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쟤들이 왜 저기 있지?
순간 ‘꿈인가?’ 하는 마음에 눈을 깜박였다.
전생인가?
상황은 분명 다르지만 어쩐지 전생에서 처음 리안과 쟈이든을 만났던 장면과 비슷한 것 같았다.
그때도 이렇게 나는 집으로 들어가는 중이었고, 저 두 사람은 집에서 나오는 길에 만났었으니까.
시기는 완전히 달랐지만.
“주인님아!”
물론 지금처럼 쟈이든이 주인 만난 개처럼 꼬리를 흔들어 대는 모양새도 아니었고, 리안도 반가워는 하는데 쟈이든처럼 티를 내지는 못하고 입을 실룩거리지는 않았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과거의 저 두 사람은 대체로 ‘저 미친 아이는 뭐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었다.
소설에서도-
리안이 사진을 보며 ‘엄마, 옆집에 이상한 애가 이사를 온 거 같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고 말이다.
근데 장면 자체는 지금과 똑같았다.
설마, 소설 속 서사를 따라가려는 건가?
평민 시절 만났던 옆집 여자아이인 나로 인해 여자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는 황태자, 리안.
그걸 위해 전생과는 다른 위치에 살고 있던 그가 우리 집 옆으로 옮겨 온 건가? 하는 생각에 하늘을 흘끗 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어찌 됐든 소설 속 내용과 똑같이 만났으니까 멘트도 소설과 같아야 하지 않겠나.
해서 방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난 옆집에 살게 된 레샤라고 해. 너 참 예쁘게 생겼구나?”
“…….”
생긋 웃으며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구는 내 표정에 리안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자, 그 뒤에 선 쟈이든이 킥킥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뭐예요. 주인님, 왜….”
탁-
하지만 쟈이든이 말을 끝낼 새도 없이 몸을 돌린 리안이 집으로 들어갔다.
“저거 또 시작이네.”
“아기씨.”
나를 면전에서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태도에 쟈이든이 급히 말을 보탰다.
“며칠 전에 집에 불이 나서 저러는 모양이에요.”
쟈이든이 뒷머리를 긁었다.
“주인님이 이해하세요. 그때 좀 많이 놀랐던 모양이더라고요. 거기다 불에 좀 다치고 해….”
“불 때문에 다쳤어? 어디를?”
“아, 어.”
고개를 확 쳐드는 내 말에 쟈이든이 얼굴을 미미하게 찡그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쟈이든을 신경 쓸 틈 없이 한 발 가깝게 다가섰다.
분명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는데.
“많이 다쳤어? 어디 다쳤는데?”
“…손이요.”
놀란 얼굴로 쟈이든을 올려다보자, 이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엷게 웃었다.
마치 그런 적 없었다는 듯.
“뭘 가지고 나오느라고…. 어, 저거요.”
쟈이든의 시선을 받은 리안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손에 움켜쥐고 있던 것을 내 앞에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
가죽 천에 돌돌 말린 웨르시펠이었다.
“이건 내가 맡아 달…….”
“싫어.”
그가 내 손을 억지로 잡아 손바닥 위에 검을 올려놓았다.
“저거 또 지랄이네.”
그런 그의 행동에 쟈이든이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안은 펼쳐 놓은 내 손가락을 접듯이 감싸 검을 쥐여 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의아하다 못해 약간 당황스러웠다.
며칠 전에 검을 맡아 달라고 했을 때와는 너무 달라서.
‘이걸 좀 맡아 줘. 나랑 아빠한테는 소중한 거니까, 잘 가지고 있어야 해.’
‘알겠어.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게.’
분명 그때는 이렇게까지 날이 바짝 서 있지 않았는데.
고작 사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싶어 리안의 뒤쪽에 물러서 있는 쟈이든을 바라보자, 리안이 탁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그러곤 인사도 없이 쿵쿵대며 옆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
어디 나가려던 거 아니었나.
손안에 쥔 검을 매만지자, ‘아.’ 하고 탄식한 쟈이든이 뒷머리를 긁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그 표정에 정답이 있겠다 싶어 고개를 들자 쟈이든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검을 가리켰다.
“그 검, 리안이가 그거 가지러 집에 도로 들어갔었어요.”
그래서 다친 거였구나.
다쳐서 화가 난 걸까?
아니야, 우리 리안이가 그래도 그렇게 소심하고 쪼잔한 놈은 아닌데.
그럼 대체 왜 뭐에 저렇게 화가 난 거지?
“그랬구…….”
“근데 그걸 꺼내려다 자기 엄마 그림을 꺼내지 못한 모양이에요.”
“!”
* * *
‘그래서 저래요, 쟤가.’
‘자기 스스로가 미운 모양이더라고요.’
‘아마 쟤도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주인님한테 화풀이한 거, 자기도 알 테니까.’
붕붕붕-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깨작거리다 이내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뭘 먹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운 쟈이든의 목소리 때문에.
‘자기 스스로가 미운 모양이더라고요.’
“하아아.”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한숨 탓인지, 헤일의 시선이 잠시 내게 닿는 게 느껴졌으나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아빠의 검 때문에 엄마의 하나뿐인 초상화를 건지지 못했던 리안의 심경이 어땠을지.
사진처럼 흔한 것도 아니고.
리안의 엄마가 황제의 눈에 들었던 그 시절, 황제의 자비로 화가를 불러 딱 한 장 그린 그림이었다고 했는데.
망했네.
얼굴을 감싸 쥔 채 몸을 옆으로 돌려 웅크렸다.
나 같아도 내가 미울 거야.
“하아.”
다시금 깊은숨을 내쉬었다.
내 이기심 때문에.
‘그래, 이타성은 무슨 이타성.’
내가 나를 아는데.
모든 사람들이 신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버둥거리고 지금 상황을 바꾸려 애를 써도 결국 신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도 ‘옆집에 살던 여자아이 때문에 여자에 대한 혐오감을 갖는 황태자.’라는 설정을 완성하기 위해 리안이가 나를 미워해야만 하는 이유들을 쌓아 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리안의 집이 불에 타서 굳이 아빠의 집 옆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도 그걸 위해…….
‘아.’
순간, ‘아빠의 집’이라는 단어가 목구멍에 탁 걸린 것처럼 제대로 삼켜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마련해 두신 집이 있음에도 내가 굳이 이 집을 선택한 이유.
아빠가 앉아 있던 의자, 같이 웃던 테이블, 침대, 캐비닛 안에 들어 있던 인형들. 아빠가 준 선물, 식사를 하며 웃던 순간들과 감정까지.
이 집 구석구석 아빠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 집이 소중했다.
이곳이 사라진다는 걸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고작 며칠뿐이었는데도.
한데 엄마와 평생 지냈던 그 집을 잃어버린 리안이의 마음은…….
“하아.”
그건 단순히 엄마의 초상화를 잃은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실감일 거다.
‘내 탓이야.’
신의 장난도, 소설 속 개연성도 아닌.
온전한 내 의지로 만들어 낸 내 잘못이었고, 안일함이었다.
내가 쟈이든을 사지 않고, 그냥 이야기 흐름대로 흘러가게 두었다면.
아니, 샀다 한들 리안에게 억지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혹은 보낸다 해도 시일을 두고 내가 오네에 온 뒤에 보냈더라면, 리안의 집이 불탈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숙모들이 쟈이든을 주목하지 않았을 거고, 그렇게 되면 그들을 건드릴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내가 경솔했던 거야.’
따끔거리는 가슴 언저리에 손을 댄 채 꾹 눌러 문질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다 내 뜻대로 했다 해도, 그 날 리안에게 웨르시펠을 맡아 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리안이가 엄마의 초상화는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끝도 없이 줄줄줄 흘러나오는 후회에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다 나 때문이야.
‘신의 장난은 무슨.’
누군가에게 지금 이 상황을 떠넘기고 싶어 하는 내 핑계일 뿐이었다.
그러니 오롯이 이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그래야 실수를 줄이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벌떡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지금 이렇게 우울해하며 땅굴을 파고 들어갈 시간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내게 남은 건 12년이라는 시간뿐이었으니까.
그 안에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리안이가 나를 미워하게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소설의 개연성이든, 서사든, 신의 뜻이든.
내가 노력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래!’
양 주먹을 꼭 쥔 채 손을 위에서 아래로 힘주어 내리자-
“아기씨.”
곁에서 나를 빤히 보고 있던 헤일이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전화, 아니 통신 마도구를 건네었다.
“샤리에 님이세요.”
“아빠?”
오늘 오네로 나오는 걸 알고 전화하신 건가?
반가운 마음에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려가 마도구를 받아 들었다.
“아빠!”
[레샤, 오네에는 잘 도착했니?]
해맑게 부르는 내 부름에 아빠의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마치 곁에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은 낮고 다정한 목소리에 어쩐지 코끝이 찡하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아빠가 보고 싶어.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꾹 깨물자-
[보고 싶구나, 레샤.]
아빠가 작정한 듯, 내 눈물 버튼을 눌러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조용히 터져 버린 눈물이 턱 끝에 맺혀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
놀란 헤일이 다급히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으나, 주룩주룩 흐른 눈물은 그칠 생각을 않았다.
하지만-
“나두요. 나두 아빠 엄청 보고 싶어요.”
얼른 오라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숨긴 채 밝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