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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00)화 (100/141)

100화

“그 아이의 집은 그 날 보셨던 용병들에 의해 전소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가주님의 명으로 그 전에 이미 피신시켜 놓았고요.”

“할아버지가?”

놀라움을 담아 베넷을 올려다보자,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빤히 보았다.

“예, 아기씨께서 아이들을 지켜 줘야 한다, 하셨다더군요.”

“아.”

맞다. 그랬지.

숙모들이 쟈이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할아버지께 가서 죄를 청하고는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을 했었다.

다만 ‘누구에게서’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겠지, 뭐.

“그래서 옆집 살던 노부부 쫓아내고 리안이한테 집 준 거야?”

“쫓아내지는 않았습니다. 마침 그 부부가 코델에 사는 딸의 집으로 간다기에 집을 구매한 것뿐이죠.”

그랬구나.

안경을 올려 쓰는 베넷의 말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불은 왜 지른 거래?”

쟈이든을 감시하느라 그 집을 주시하고 있다는 건, 이미 폴에게 대충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근데 왜 불까지 지른 건지 그걸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들었다.

“애들을 죽일 작정이었대?”

“아뇨.”

“그럼?”

“두 아이가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아서, 불을 낸 거라 합니다.”

“……뭐?”

순간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휙 하니 쳐들었다.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아서? 불을 낸 거라고?”

애들을 죽이려 했다는 말보다 더 황당한 이유에 미간을 좁히자 베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이들을 죽이는 건 자신들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고, 그저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오게 하려 한 것뿐이라 하더군요.”

아니,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불을 지르는 게 정상인가?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바득 갈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나오면?”

“그 날 만찬에 데려올 작정이었던 모양입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는 베넷의 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시치미 뗄 것까지 생각해서 이런 수를 쓰신 건가?

알면 알수록 정말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두 사람의 행동에 고개를 들었다.

“벨리아 숙모랑 헬렌 숙모 둘 중 누구?”

개중에 누가 더 지독한가 싶어 베넷을 올려다보자, 안경을 살짝 올려 쓴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은 헬렌 님께서 주도적으로 움직이셨더군요.”

헬렌 숙모라.

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도 부족해 쟈이든을 끌어내기 위해 방화까지.

선한 얼굴로 저지르는 그녀의 악행을 떠올리자 속 답답한 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엘린의 일 역시 헬렌 님께서 움직이셨더군요.”

“그건 알아.”

헬렌 숙모가 엘린을 뒤흔들어 놓은 상황에서 고발장까지 쓰게 만든 게 나였으니까.

이리저리 바쁘셨겠어.

내 곁에 린지도 심어 놓고.

아, 맞아.

“그 하녀는 어떻게 됐어?”

내 단검을 훔쳐 간 아이, 앤.

“아기씨 처소의 3급 하녀 말씀하시는 거죠? 그 아이라면 그날부로 바로 저택에서 쫓겨났습니다.”

헤일이 잠시 베넷을 보다 이내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푹 하고 숙였다.

단검을 훔쳐 벨리아의 하녀에게 건넨 것이 앤이었다는 사실에 헤일은 조금 충격을 받은 듯 보였었다.

‘앤이요? 그 앤이요?’라고 두세 번 되물을 정도로.

짧지만 곁에 두고 함께 일한지라, 정을 붙였던 모양이었다.

헤일도 마음이 약하지.

“아마 추천장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 다른 곳에서 일을 얻기는 어려울 겁니다.”

“응.”

에시어의 3급 하녀였다고 하면 그래도 좋은 급여를 받을 수 있겠지만. 앤의 경우는 추천장도 없이 맨몸으로 내쫓겼으니까.

“알겠어.”

린지를 부르며 안절부절못하던 앤의 얼굴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녀도 어찌 됐든 이용당한 거였으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그래서는 가문의 기강이 해이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용인들은 그런 권력 관계에 휘둘리기 쉬우니까.

그렇기에 이 일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되었다.

그런 식의 핑계 뒤에 숨은 채 움직이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충성스럽게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일하는 이들도 많았고, 그런 그들을 위해서라도 본보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도 적당히 경고를 줄 수도 있었고.

그나저나, 숙모가 참 여러 사람 힘들게 하시네.

앤을 비롯해서 몇 명의 사람들이 헬렌의 수하일까.

모든 이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번 일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베넷을 올려다보았다.

“앤, 추천장은 못 줘도 퇴직금은 조금 챙겨 줘.”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할 테니까.

“네.”

“아빠 이름으로.”

“……알겠습니다.”

‘아빠 이름’이라는 말에 잠시 나를 빤히 보던 베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이 짧은 대화로 그는 모두 이해한 듯 보였다.

“그리구 내가 부탁한 것도 빨리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서둘러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베넷이 오자마자 당부한 일을 다시금 강조하곤 그를 보았다.

“그럼 오늘 할 말은 끝?”

제발, 제발.

이제 그만하자.

내일부터 공부해야 하는데, 오늘은 좀 쉬어야지.

간절함을 담은 내 말과 시선에 베넷이 안경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구럼 베넷, 안녕!”

그의 끄덕임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곤 그 길로 곧장 달려 나가 옆집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리안아.”

하지만 주먹으로 두드리며 부르는 내 목소리에도 안쪽에선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없나?

집에 있으면 쟈이든이라도 뛰어나왔을 텐데.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없나 보네.

다들 어딜 간 거지?

몸을 살짝 일으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얼른 만나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언제 오려나 싶어 고개를 쭉 빼 들고 앞을 보다 이내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올 때까지 기다리지, 뭐.

할 일도 없는데.

아니지. 오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리안을 만나서 사과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하루 종일 기다릴 수 있었다.

어쨌든 집에는 올 게 아닌가.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마음 단련도 좀 하고.

사과를 받아 주지 않으면 어쩌지?

나를 혐오하는 눈빛으로 보면?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

그래도 전생보다는 낫겠지?

전생에서는 나를 진짜 엄청나게 싫어했는데, 지금은 그래도 전생에서처럼 나를 싫어할 일이…….

있지.

저 집.

끙.

마법사를 불러 시간을 되돌려 놓고 싶어도, 이게 시일이 너무 늦어서 자칫 잘못 썼다간 시공간을 어그러트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또 다른 부작용이 생겨 날 테니, 그걸 해 줄 마법사도 존재하지 않을 거고.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숙여 손안에 흐르는 이능을 빤히 보다 작은 주먹을 쥐었다.

나도 내가 무슨 이능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고대어를 읽고, 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배우지 않은 문제를 막 풀어 댄다고 그걸 이능이라고 하는데. 그게 이능이 아니라는 건 나뿐만 아니라, 올가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아시는 눈치였고.’

그리고 그렇다 해서 내 이능을 예지라고 말하기에는.

이렇게 제멋대로인 예지가 어디 있담?

조금 무리가 있었다.

내가 하는 미래에 대한 말들은 그냥 내가 전생에서 겪었던 일들을 풀어놓는 거고.

이 세계에서 말하는 ‘이능’은 이능력을 발현시킨 순간에 예지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난 아무리 노력해도 뭐가 보이질 않던데?

며칠 전 그 ‘불이야!’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불이 얼마 전 리안이의 집에 났던 불인가 싶기도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뭐 올가는 무슨 이타성이네 뭐네 하는 소리를 하긴 했다만, 그건 내가 가진 이능의 기질일 뿐, 특성이 아니었다.

“어휴, 답답해.”

작게 말아 쥔 주먹으로 가슴을 콩콩 하고 두드렸다.

하지만 이런 내 상황보다 더 답답한 건, 한밤중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그날 밤, 내가 집으로 돌아가 자기 전까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도 옆집에선 사람이 드나드는 기척이 없었다.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외박이라니.

이것들을 대체 어찌해야 하나,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잠에서 깨어났다만-

“아침에 리안이랑 쟈이든 봤는데요?”

대체 얘네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며 툴툴거리는 내 말에 펠이 눈을 깜박였다.

“어디서?”

“집 앞에서요.”

“…….”

설마 있었던 건가? 아니면 대체 얼마나 늦게 집에 들어온 건가.

“집에 들어갔어?”

“아뇨, 집에서 나오는 길 같았는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펠이 나를 빤히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하지만 그 시선까지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이것들이.

당장 나가서 이것들을 잡아 와야지 싶어, 탁 소리 나게 식탁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만- 

“어디 가십니까?”

그런 내 앞을 베넷이 막아섰다.

그 뒤로 선 두 명의 가정 교사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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