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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94)화 (94/141)

94화

“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깨를 움츠린 로플렝 남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엇을 묻는 건지, 그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없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남작이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 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늪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일 거다.

베넷은 쳐내야겠는데, 할아버지께서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말을 말아 버리면 안드레아에게 제가 내쳐질 것 같고.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 텐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눈동자만 이쪽저쪽으로 데굴데굴 굴리는 로플렝의 표정에 그를 한참 바라보시던 할아버지가 팽팽하던 긴장의 끈을 누그러트리듯 물꼬를 터 주셨다.

“네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내 집안의 문제는 없더냐.”

“아, 예. 뭐 말씀드린 레티시아 아기씨와 윈드런 님에 대한 소소한 문제들을 제외하고는 딱히 없었…….”

하지만 생각조차 않고 곧장 고개를 젓는 로플렝의 말을 막듯 할아버지가 구겨 쥐고 있던 종이를 베넷을 고발하던 증언 목록 위에 툭 올려놓았다.

“보아라.”

“이, 이것이 무엇……”

할아버지의 살벌한 표정에 로플렝 남작이 입을 다문 채 종이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용히 만찬장 안으로 들어온 케이트가 벨리아의 뒤에서 무어라 속삭이는 게 보였다.

딱딱하게 굳어지다 이내 희게 질리는 벨리아의 표정과 살짝 휘청거리는 몸까지.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네.’

내가 숙모들을 위해 준비한 쇼 타임의 막이 오른 듯한 신호들에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가주님, 이건!”

“아, 아버님!”

마음속으로 ‘셋’을 세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팍, 하고 들어 올린 로플렝 남작의 시선이 벨리아와 안드레아를 향해 돌아갔고, 그런 로플렝의 시선을 외면하듯 벨리아가 다급히 할아버지를 부르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벨리아의 시선을 그대로 외면한 할아버지는 로플렝 남작만을 빤히 응시했다.

“내 집안의 문제가 정녕 없었더냐.”

“그, 그것이.”

“아, 아버님, 제 말을 먼저 들어 주세요. 그런 것이 아니…….”

“아니다?”

할아버지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듯한 벨리아의 다급한 부름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뒤늦게 돌아갔다.

“그래, 아니겠지. 네가 그럴 리 없지. 그렇지 않으냐, 벨라.”

서늘한 시선도 없고, 한껏 누그러진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희망을 보았던지 손수건을 쥐어짜듯 움켜쥔 손을 푼 벨리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님, 제가 다 설명드릴 수 있어요. 그럼요. 제가 그럴 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내 너를 믿으마.”

“무, 물론…….”

벨리아의 말에 웃던 표정을 싹 지운 할아버지가 그대로 필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아이, 데려오너라.”

* * *

미리 설명을 덧붙이자면, 할아버지가 받은 서한은 고발장이었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에시어를 상대로 이러이러한 고발장을 냈다는 걸 알리는 내용이었고, 그 고발장의 주인은-

“네가 엘린 오브더냐.”

엘린이었다.

“예, 예. 가주님. 얼마 전까지 에시어에서 벨리아 님을 모셨습니다.”

맞다.

벨리아 숙모에게 팽 당해 쫓겨난 그 엘린 말이다.

“아, 아버님!”

그리고 그녀의 등장에 가장 크게 당황한 건 역시나 벨리아 숙모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만 애타게 부를 뿐 ‘아니다, 거짓말이다.’ 하는 소리를 내지를 수 없는 이유는 엘린이 무슨 소리를 할지 예상하지 못하는 데 있었다.

고발장에 적힌 내용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긴 오늘 낸 고발장 내용 파악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들에게 할아버지 정도의 정보력이 있지 않고선.

해서 희게 질린 얼굴로 애꿎은 손수건만 쥐어짜고 있는 것이었다.

“이 내용을 전부 네가 기술한 것도 맞고?”

“네, 그렇습니다.”

“거짓으로 음해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알고 있겠지?”

“…예.”

흘끗 눈을 돌리던 엘린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 적힌 것들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이냐.”

“가주님께서 레티시아 아기씨의 잔고를 확인해 보면, 명명백백히 아실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아버님!”

벨리아가 찢어질 듯 갈라진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으나, 그의 시선은 전처럼 숙모를 돌아보지 않았다.

실망일까?

‘아마도.’

할아버지께선 숙모가 내 돈을 건드렸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돈은 넘치도록 많은 곳이 에시어였으니까.

그들이 굳이, 내 돈에까지 손을 댈 이유가 뭐가 있었겠나, 라는 생각에 할아버지도 그 부분까지는 신경 쓰지 않으셨던 거였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었지만, 자신의 등잔 밑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르셨던 거다.

‘물론 그 돈이 어디로, 무엇을 위해 흘러갔는지도 모르셨을 테지.’

할아버지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할아버지의 돈을 쓰는 것처럼 무모한 일은 아무리 안드레아라 해도 겁이 나지 않았겠나.

해서 차선으로 생각한 것이 눈먼 내 돈이었고,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을 했다는 걸 들킨다 해도 아빠에게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

‘전생에서처럼.’

‘레티시아 님의 계좌에서 빠져나간 돈이 불법적인 약재를 사들이는 데 사용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가주님을 독살하려 하신 겁니까?’

물론 그때는 나를 쫓아내기 위한 수많은 이유들 중 하나였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게 전부 아빠를 향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아빠가 돌아가시고도 나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었던 거지?

내가 에시어를 더럽힌 사생아의 딸이라서?

말도 안 돼.

솔직히 말하면 가주가 된 안드레아가 그 정도로 에시어의 순혈성을 지키고 싶어 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 대체 왜?

할아버지도, 아빠도 잃은 상황에서 난 그들의 구미에 맞춰 결혼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좋은 물건이었을 텐데.

나이도 이제 막 성년을 지났을 때였고.

내가 정말 꼴 보기 싫었다면 그런 식으로 최대한 이용해 먹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왜 그렇게 다급했던 거지?

이상해.

내 계좌의 돈까지 알차게 써먹던 그들이 나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게 다시금 의아해졌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숨을 깊게 몰아쉬며, 안드레아와 벨리아를 돌아본 순간-

“한데 왜 그걸 지금에 와서 고발한 것이냐.”

엘린을 향한 할아버지의 말에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레티시아 아기씨가 걱정되었습니다, 가주님.”

* * *

“가주님께서 동쪽 별관에 가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아기씨께선 아주 기본적인 부분조차 제대로 보살핌 받지 못하셨었습니다.”

한숨을 푹 하고 내쉰 엘린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침구는 하녀들이나 쓸 법한 것들이었고, 옷도 가주님을 뵐 때 입을 수 있는 옷을 제외하고는 제가 입는 것만도 못했지요. 식사도 부실했고, 하녀들도……. 아리나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두 벨리아 님의 명으로 이루어진 것이…….”

“너!”

엘린의 말이 이어질수록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던 벨리아가 끝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내질렀다.

“아버님, 믿지 마세요. 제게 억하심정을 갖고 있는 아이입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쫓아낸 것에 앙심을 품…….”

“그 일을 제대로 못 했다는 건 아리나를 이용해서 아기씨께 약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흑.”

엘린이 끝내 손등으로 입을 막으며 흐느끼기 시작하자, 벨리아가 뒷덜미를 잡았다.

“아버님!”

“그만.”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든 마고가 벨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티시아의 돈을 사용한 것이 맞느냐.”

“그건 제가 너무 급하여…….”

“사용했다는 것이냐.”

“…….”

“에시어 가문의 며느리가 저 어린 것의 푼돈까지 써야 할 일이 무엇이냐.”

그의 채근에 흘끗 안드레아를 돌아본 벨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금세 채워 놓으면 된다고, 호언장담하던 제 남편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제 면만 깎이게 되질 않았나.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계좌 내역을 확인하겠다며, 리비에 백작이라도 불러들이면 큰일이었으니까.

‘어디로 흘러 들어갔는지는 제대로 처리한 거겠지?’

솔직히 그녀는 그 돈이 누구에게로 가서 무슨 일에 쓰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먼 돈이 필요하다는 제 남편의 말에 레티시아의 재산에 대해서 말해 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 남편이 썼다고 하면, 또 가주님의 미움을 사게 될 게 눈에 뻔했으니-

“송구합니다.”

제가 덮어쓰는 편이 옳았다.

‘짜증 나!’

대체 헬렌은 뭘 한 건지.

레티시아의 곁에서 사람도 떼어 놓지 못하고, 그 노예도 데려오지 못하지 않았나.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얼굴을 들이대고 추궁을 했어야 했는데.

모든 게 다 헬렌의 탓인 것만 같은 벨리아가 헬렌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하, 무역? 배 스무 척?’

제가 다 차려 놓은 자리에 그저 손만 걸치려는 그 몰염치함에 입술을 잘근 씹자-

“아버님, 재정을 담당하는 자리는 원래 손해를 감수해야지 않겠습니까.”

헬렌이 앞으로 살짝 걸어 나왔다.

“형님께서 워낙에 꼼꼼하시지만 아랫것들이 제대로 챙기지 못하여 일어나는 손해를 부득이 그런 식으로라도 해결하려 하셨음이 아닐지요.”

“…….”

“행정처에서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으면, 백작가의 영애로 귀하게만 자라신 형님께서 그런 일까지 하셨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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