자격을 갖춰도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지 못할 테지만 난 아니었으니까.

‘물론 내가 20살에 죽는다는 걸 안다면 다르겠지만.’

그와 동시에 아빠가 내 나이 18살에 돌아가신다는 것도.

그걸 알면 그들은 지금의 표정을 거두고 제게 천사의 미소를 보내 주겠지.

자애로운 숙부와 숙모의 역할은 당연하고.

‘어차피 죽을 건데.’

솔직히 팅커벨의 말이 미덥지는 않았다.

그래, 요정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릴 수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그 돼지가 제게 억하심정이 있어 사기를 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는 건.

전생의 레티시아가, 그 전의 이시아가 스무 살에 죽은 탓이었다.

그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근데 그런 내가 가주가 되겠다고 설쳐 대면 가문이 어떤 꼴이 되겠나.

거기다 애당초 내 목적은 가주가 되는 게 아니라, 에시어를 망하지 않게 하는 거였다.

그리고 후계의 자격은 호옥시나 가문이 망할 징조를 보이면 할아버지께 말해 나 살 궁리를 챙겨 놓기 위함이었고 말이다.

‘그래서 동아줄도 필요했던 거고.’

할아버지 사후에 에시어가 안드레아의 손에 들어가 망하면, 나랑 아빠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하려고. 한마디로 내 나름의 보험들이란 소리였다.

근데 내가 20살에 죽는다면?

그냥 남은 인생 나 하고 싶은 거나 하면서 살다 죽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나 죽고 나면 에시어고 나발이고 내 알 바야?

젠장.

또다시 차오르는 분노에 숨을 ‘후우-’ 하고 깊이 몰아쉬었다.

한데 그 소리가 조금 컸던 모양이네.

다이닝룸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향했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까지 나를 바라보았다.

“레티시아.”

“네?”

“네 대답은 무엇이지?”

“움…….”

“움?”

내가 당연히 좋아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일 줄 알았던지, 할아버지가 내심 당황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럼에도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물론 할아버지께서 굳이 다른 가족들을 다 모아 놓고 이렇게 이야기하신 이유를 알고는 있었다.

‘할아버지가 영지에 가시면 내가 저택에 혼자 남게 되는 걸 염려하신 거겠지.’

나도 그걸 생각하면 나가는 게 맞겠다 싶다가도 그렇게 되면 괜히 골치 아플 일들이 생길 것 같았다.

“생각해 볼게여!”

“뭐, 뭐?”

“오네로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일주일 동안 곰곰이 잘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고민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내가 오네에 가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

왜냐면 난 아직 내 시한부의 삶을 받아들이질 못했거든요!

* * *

“케이트! 당장, 그 용병들 들어오라고 해!”

“네, 네. 알겠습니다.”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 만찬을 마치고 돌아온 벨리아가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케이트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를 높였다.

“당장!”

“예.”

머리카락에 꽂았던 장식을 거칠게 뽑아 모조리 바닥에 집어 던지는 그녀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케이트가 서둘러 침실을 벗어났다.

하지만-

쨍그랑!

그 잠시간의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듯 벨리아가 유리잔들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악!”

가쁜 숨을 몰아쉬어도 노기가 가시질 않자 벨리아가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감히! 내 자식들의 자리를 노리려고?”

그것 말고는 그 천것에게 오네행을 명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되돌아온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뉘앙스라니!

그건 대놓고 그 사생아를 편애하겠다는 것 아닌가.

“젠장!”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함에 숨이 턱 하고 막힐 것만 같았다.

“젠장!”

‘어머님의 마음이 이러셨을까?’

대놓고 샤리에를 옹호하며 자기 자식들의 입지를 위협하던 가주이자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던 공작부인의 마음을 벨리아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 자식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했을 때의 그 불안한 마음.

제 남편뿐만 아니라 제 자식들까지 밀려나 저 한구석 방계로 물러나게 될 수도 있음이 아닌가!

‘이건 안 될 말이지.’

그 전에는 샤리에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도 마음 한구석엔 설마 사생아에게 가문을 물려주실까? 하는 마음을 일견 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데-

‘어차피 나갈 거라면 한 살이라도 빨리 나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편이 낫다.’

‘그리고 네 아들들도 7살이 되자마자 오네로 보내질 않았더냐.’

‘서둘러 돌아와 제자리로’라는 말만으로 기함할 노릇인데 내 귀한 아들과 비교라니!

거기다 제자리라면 거기서 썩어 문드러져서 죽어 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벨리아가 치아로 손톱을 톡톡 물어뜯었다.

천천히 몰아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빨라지겠어.’

그나마 넋 놓고 있다가 당할 상황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그 영악한 것을 쫓아낼 건수를 잡았을 때 일이 이렇게 된 것이.

‘돌아가신 어머님의 도움일지도.’

샤리에에게 이를 갈며, 저주를 퍼붓고 돌아가셨으니.

‘내 죽어서라도 샤리에를 저주하고 또 저주해 주마. 그러니 염려 말거라.‘

그 도움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 것인가 싶은 벨리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일격에 끝을 내야 했다.

그래 봤자 6살.

이능력자라는 게 걸리긴 했으나, 고작 6살이 아닌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제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천치.

제대로만 하면 쉽게 내쫓아 아예 제 눈앞에서 치워 버릴 수도 있음이었다.

덩달아 샤리에도.

‘그 개자식 내가 당장 죽여 버릴 거야.’

그이가 이를 박박 갈며 나갔으니.

아마 그도 무사하기는 어려우리라.

안드레아가 유하고 착한 성정을 가진 탓에 그동안 악한 수까지는 쓰지 못했던 것인데-

‘아버님께서 실수하신 거지.’

유하고 착한 성정을 가진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끝까지 물어뜯는 법이었으니까.

허면, 이 판을 어떻게 짜야 하나.

이성을 되찾듯 숨을 길게 몰아쉬자-

똑똑-

“형님, 저예요. 헬렌.”

고민하는 벨리아 앞에 마침 걸맞은 조력자가 나타났다.

‘조금이라도 더 급한 자가 먼저 우물을 파는 것이지.’

저도 급했지만 그래도 자신들은 모든 것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헬렌은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의 것뿐만 아니라, 알레프와 제이슨의 것까지 죄다 레티시아에게 빼앗길 위기가 아닌가.

‘애가 닳을 만해.’

그러니 제가 안 찾아오고 배기겠나 싶은 벨리아가 소파에 몸을 묻듯 풀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 하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