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저, 그…….”
길게 이어지던 상념을 끊어 내듯, 엘론이 말끝을 늘였다.
내내 조용하던 그의 목소리에 끝도 모르고 이어지던 생각을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웅?”
오네의 일 말고, 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헤일과 피어스의 시선까지 한순간에 엘론에게로 향하자.
“그, 허흠.”
순식간에 제게 집중된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웠는지 엘론의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평소에는 말도 잘하면서.
막상 멍석을 깔아 주면 놀지 못하는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옆얼굴에 동그랗게 뜬 눈을 누그러트리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엘론?”
재촉하듯 그를 부르자, 그제야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말아 쥔 주먹 사이에 기침을 두어 번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 제가 여기저기 귀가 많기도 하고…. 이건 제가 페일런이라고, 베넷 부관님의 보좌랑 친해서 들은 이야기인데요.”
뒷머리를 긁은 엘론이 나를 흘끗 보았다.
이야기를 하긴 해야겠는데, 어쩐지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왜에? 무슨 말인데?”
“아 그게, 페일런에게 듣자 하니 베넷 부관님께서 요 며칠 많이 힘드시겠더라고요.”
“베넷이? 왜?”
업무량 때문은 아닐 테고.
업무량은 할아버지께서 영지에 계실 때가 더 심했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오른쪽으로 갸웃했던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그 갸웃하는 표정을 보며 엘론이 마음을 먹은 듯, 내 쪽으로 바로 몸을 돌렸다.
“그게 로플렝 남작 쪽에서 베넷 님이 집행한 일에 대해 일일이 딴지를 걸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로플렝이면, 안드레아의 사람일 텐데?
“뭐 조사를 할 수는 있는데 로플렝 남작도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요.”
안다.
둘째 숙부가 가주가 되자마자 그를 베넷의 위치에 앉혔던 터라 기억하고 있었다.
배는 산만 하게 불러서는 뒤뚱뒤뚱 걸어 다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 멍청하고 무능한 작자가 뭘 안다고?’
베넷의 일에 딴지를 걸고 있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베넷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도 가주가 될까 말까 한 판에.
‘안드레아 숙부, 진짜 멍청하잖아.’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아마도 에시어의 몰락은 그런 이들을 가문의 요직에 앉히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거다.
그런 이들에게 베넷이나 페일런 같은 유능한 인재들이 휘둘리면서 조금씩 아주 서서히 무너졌겠지.
‘이것도 소설의 서사 중의 하나겠지만.’
“하아.”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그의 기름기 가득하던 표정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자 그런 내 모습을 돌아보는 헤일과 피어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일단 이 상황부터 파악을 좀 하고.
“어떻게?”
내 차가운 시선에 엘론이 턱 끝을 긁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어린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눈치에 고개를 저었다.
“다 알아들을 수 있어. 그냥 얘기해 줘.”
“아.”
그 목소리에 서린 서늘함을 읽었던지 엘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넷이 하는 일의 대부분이 가주님의 허락 없이는 진행할 수 없는 것들인데. 그걸 전부 다 확인하겠다고 들이닥쳐서는 서쪽 별관을 들쑤시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나 업무 추진비로 내역 없이 사용한 돈에 대해 확인하느라 눈이 벌겋게…….”
“내역 없이 사용한 돈?”
“네.”
“올해 거만?”
“네.”
하.
‘펠을 찾아간 것부터.’
뭘 꼬투리 잡으려고 하는 건지 대충 알겠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게 단순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건드리고 협박해서 내 옆에 누군가를 심어 놓는 게 아니라.
‘나를 망가트릴 작정이구나.’
오네에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가문에서 아예 내쫓아서 자신들에게 대항할 수 없게끔.
‘전생에서 그랬듯이.’
아빠의 부고장도, 아빠의 재산도, 할아버지께서 내 앞으로 물려주셨을 돈도.
그 어떤 것도 건드릴 수도 없게끔 맨몸으로 내쫓았던 것처럼.
‘네년 때문에 우리 가문이 얼마나 커다란 손해를 입었는지 아느냐?’
‘칼리안이 너 때문에 가문에 칼을 들이대고 있음을 알고 있느냔 말이야!’
그땐 내가 어렸지.
멍청하기도 했고.
정말 내가 한 짓 때문에 가문이 망하는 줄 알고는 그대로 가문에서 내쳐지고도 아무 말도 못 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물론 지금은 할아버지가 계셔서 자기들 마음대로 나를 내쫓을 수는 없기에, 아마도 할아버지에게 나를 내칠 수 있을 정도의 추문을 들려줄 작정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일타이피로.’
나도 내치고, 베넷도 쫓아내고.
아니지.
‘일타삼피인가.’
나를 내쫓고 나면 아빠까지 완전히 가문에서 발붙이지 못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전력으로 나오신다면.
‘나도 전력으로 임해 드려야죠.’
길게 보고 헬렌과 벨리아 숙모를 서로 경쟁시킬 작정이었는데.
‘시간 없어.’
두 사람 다 손 떼게 만들어야지.
“피어스, 엘론.”
“네.”
“예.”
“나 좀 도와줘.”
* * *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할아버지가 이야기하신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아기씨! 오늘 저녁 만찬은 특별히 예쁘게 입고 오라는 벨리아 님의 전언이세요.”
린지가 웃으며, 드레스룸의 문을 양옆으로 활짝 열어젖혔다.
“가주님께서 이틀 뒤에 떠나시면 당분간 뵙기 어려우실 거라고요.”
왜? 아예 영영 바이바이 다시는 못 볼 거라고 하지?
유달리 이틀 뒤 떠나시는 할아버지와의 저녁 만찬에 신경을 쓰더라니, 오늘은 내 옷까지 간섭이었다.
“오늘 에시어 직계가 다 모이시려나 봐요. 포틀런 백작부인과 그 영애께서도 참석하신대요.”
“그래.”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하신 모양이네.
온 식구들을 다 동원하시는 것 보니.
‘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할 테니까.
내가 오네에 가서 2년을 채워 버리면 숙모들 입장에선 자기 아들들의 경쟁자가 생기는 걸 테니.
‘막으셔야지.’
하지만 나도 만만찮게 준비했거든요.
물론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헤일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게 없으면 조금 심심해질 뿐.’
다른 부분은 다 준비됐으니까.
피식 웃으며 린지 쪽으로 걸어가 드레스룸 안쪽으로 들어갔다.
손가락으로 턱 끝을 톡톡 두드리며, 주변을 주-욱 둘러보자 린지가 곁으로 바짝 붙어 섰다.
“오늘은 무슨 색 드레스로 입으실래요? 며칠 전에 새로 맞춘 분홍색 드레스 어떠세요? 허리띠 쪽에 보석 달린 거요. 아니면 노란색은요? 무릎 아래로 살짝 프릴 들어간 거요. 그거 예뻤는데.”
“음.”
옆에서 내내 떠드는 린지의 말에도 턱 끝을 꾹 누르다 눈앞에 보이는 푸른색 드레스를 가리켰다.
“저거, 저거 입을래.”
“저거가, 뭐- 저 퍼런색이요?”
푸르다기엔 남색에 가까운 퍼런색이었다. 정강이 절반을 가리게 내려온 치맛단에는 은색 실로 자수가 놓여 있어 마치 북부의 산 위에 드리워진 만년설을 그려 넣은 것처럼 보였다.
6살밖에 안 된 내가 입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이 들어 보이는 드레스이긴 했다.
웬 귀부인이나 입어야 할 법한 디자인을 딱 축소해 놓은 모양새였으니까.
하지만-
“아빠가 선물 준 거.”
무뚝뚝한 아빠에게 인형 말고 선물로 받았던 유일한 옷이었다.
황제께 받은 옷감으로 타루스의 재봉사에게 의뢰해 만들어 온 드레스. 내 치수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만들어서 재작년에 받았을 때는 차마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컸는데.
“이제 맞을 거야.”
아마도 올해는 저 옷이 딱 맞겠지.
둘째 숙모가 촌스럽다고 비웃던 그 옷.
아빠랑 같이 갈 수 없으니까.
아빠가 사 준 옷이랑-
“악어 인형도!”
아빠가 사 준 악어 인형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내 나름의 전투 복장을 완벽하게 갖추곤 린지 앞에 짠 하고 몸을 돌리자, 그런 내 모습을 살피는 그녀의 표정이 알 수 없게 굳어졌다.
“그, 헤일이 어디 갔지?”
“헤일 심부름 갔어.”
“아.”
나를 말려 줄 사람을 애타게 찾는 듯한 시선 끝에 린지가 다급히 한구석을 향해 손짓했다.
“그래, 앤! 네가 보기엔 어떠니?”
“아, 네? 저는.”
앤이 자기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 어색한 미소에 해맑게 웃으며 몸을 돌리자, 앤이 살짝 놀라며 내 품에 꼭 안긴 악어 인형을 보았다.
그러곤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예쁘세요. 아기씨는 뭐든 예쁘시죠.”
정답이네.
“그, 그렇긴 하지. 이만 가서 하던 거 마저 해.”
“오늘은 제가 드레스룸 정리할게요.”
“그래.”
린지가 쓸모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앤을 보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튼 얼른 내려가세요. 시간 다 되었어요.”
“응, 알겠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 쉬고 있어, 앤.”
“…예, 아기씨.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