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역시나 가정 교사 중 하나는 올가였고, 남은 한 사람은 철학 선생 키에트였다.
아, 키에트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그의 수다스러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머리를 부여잡는 사이, 키에트는 어쩐지 조금 신이 나 버린 듯했다.
“제 자랑처럼 들리기도 하고, 다른 좋은 선생님들도 계셔서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제가 철학뿐만 아니라, 언어도 잘합니다. 심지어는 음악과 수학 분야에서도 수준급 인재랍니다. 아카데미에서도 알아주는 수재였지요.”
어쩐지 말 사이사이로 ‘엣헴엣헴.’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물론 레이디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예법이 조금 걱정되는 바이지만, 이 부분이야 아기씨의 타고난 우아함으로 보완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저택으로 돌아가시면 충분히 따라잡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건 네가 알아서 하라는 거네?
“다른 부분은 이 키에트만 믿으세요. 그동안 다른 직계들의 눈치를 보느라 말씀드리지 못했던, 제 머릿속에 있는 모든 걸 알려 드리겠습니다.”
밝게 웃으며 빠르게 말을 쏟아 내는 키에트를 조금은 질린 얼굴로 올려다보자,
“내 눈치는 안 봐도 되시나 봐요?”
내 옆에 앉아 있던 리리아나가 팔짱을 꼈다.
맞다, 얘도 있었지.
올가의 등장은 당연히 예상한 바였고, 키에트도 오지 않길 바랐던 것뿐 그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한데-
“내 예법이야, 엄마한테 배우니까 완벽하고, 다른 건 나도 키에트만 미드면 되는 거예여?”
리리아나가 올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질 못했다.
“아, 그, 그럼요!”
“그럼 매일 오면 되나?”
키에트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찍어 내며 나를 향해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나도 그 못지않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리리도 여기서 공부해?”
“응.”
“너두 오네에 온 거야?”
‘경쟁자 추가인가?’ 하는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였다만, 리리아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오네를 왜 와? 난 포틀런 백작 영애인걸?”
그건 그렇네.
포틀런에서 에시어 공작가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드러낸 게 아니라면.
“그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리리아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손바닥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솔직히 에시어에서 공부하는 것도 엄마가 바라니까 가는 거지. 난 후계 욕심 없어. 백작가가 오빠랑 내 건데? 내가 왜?”
그렇네.
리리아나만 있었다면 백작가의 다른 방계들에게 뜯어 먹힐 여지가 있었으나, 저 집안의 직계는 단둘뿐이었다. 장남이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굳이 후계 자리를 두고 싸울 필요가 없었다.
‘좋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빠가 가주가 된 이후가 조금 걱정이 되긴 했으니까.
나는 죽을 거고, 그렇게 되면 아빠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어지질 않나.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전에 아빠 재혼까지 시켜 놓아야 하나.’
“…….”
와, 이건 뭐 일이 끝이 없네.
‘20살에 죽는 이유가 혹시 과로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미간을 좁히자 리리아나가 그런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쨌든 내일부터 여기서 공부할 거야.”
“왜?”
순간 튀어나와 버린 말에 리리아나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솔직히 고모가 바란 건 리리아나가 에시어 저택에서 양질의 수업을 받는 거 아니었나.
근데 이 좁고 답답한 아빠 집에서 수업을 받겠다니.
대체 얘가 무슨 생각인가 싶어 빤히 바라보자, 리리아나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꾸했다.
“너랑 수업 같이 받으려고.”
“…….”
“너 혼자는 심심할 거 아니야.”
순간 말을 이해하지 못해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자, 그런 내 시선이 불쾌한 듯 리리아나가 미간을 확 좁혔다.
“왜? 싫어?”
“아, 아니! 싫지 않아!”
“그럼 좋아해야지! 왜 그런 표정인데?”
리리아나가 짧은 팔로 팔짱을 꼈다.
“아니, 여긴 네가 있기엔 너무 허름하지 않아?”
“안 허름해. 집이 다 거기서 거기지.”
여기 좌우 집을 전부 합치고도 남을 크기의 방을 갖고 있는 리리아나의 귀여운 허세에 웃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꾹 누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 있으면 나도 좋아!”
“그치? 나도 그럴 줄…….”
“군데.”
하지만 리리아나를 조금 자제시킬 필요는 있었다.
“군데?”
“여기 올 때는 조금 덜 화려하게 입구 와. 여기는 평민들이 사는 곳이잖아. 너무 화려하게 입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봐.”
최대한 기분이 상하지 않게끔 말을 골랐으나, 리리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그렇게 입은 건데?”
“응?”
“수수하잖아.”
손을 양쪽으로 벌려 뻗은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었다.
그 뭐가 문제냐는 듯한 얼굴에-
‘아.’
이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에 보석도 달려 있지 않고, 은사로 짠 레이스로만 치맛단과 소매를 장식해 놓았으니.
그래, 리리아나의 입장에선 수수하다고 생각할 만했다.
이렇게 그녀와 나의 화려함의 기준 차이를 명확히 인식한 사건을 마무리하며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그래, 그럼 내일은 하녀들은 데려오지 마. 아니, 한 명만 데려와. 알겠지?”
* * *
‘알겠어.’
실랑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순순히 하녀는 한 명만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리리아나는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으아! 힘들어!”
하지만 리리아나가 떠나고도 한참을 키에트에게 붙들려 수업을 해야 했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빠져나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평소에도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더했다.
집중할 사람이 나뿐이니 분산되어 있던 열정을 내게 전부 쏟아붓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오늘 반나절 동안 배운 양이 몇 달간 저택에서 배운 것보다 많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힘들다고!
“이걸 2년 내내 해야 한다니!”
와.
이게 진정 6살이 감당할 수 있는 일정인가를 잠시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지쳤다는 귀여운 말로는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몸 상태에 빵도, 수프도 다 싫었다.
그냥 이대로 쓰러져서 잠을 자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 바람을 저버리듯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오늘치 수업은 끝났으니, 헤일일 거라 생각했다만-
“나 저녁 안 먹을 거…….”
“아기씨, 올가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가볍게 노크한 후 방으로 들어온 올가가 침대에 너부러진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쯧쯧. 안쓰럽다는 듯 빤히 보는 그의 시선에 아주 잠깐 기대를 크게 품었으나.
“저녁도 안 드신다니, 수업을 조금 더 할 수 있겠군요.”
“응?”
“저녁 수업이요. 피곤하셔도 할 건 다 하셔야죠.”
올가는 봐주지 않았다.
‘망할 올가.’
단순히 봐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아니, 내 몸을 부술 수만 있다면 부숴 버릴 것처럼 나를 몰아붙였다.
이 사람, 내가 6살이라는 거 잊은 건가?
어쩜 이렇게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몰아치는 건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한 번에 하나 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올가는 한 번에 서너 개를 요구했다.
“손끝에서 흐르는 이능이 어떤 감촉인지, 그 온도를 느껴 보세요. 흐름이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를요. 집중하셔야 부작용을 최소화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천천히 손을 뻗어 보…!”
“이렇게?”
펑! 쾅! 쿠당퇑!
“헉!”
그리고 결과는 벽에 뚫린 구멍이었다.
난 분명 올가의 지시대로 이능을 느끼면서 손을 뻗었는데?
“헤일, 안녕.”
뚫린 벽 너머에서 놀라 굳어진 헤일을 향해 손을 흔들자, 그 구멍 너머로 팅커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게 보였다.
‘역시…. 이래서 내가 웨르시펠을 숨긴 거라니까?’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 그 돼지의 형상에 어깨를 늘어트리자 올가가 순식간에 마법으로 벽을 메꾸었다.
“괜찮습니다.”
그러곤 벽을 보호하기 위함인지, 마력으로 방 안에 보호막을 가동했다.
“편히 움직이셔도 됩니다.”
어디 마음껏 해 보라는 듯 내 앞쪽으로 손을 펼치는 그를 보며 말아 쥔 손을 살짝 풀자, 자신만만하던 올가가 순간 움찔하며 내 시야에서 살짝 벗어나기 위해 뒷걸음질치는 게 보였다.
“더는 모태.”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안 해!”
“고생하셨어요.”
고개를 젓는 나를 보며 올가가 보호막을 걷어 냈다.
“그리 힘드신 줄 몰랐습니다. 진작 힘들다 말씀하지 그러셨어요.”
“진작 말했으면 끝내 줬을 거야?”
“네.”
헐.
“전 착한 사람이니까요.”
“그럼 다음번에 내가 힘들다고 하면 바로 끝내 줄 거야?”
“그건 그때 가 봐야 알겠죠?”
시익 웃은 올가가 걷어 낸 보호막을 손끝으로 흐트러트렸다.
“사기꾼.”
“감사합니다.”
타격이라고는 받지 않는 모습에 약이 바짝 올라 슬쩍 눈을 흘기자, 웃으며 창문을 연 올가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옆집에 꼬마들이 사….”
“있어? 왔어?”
하지만 올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튕기듯 벌떡 일어나 창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올가의 말대로 리안과 쟈이든이 티격태격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드디어 잡았다, 요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