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뭐, 뭐?”
“에시어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다고요.”
“하.”
자신을 향해 또박또박 건네는 내 말에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벨리아 숙모가 이마를 짚은 채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뿐.
이전처럼 억지로 나를 몰아붙이거나, 쉽게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할아버지가 계셔서도 그랬겠지만, 곁눈질로 옆쪽을 흘끗대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할 말을 찾지 못해서인 듯했다.
‘머리 아프겠지.’
첫판부터 스텝이 꼬인 게 아닌가.
내가 천박하게도 노예를 사들이고, 심지어는 가문의 돈을 막 아무렇게나 썼다는 누명을 씌워야 했는데. 노예는 베넷이 샀다고 하지, 거기다 그 돈은 할아버지가 냈다니.
예상과는 다른 상황에 머리가 복잡할 거다.
그들 딴에는 내가 시치미 뗄 상황까지 예상해서 웨르시펠까지 훔쳐서 가져왔는데, 그건 또 진짜가 아니라니-
‘머릿속이 아득하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네, 아가씨께서는 포틀런 백작가를 제외하고는 다른 곳은 들르지 않으셨습니다. 아, 한 번인가 하녀 헤일의 집에 들르신 것 말고는요.”
마부의 증언부터.
“예, 그 날은 아기씨의 은혜로 제 물건을 가지러 잠시 들렀을 뿐입니다. 가서도 물건만 들고 금방 나왔습니다.”
헤일의 말과-
“주말에 포틀런 백작가에 간 것 말고는 나가신 적은 없었습니다. 잠도 하루 빼고는 저택에서 주무셨고요.”
린지까지.
그 날 내 행적에 대해 궁금해하는 벨리아에게 사람들은 설명했고, 뒤이어 베넷이 쐐기를 박아 주었다.
“네, 그 노예는 제가 구매하였습니다. 경매장에 물건을 구하러 갔다가 어린아이들이 노예로 팔려 가는 걸 볼 수가 없겠더군요. 해서 가장 심하게 다친 아이를 구해 내고 남은 아이들도 걱정이 되어 방위대에 고발해 처리하였습니다.”
깔끔한 답이었다.
하지만 베넷의 군더더기 없는 말에도 숙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거짓말.”
고개를 저으며 턱을 올려 드는 벨리아 숙모의 날카로운 힐난에 베넷이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제가 굳이 거짓을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요. 분명한 거래 내역이 있고, 방위대에 신고한 기록도 있으니 정 미덥지 않으시면 확인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대의 위치라면 그따위 것, 얼마든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닌가.”
“…….”
벨리아 숙모의 날 선 비난에 짧게 한숨을 내쉰 베넷이 그대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그만의 표현이었다만-
“에시어의 가신이라는 자가 어찌 저리 불법에 당당한 건지.”
이번엔 안드레아 숙부의 차례인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방위대에 신고를 했으면 되었을 것을. 공을 세우는 데에만 급급해서는…. 쯧.”
베넷의 행동을 매도하며 혀를 차는 안드레아의 비열한 낯빛에 순간, ‘숙부보다 오백 배는 나아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만-
‘참자. 참아.’
꾸욱 눌러 삼켰다.
여기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래,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의 악행과 지금 저지르고 있는 불법적인 일들부터 아랫사람들의 공을 제 것으로 가로채 간 것까지. 열흘 밤낮은 떠들고 다닐 수 있으나.
지금 내가 나서서 내 존재감을 드러내면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었다.
난 페이드아웃되어 사라져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딴 걸로 논점을 흐려서 시작도 못 해 보고 내 노력을 허망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후-”
해서 기-일게 숨을 몰아쉬었다.
참자, 참아.
그렇게 심호흡 두어 번과 참을 인 자를 새기며 고개를 들자,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바로 앞에 서 있던 알레프와 눈이 딱 마주쳤다.
“…….”
‘뭐야, 쟤 왜 저래?’
‘마침’, ‘우연히’ 같은 상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의 빤한 시선이 내 얼굴을 훑고는 눈을 마주쳤다. 내내 나만 보고 있었다는 게 훤히 드러나 보이는 그의 시선에 순간 미미하게 굳어질 것만 같은 입꼬리를 최대한으로 당겨 웃었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듯이 어깨까지 으쓱하며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자, 뻔히 보이게끔 피식, 하고 웃은 그 역시 시선을 돌렸다.
‘대체 왜 저래?’
평소와 다른 그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제이슨이 한 말 때문인가.’
자꾸만 거슬렸다.
전생에서는 나이 차이도 있고 해서 그를 본 날이 손에 꼽았고, 그나마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도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난 이후였다.
심지어는 그때도 알레프는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그렇게 존재감이 도드라지는 편은 아니었다.
워낙에 윈드런 숙부가 무능했고, 헬렌 숙모의 친정도 딱히 알레프를 위해 나서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숨죽이고 있어야 했겠지.’
그래야 안드레아에게 뭐 하나라도 받아먹을 수 있었을 테니까.
이것도 어쩌면 할아버지가 여전히 건재하셔서 가능한 존재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 익투스로 쓰러지시고, 안드레아에게 대부분의 권한이 넘어가는 동안 멍청한 윈드런 숙부는 안드레아 숙부가 던져 주는 푼돈에 혹해서 제 눈앞에서 황금이 사라지는 걸 그냥 두고 보고만 있었으니까.
그럼, 저 똑똑한 헬렌 숙모와 알레프가 당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생에서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지?’
가문이 망했고, 황제는 에시어의 씨를 말려 버리라 명했다.
안드레아는 목이 잘려 죽었고, 윈드런도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가신뿐만 아니라, 가문에서 일했던 사용인들까지 모두 죽이라 했으니.
‘당연히 죽었겠지?’
하지만 뭔가 찜찜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아무래도 기억을 되짚어 봐야겠어.’
황도를 빠져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죽기 전까지 에시어에 대한 소문은 죄다 수집하듯 들었었다.
쥐어 짜내며 뭐라도 생각이 나겠지 싶어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자-
“어머니.”
태연히 팔짱을 낀 채 앞쪽을 응시하고 있는 헬렌의 뒤쪽으로 바짝 붙어 선 알레프가 그녀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어 헬렌 역시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뭐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건지 의아함에 미간을 좁힌 그때-
똑똑-
나직한 노크 소리와 함께 필립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에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고, 이어 필립은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할아버지께 서한을 건네었다.
필립이 아무 말 없이 건넨 서한을 할아버지 역시 다른 말 없이 받아 펼쳐 들었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의 분위기조차 파악 못 한 안드레아가 필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집사장도 늙었구나. 지금 이 상황에서 아버님께…….”
“입, 닫아.”
하지만 안드레아가 채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사나운 시선이 그를 향했다.
가만히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릿저릿해질 것만 같은 그 서릿발 같은 시선에 안드레아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틀어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욕설을 씹어 낼 것처럼 시근덕거리는 안드레아의 숨소리와 말없이 서한을 훑어 내리는 할아버지의 시선에 만찬장 내부 역시 고요해졌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쥐고 있던 서한을 그대로 접어 손안에서 구긴 할아버지가 로플렝 남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며칠간 가문 내 크고 작은 일들을 조사했다, 그리 말했더냐.”
“예? 아, 예. 큼, 그랬습니다.”
작은 눈을 데굴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로플렝 남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서릿발 같은 할아버지의 눈동자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할아버지의 눈에 들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안드레아 님의 명령으로 불법적인 일이 있지는 않았나 조사하였습니다.”
“결론은.”
“예, 가주님. 그 조사 과정에서 베넷의 횡령에 대한 것과 권한을 남용한 부분까지 확인이 되었고, 그에 따른 증언도 여기…….”
로플렝 남작이 뒤따라 들어온 부관에게 건네받은 서류를 할아버지께 건네었다.
“여기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 자리 모서리 끝에 맞추어 서류를 올려놓은 로플렝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두툼한 표지를 내려다보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이들의 것은.”
“예?”
“내 집안의 문제가 베넷만 있더냐.”
“다른 소소한 것들도 있긴 하였사온데.”
“무엇이지?”
“레티시아 아기씨의 하녀가 크고 작게 물건을 빼돌린 것이나.”
“또?”
“행정부, 특히나 베넷의 아랫 수하들 또한 출처를 알 수 없게 사용되는 돈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과 리비에 백작과 여타 가신들이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지 않은 것도…….”
“그리고?”
“……예?”
“그리고 또 무엇이 있지?”
할아버지가 로플렝 남작을 잡아먹을 것처럼 빤히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