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올가, 내일 바!”
“예.”
그의 대답을 뒤통수로 들으며 문을 열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그야말로 계단을 구르듯 내려가자 헤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 걸 보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또 도망가면 어쩌나 싶어, 다급히 화다닥 뛰어 옆집으로 달려갔다.
학학.
가뜩이나 약한 몸에 이능 수업까지 받아서인지, 고작 2층 방에서 옆집으로 뛰어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만-
쿵쿵쿵!
쾅쾅쾅!
분명 이 집으로 들어가는 걸 봤음에도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대체 뭐지?
리안만 있다면 이해할 수 있는데, 쟈이든이 함께 있지 않은가.
쟈이든이 나를 피할 리는 없는데.
여기 뭐 다른 시공간으로 통하는 길이 있나?
집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문에 귀를 댔다만-
“거기 아이들 아까 저기 옆 골목으로 가던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 아주머니 한 분이 친절히 그들이 집 안에 없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아.”
없는 거구나.
그래.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만 봤지, 문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까지는 못 봤으니까.
또 어딜 갔구나.
이놈들.
진짜 잡히기만 해 봐!
씩씩대며 집으로 돌어와 식탁에 앉았다.
쾅!
“나 빵이랑 수프 먹을 거야!”
하지만.
씩씩대며 들어온 보람도 없이 리안과 쟈이든은 일주일째 감감무소식이었다.
피어스랑 헤일에게도 물어봤으나, 두 사람 모두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
‘이제 슬슬 불안해지는데.’
두 사람이 집에 붙어 있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가도 없고, 밤늦게 가도 기척이 없었다.
근데 또 집에 안 들어오는 건 아니라니.
‘내가 못 보는 것뿐.’
“후.”
리리아나를 보내고 나서 식탁에 늘어지듯 엎드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라면 리안이와 화해를 하기도 전에 오네에서의 2년이 지나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 추운 날 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니니.’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타는 나무를 보며,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자-
“아기씨.”
걱정스러운 기색의 헤일이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응?”
“리안 님이 걱정되어서 그러시는 거죠?”
“으응.”
헤일의 말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주변을 잠시 살피더니 내 손을 잡았다.
“이리로.”
그러곤 2층에서 계단을 하나 더 올라가 3층 다락으로 향했다.
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여긴 왜 올라가나 싶어 헤일을 바라보자, 그녀가 주저하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여기서 옆집 중정이 보이는 줄은 모를 거예요?”
위치로 치면 내 방 맞은편 대각선 쪽으로 난 창을 연 헤일이 아래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러곤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는 헤일을 보며 살며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창문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달빛이 가득한 좁은 중정에서 리안이 나무 검을 아래위로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설 속에서 위대한 소드마스터가 되는 리안을 생각했을 때, 아무리 처음이라도 해도 너무 하찮은 모양새였다.
마치 네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처음 검을 잡고는 장난삼아 휘두르는 것 같은 그 어설픈 몸짓에 작게 웃음이 났다.
옆에는 쟈이든도 있었던 모양인 듯 바닥에 나무 검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오직 리안이만 보였다.
검은 머리칼 위에 동그란 관이 씌워진 듯 달빛이 드리워진 모습부터, 한겨울임에도 열이 오르는 건지 몸에서 김이 펄펄 나는 모습까지.
‘저러다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집 안에서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다 문득 오네의 일반적인 가옥들의 집 안 높이가 떠올랐다.
검을 휘둘렀다간 세간살이가 남아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천장에 목검이 닿겠구나.
그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장소가 저곳뿐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매일 밤새 이렇게 휘두르다 낮에는 자는 건가.’
근데 또 펠의 말대로라면 아침마다 어디로 가는 걸 봤다고 하지 않은가.
대체 얘네는 뭘 하고 사는 걸까.
의아함에 길게 한숨을 내쉬자-
“야.”
아래쪽에서 쟈이든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여기 물.”
“100번 남았어. 다 하고.”
“고집불통.”
혀를 끌끌 찬 쟈이든이 리안의 앞까지 가서 물잔을 내밀었다.
“마셔. 또 골골대지 말고.”
“골골댄 적 없어.”
“어차피 그 숫자도 네가 정한 거잖아. 마시고 해.”
“100번 금방 해.”
“어후!”
쟈이든이 질렸다는 듯 가슴팍을 팡팡 두드리는 게 보였다.
“주인님 또 왔다 가셨다.”
“알아. 들렸어.”
휙휙 검을 휘두르는 소리 사이로 섞여 들리는 리안의 말에 나도 모르게 창틀을 꼭 움켜쥐었다.
“너 때문에 나까지 이게 뭔 짓인지 모르겠다.”
“…….”
“주인님 걱정하실 텐데.”
하지만 쟈이든의 구시렁거림에도 리안은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결국 리안은 쟈이든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제 검을 움켜쥐고 몇 번 더 휘두르고 나서야 100번을 다 채운 듯 검을 내렸다.
“물 줘.”
“네가 갖다 처먹어.”
손등으로 이마와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아 낸 리안이 물잔을 집어 들어 단숨에 비웠다. 물을 꿀꺽꿀꺽 맛있게도 들이켜는 그를 보고 있자니 작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언제까지 삐져 있을 건데.”
“누가, 뭘 해?”
“네가 지금 내 주인님한테 삐져 있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경멸 어린 말투로 쏘아붙이는 리안의 말에 순간 손바닥에 땀이 스미는 것만 같아 허벅지에 손을 비볐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이렇게 피하는 건데.”
“부담 주고 싶지 않아.”
“…….”
“걔가 에시어라면 더더욱.”
순간 리안의 차가운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 * *
‘걔가 에시어라면 더더욱.’
리안의 목소리가 뱅뱅 귓가를 맴돌아 밤새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걔가 에시어라면.
걔가 에시어라면.
아니, 에시어랑 무슨 원수진 일 있나?
아무래도 전생에서의 일과도 연관이 있어 보이는 그의 ‘에시어라면’이라는 표현이 거슬려 미칠 것 같았다.
그래, 소설의 소개에서는 ‘어릴 때 만난 옆집 여자아이로 인해 여성 혐오를 갖게 된다.’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솔직히 말해 전생의 레티시아가 여성 혐오를 심어 줄 정도로 리안을 괴롭힌 건 아니었다.
그럼 소설에 나오지 않는 서사가 존재한다는 건데.
‘그게 뭘까.’
리안이네 엄마가 무슨 말을 했을까?
에시어한테 은혜를 입으면 안 된다고?
아니면 에시어한테 해코지라도 당했나?
별별 생각이 다 드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럼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는 걸 이야기해야 했다. 그랬다가 상황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이대로 중정에서 연습도 안 하고 더 꽁꽁 숨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안 돼.
혹시라도 쟈이든까지 떼어 놔 버리면.
‘최악이야.’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상황은 절대 막아야 했다.
그래야 아빠가 귀환해서 리안이를 직접 데리고 가 황제의 앞에 보일 수 있을 테니까.
그 사이에 내가 아주아주 잘해 줄 작정이었는데, 리안이가 계속 이렇게 싫어하면….
처음 계획대로 거리를 두고 그가 넘어올 때까지 지켜봐야 하나.
답답한 마음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아.”
짧은 팔을 눈두덩이 위에 올려놓았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리안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어째 할아버지의 눈에 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리안이 마음 얻기에 다시금 길게 한숨을 몰아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기씨, 피어스입니다.”
피어스의 나직한 목소리에 끙차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
‘우와.’
내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으로 들어선 피어스를 올려다보았다.
“피어스, 키 또 컸어?”
“아, 네.”
이젠 정말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만 같았다.
“곧 아빠보다 크겠다!”
피어스가 아빠와 비교하는 내 말에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인 채 뒷덜미를 긁었다.
“몸도 커져야지요.”
“몸도 커졌어!”
처음 봤을 때는 기사단에 들어가서 적응이나 할까 싶었는데.
‘역시 마검사인가,’ 하는 생각에 그를 샅샅이 살펴보다 이내 고개를 푸르르 떨었다.
“피어스, 왜 와써?”
“아, 며칠 전에 알아보라고 하신 거, 그거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며칠 전?
“리안이?”
“네.”
피어스의 끄덕임에 조금 씁쓸한 얼굴로 입꼬리를 당겼다.
“아, 그거 내가 알아냈어, 리안이 검술 훈련하느라 일부러 집에 있는데도 없는 척한 거래. 나쁜 놈.”
나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나 피하는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혹시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 해서 알아보라고 한 거야. 고생시켜서 미안, 피어스.”
내 쓸쓸한 웃음에 피어스의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
“아, 네.”
뭔가 찜찜한 끄덕임에 고개를 들었다.
“왜? 또 뭐가 있었어?”
“아, 그게.”
피어스가 이걸 말해야 하나 마나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저녁 시간에는 아기씨의 말씀대로 검술 훈련을 하고, 낮 시간에는 두 사람 모두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