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네가 감히 이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느냐.’ 하는 비아냥이었다.
아무래도 평소 같았으면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저 한구석에 앉아서 저녁만 먹고는 조용히 퇴장했을 내가 고작 이능 하나 있다고 목소리를 내는 게 꼴 보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뭐 이해한다.’
레오나르도 에시어는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그럼 너도 이능 하나 갖고 태어나지 그랬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여긴 가족이 다 모인 만찬장이었고 할아버지가 계셨다.
굳이 파이터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싶었지만-
“어? 레오 오빠도 있었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약은 올려 줘야지 싶어 고개를 오른쪽으로 쑤욱 뺐다.
‘레오’라는 애칭에 ‘오빠’까지 붙여 부르며 손을 흔들자, 레오나르도의 표정이 서서히 썩어 가는 게 보였다.
“난 오빠는 없는 줄 알았어.”
“……뭐?”
“레샤한테두 인사 좀 해 주지. 레샤는 오빠 보고 싶었는데.”
내 말에 레오나르도의 눈동자에 불이 튀었다.
그러라고 굳이 ‘오빠, 오빠’ 한 거니까.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그는 내가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발작하듯 싫어했다.
알레프처럼 레오나르도 역시 사생아의 딸이 저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아주 많이 불쾌해했었다. 해서 전생에는 그를 향한 호칭을 생략한 경우가 더 많았다.
더 정확히는 어릴 때는 지금 레오나르도의 말처럼 가족끼리 다 모여도 존재감 없이 앉아 있다가 조용히 사라졌고, 꼭 불러야 하는 상황에서는 하녀를 시키거나 그냥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레오나르도 님, 이라고 부르렴. 큰 도련님도 나쁘지 않겠구나.’
아빠가 돌아가신 뒤에는 완전히 쫓겨났고.
전생을 떠올리자 또다시 명치끝이 답답해지는 기분에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 이거 맛있다.”
“조용.”
“쳇.”
이 만찬장 안에서 해맑은 건 오직 챈들러뿐이네.
그것도 먹느라고.
‘근데 쟤가 왜 저렇게 식탐을 부리지?’
전생에서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다 이내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챈들러의 식탐까지 내가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 않겠나.
해서 생긋 웃어 보이곤 자세를 바로 했다.
리슈아 부인에게 배운 대로 최대한 우아하게 턱 끝을 살짝 당긴 채, 악어 인형을 꽉 조여 잡자-
“잘했어.”
그런 나를 흘끗 본 리리아나가 잘했다며 칭찬해 주었다.
‘리리한테 칭찬받았네.’
리리아나의 퉁명스러운 칭찬에 시익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나와 리리아나의 모습을 매우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던 알레프가 나와 눈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두 사람, 사이 좋아 보이네. 보기 좋다.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진 거야?”
“얼마 안 됐어.”
리리아나의 대답에 알레프가 다정히 웃었다.
“그렇구나. 좋아 보여. 나이가 같아서 그런가.”
“알레프 오빠랑 레오 오빠는 나이 같아도 안 친하잖아. 그거랑은 상관없지.”
리리아나의 톡 쏘는 말에 알레프가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그녀의 말이 못내 귀엽다는 듯 반달눈을 접으며 웃은 알레프가 그 시선 그대로 나를 바라보았다.
“레티시아, 언제 오빠랑도 같이 놀자. 재미있을 거 같아.”
“싫어. 리리랑만 놀 거야.”
밝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투는 발랄했으나, 실상은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도록 뚝 끊어 버리는 거절이었다. 그 명백한 거절에 여유롭게 웃고 있던 그가 입꼬리 한쪽을 미미하게 비틀어 올렸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이라 그런지, 작게 찌푸리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원래의 레티시아였다면 알레프의 말에 좋아 어쩔 줄 몰라 했겠지만.’
저 시커먼 속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안 계셨으면 내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을 거면서, 놀기는…….’
알레프를 조심하라는 제이슨의 경고와는 별개로 내가 할아버지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다정하게 구는 그에게 굳이 호응해 줄 필요 없지 않겠나.
해서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알레프를 향해 입꼬리를 바짝 당겨 최대한 해맑게 웃어 주곤 고개를 돌려 버렸다.
“리리, 내 방에 갈래?”
“웅!”
리리아나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식기를 내려놓은 할아버지의 묵직한 부름이 들려왔다.
“레티시아, 생각은 다 했느냐.”
“…….”
“오네에 갈지 말지에 대해 오늘 이야기를 하겠다고 한 거 같은데.”
“아.”
내내 침묵하던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찬물이 확 끼얹어진 것처럼 만찬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러곤 저마다 다양한 감정을 품은 시선들이 나와 할아버지를 흘끗흘끗 번갈아 살피는 게 느껴졌다.
살얼음판 위에 올라선 것처럼 저마다 조심스러워 쉽게 입을 떼지 못하던 그때-
“아버님.”
벨리아 숙모가 차분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잖아도 그 때문에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가볍게 입가를 닦는 모습이 평소 벨리아 숙모답지 않아 보였다.
다급함이 느껴지기는커녕 마치 연극 무대 위에 오른 배우처럼 차분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깜박 속을 정도로.
‘진짜 준비를 철저히 하신 모양이네.’
그 단단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움켜쥔 치맛자락을 문질문질 매만졌다.
“괜찮아.”
그런 내 모습에 리리아나가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내 손등을 가만 토닥였다.
그 위로에 고개를 돌리자, 리리아나가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작게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옆얼굴에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빠 말고도 또 생긴 것 같은 든든함에 고개를 끄덕이자-
“무슨.”
나를 흘끗 돌아본 벨리아가 미간을 좁히며 할아버지와 시선을 맞췄다.
“그것이, 어휴.”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어깨를 늘어트린 벨리아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아기 때부터 제 손으로 키운 아이인지라, 제가 제 입으로 이 일을 말을 하는 게 옳은 건지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하지만 도저히 제 선에서는 답이 나오질 않아서요.”
“…….”
“아이를 오네에 보내 더 큰 추문이 도는 것은 막아야 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이니, 너무 크게 혼은 내지 마세요, 아버님. 이건 모두 제가 잘못 키운 탓이니까요.”
“사설이 길구나.”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주절거리던 벨리아 숙모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 레티시아를 두고 조금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에 제가 조금 알아보았는데.”
아랫입술을 살짝 긁으며 주변을 살핀 벨리아가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레티시아의 행실을 두고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말들이 나돌고 있더라고요.”
“…….”
변죽만 올리고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벨리아의 화법에 할아버지의 서늘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그 싸늘한 시선에서야 벨리아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레티시아가 불법 경매장에서 노예 아이를 사들였다고 해요. 그것도 사내아이로요.”
“세상에.”
“하!”
벨리아의 말에 순간 짧은 탄식들과 함께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작은 탄식만 가득한 날 선 공기.
내 표정과 할아버지를 번갈아 살피는 사람들의 시선에 할아버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가고 있는데도 벨리아 숙모는 어쩐지 신이 난 듯 보였다.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레티시아가 사들인 그 노예가 오네에 있다고 하는데. 6살밖에 안 된, 그것도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흉흉한 소문이라서요.”
“…….”
“이게 지금이야 쉬쉬해서 넘어갈 수 있지만, 레샤가 오네에 가게 되면 이 일이 어떻게 번질지. 그 노예와 만나기라도 하면…. 어휴. 아버님, 저는 솔직히 감당할 수가 없을 거 같아요.”
벨리아 숙모가 고개를 내저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가만히 앉아 있는 내게로 향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시선마저 내게 닿고 나서야-
“거기다 레티시아 저 아이가 금화 100개가 대체 어디서 난 건지.”
벨리아 숙모가 준비했던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무, 뭐? 그, 금화 100개?”
“제가 잘못 키운 탓이죠, 뭐.”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는 숙모의 옆얼굴에 안드레아 숙부가 얼굴을 와작 일그러트렸다.
“천한 것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찬 그가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님, 저 어린 것이 벌써부터 저러고 다니는데 밖으로 내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미 샤리에의 존재 자체가 가문의 수치나 마찬가지인데, 저것까지 추문을 더해서는…….”
“네가 말한 그 수치를 내가 만들었다는 걸 잊은 모양이구나.”
할아버지의 서늘한 목소리에 안드레아 숙부가 혀를 깨물었다.
“그, 그것이 아니라.”
“네 뜻은 알고 있으니 거기까지 해라.”
“아버님.”
엉덩이를 살짝 들썩이며 몸을 돌리는 안드레아의 부름과 동시에 만찬장 문을 열고 들어온 필립이 할아버지의 곁에 섰다.
“가주님, 로플렝 남작이 급히 뵙기를 청하고 있는데 어찌할까요?”
필립의 말에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돈 안드레아가 밝은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아버님, 로플렝이라면 요 며칠 가문의 크고 작은 일들을 조사하던 이가 아닙니까. 급한 일이 아니면 이리 올 자가 아닙니다. 들이심이 어떠할지요.”
안드레아의 말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흘끗 그에게로 향했다.
부창부수가 따로 없게 죽이 척척 맞는 벨리아와 안드레아의 시선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일이라면 만나 줘야지. 들어오라고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