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그대가 헤일인가?”
“네, 그런데요.”
에시어의 기사들이 헤일의 신분을 확인하곤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대의 동생이 안나이고?”
“…네, 그런데…….”
아무리 가문 기사들이라고는 하나 생전 처음 본 낯선 남자들의 입에서 나온 제 막냇동생의 이름에 헤일의 시선이 흔들렸다.
순간 들고 있는 것을 놓칠 것처럼 손끝이 저릿해진 헤일이 급히 제 뒤를 따르던 앤을 돌아보았다.
“이거, 들고 얼른 올라가. 아기씨 식사 식겠다. 아기씨께는 별말 하지 말고. 금방 따라갈 테니까.”
“하지만.”
흘끗 기사들을 올려다본 앤이 트레이를 건네받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다독이듯 헤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아, 알겠어요.”
그녀의 채근에 뒤를 흘끗댄 앤이 일단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 앤의 뒷모습에서 금세 시선을 거둔 헤일이 기사를 올려다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그…….”
그녀의 물음에 함께 온 기사를 흘끗 돌아본 갈색 머리 기사가 말아 쥔 주먹 사이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것이 방위대에 신고가 들어왔다 하더군. 우린 그들이 저택 안쪽까지 들어올 수가 없어서 대신 온 거고.”
“무슨…….”
“그대가 가문의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는 고발이 들어왔다는데.”
“……네?”
순간 그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묻는 헤일의 표정에 앞에 선 기사들 역시 난감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대 여동생의 옷차림이 요 몇 달 사이에 부쩍 고급스러워진 것도 그렇고, 그대 집안에서 사들이는 식재료들이 수상쩍다고 말이야.”
“그게 무슨…….”
헤일이 황당함에 얼굴을 굳힌 채 기사들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의심할 여지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에 그들도 난감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그것이, 우리도 그대가 그럴 사람이라고 의심하진 않아. 하지만 방위대 쪽에서 신고가 들어왔다니, 조사를 해야 해. 그러니 협조…….”
하지만-
“거기 딱 가만있어.”
헤일의 양쪽으로 다가가 그녀를 연행할 듯 팔을 잡는 기사들의 행동을 저지하듯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발짝, 아니 손끝 하나라도 대 봐.”
“…….”
“진짜 가만 안 둔다.”
* * *
“그것이 아기씨, 이게 저희의 뜻이 아니고.”
다다다 뛰어 내려와 헤일의 앞을 막아선 나를 보며 이마에 땀을 닦아 낸 기사들이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위대 기사들의 소장을 들고 와서 저희도 어쩔 수가…….”
“그 방위대 기사들이 하필 할아버지도 없고, 베넷도 없는 이 시점에 우리 집에 와서 내 하녀를 잡아가겠다고?”
“그것이……. 예, 그렇습니다.”
두 번 설명할 필요 없는 내 깔끔한 정리에 기사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발이 들어간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 없는 데서 몰래 데려가던가, 혹은 내가 있더라도 6살이니 말로 어떻게 하면 어르고 달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6살에게는 억지라는 게 있지.
“그래서어.”
고개를 팍 하고 쳐드는 내 말에 관자놀이를 긁은 그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기씨, 방위대에서도 고발이 들어온 이상 조사는 해야 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으면 그냥 풀려 나올…….”
이것들이 어디서 사기를 치고 있어.
숙모들이 개입된 게 분명했고, 그렇다면 헤일은 방위대에 넘어가는 그 순간 끝이었다.
챈들러가 사람 괴롭히는 방법을 어디서 그렇게 잘 배워 왔나 했더니.
‘숙모들이었구나.’
나를 공격하기 위해서 내 사람을 괴롭히려는 거구나.
그렇게 둘 순 없지.
“안 돼.”
해서 고개를 젓자, 그런 나를 어르려는 듯 기사 하나가 한쪽 무릎을 굽혀 나와 눈을 맞췄다.
“아기씨,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이렇게 방위대의 일을 방해하시면 에시어뿐만 아니라 헤일도 곤란해질 수도 있어요.”
협박하네?
이렇게 하면 헤일에게 유리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내겐 그런 협박 따위 안 먹히지.
“그래도 안 돼.”
“아기씨.”
“그럼 할아버지 오시면 다시 얘기해.”
“하지만 방위대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러는 건 도의에 맞지 않…….”
“그래서?”
말끝을 늘이는 기사의 말에 사납게 얼굴을 굳혔다.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차가운 목소리에 기사들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화가 가시질 않았다.
“그대는 방위대의 부하야? 아니면 에시어의 기사야?”
“…….”
“그대의 상급자들은 그대들이 방위대 부하 짓 하는 거 알고 있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 못 하는 그들의 모습에 ‘후.’ 하고 숨을 내쉬곤 고개를 들었다.
방위대뿐만 아니라 숙모들한테 돈도 먹었을 텐데, 쉽지 않겠지.
물론 숙모들이 직접 주진 않았겠지만.
이런 장기말 따위에게 성질낼 필요 없지.
그래. 평판, 평판.
내 평판은 곧 아빠의 평판이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앞쪽으로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문질러 뒤로 넘겼다.
“경들 이름이 뭐지?”
“홀터입니다.”
“에멧입니다.”
이름만 이야기하는 걸 보면, 귀족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최대한 뒤탈 없는 자들을 골랐다는 건가.
그들의 치밀함에 이를 빠득 갈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홀터, 에멧. 그대들은 방위대가 여기까지 못 들어오는 이유를 알아?”
“여기가 에시어이기 때문입니다.”
“그치?”
대답은 잘도 하는 갈색 머리의 기사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 두 사람 눈엔 내가 뭘로 보여?”
“그야, 에시어의 아기씨이시죠.”
“그치, 난 에시어의 레이디지.”
“예.”
“그것도 샤리에 에시어의 외동딸이야.”
다 알고 있는 걸 왜 이리 장황하게 이야기하나 싶은 두 사람이 고개를 슬쩍 들자, 그 시선을 읽듯 대답해 주었다.
“그러니 저들은 내가 허락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야. 난 에시어니까.”
“하지만 헤일은.”
“응, 헤일은 에시어는 아니지만 에시어인 나를 모시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안 돼.”
양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허락은 할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절대 안 떨어질 거야. 그러니까 기다리든 돌아가든 알아서 하라고 해.”
‘말은 해 보겠습니다.’
미련이 뚝뚝 남는 얼굴로 자리를 벗어나는 기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헤일의 손을 움켜쥐었다.
“가자.”
“아기씨, 저 가서 조사받고 올게요. 그럼 금세 아니라는 거 밝혀질…….”
“가서 조사받으면 못 와.”
“……네?”
“지금 이 판이 그래.”
지금 숙모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내 곁에서 헤일을 떼어 낼 작정이고, 그렇다는 건 헤일에게 잘못이 있든 없든 방위대에 끌려가는 순간 끝이라는 의미였다.
할아버지는 에시어인 내가 방위대에 갇히면 움직여 주실 분이었지만, 헤일은 아니었다.
‘고작 하녀 하나.’라고 생각하실 테니까.
그렇기에 절대 헤일을 내어 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당분간 집에 가지 말구, 저택에서 지내.”
“하지만…….”
펠과 안나, 동생들을 떠올리는 헤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게 사람이 왔다면.”
그래, 펠과 안나에게도 방위대가 찾아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려 가문의 재산을 빼돌렸다는 혐의가 아닌가.
헤일이 빼돌리면 어디로 빼돌렸다고 생각하겠나.
‘당연히 자기네 집이라고 생각하겠지.’
“피어스.”
“예.”
“오네에 갔다 와. 펠이랑 헤일네 동생들 잘 있는지.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두 알아 보고.”
“알겠습니다. 엘론에게 말을 해 놓겠습니다.”
피어스가 고개를 숙였다.
“엘론 쉬러 간 지 얼마 안 됐는데.”
“괜찮을 겁니다.”
“그래.”
피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헤일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그건 내 침실 안으로 들어가 엘론이 피어스와 교대를 했다는 보고를 듣기 전까지 그랬다.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창이 보이는 쪽이 아니라, 벽 너머 뒷동이 있는 쪽을 향해 앉았다.
해 보자는 건가.
물론 그들은 시치미를 떼겠지.
나도 그들이 시치미를 떼면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했다는 심증은 너무 명확했지만, 딱히 증거는 없었으니까.
다만 지금 이런 짓을 할 사람이 그들뿐이었다.
‘내가 오네에 가게 되면, 나를 감시하기 위해 내 옆에 자신들의 사람을 심어 두려는 거겠지.’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을 횡령범으로 몰아?
미친것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린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분노였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질 않은가.
“아기씨!”
때마침 심부름을 보냈던 린지가 다급히 들어왔다.
나와 헤일의 모습에 잠시 놀란 듯한 얼굴이었지만, 이어 입이 간질거리는 듯 말을 이었다.
“밖에 방위대 온 거, 헤일 때문이라면서요?”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요. 이미 저택에 소문 다 났어요. 헤일이 아가씨 옷장에서 옷 훔쳐다가 자기 여동생 입히고, 돈도 빼돌렸…….”
“린지.”
신이 난 얼굴로 주절주절 떠들던 린지의 입을 막았다.
헤일의 손이 슬픔으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